“거리가 똥 냄새로 가득해요”···번식 위한 이 식물의 생존법 [생색(生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11. 1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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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색-37]가장 오래 살아남은 자가 가장 강한 존재라면, 지구의 폭군인 인간조차도 머리를 조아려야 합니다. 이 생명체가 지구에 처음 등장한 이후 무려 2억 7000만년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태초에 태어난 모습 그대로입니다. 인간, 그러니까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의 형태를 갖춘 건 고작 30만년 전. 그만큼 엄청난 생명력을 자랑하는 셈이지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식물 중 하나인 은행나무 이야기입니다. 한반도 전역이 빨갛고 노랗게 물들은 아름다운 가을 날, 저는 이 생명체가 가진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후각보다 중요한 건 시각이라네.” 이탈리아 피렌체의 은행나무. [사진출처=Susanna Giaccai]
‘살아있는 화석’ 은행나무
은행나무가 처음 등장한 2억 7000만년 전은 ‘페름기’(Permian)입니다. 우리 인간이 속하는 포유류조차 등장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고생명체의 대명사 삼엽충이 존재하던 시절이었지요. 한 때 지구를 지배한 공룡조차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시기. 은행나무가 처음 지구에 뿌리를 내리고 약 2000만년이 지났을 때 지구에 대격변이 찾아옵니다.

“친구야, 너 좀 냄새가 난다.” 삼엽충 화석. [사진출처=Kevin Walsh]
전체 지구 생물의 50%를 멸종시킨 ‘페름기 대멸종’입니다. 지구 역사상 가장 많은 생명체가 사라진 사건. 러시아 시베리아 트랩과 중국 어메이산 트랩에서 화산이 폭발하면서 일어난 재앙이라는 분석이 유력합니다.
“한번 돌면 무서운 사람 아니 산이라네.” 페름기 대멸종을 유발한 것으로 알려진 시베리아 트랩. [사진출처=OlgaChuma]
지구가 지옥에 빠져있을 때도 은행나무는 고고히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은행나무들이 수령 1000년을 자랑하는 데는 그만한 ‘가족력’이 있던 셈이지요. 지구 대멸종까지 견뎠으니, 임진왜란이나 6·25 전쟁 쯤은 거뜬한 것이지요.
나무에도 성별이 있다?
오랜 시간 지구에 터줏대감으로 자리한 은행나무는 사랑하는 방식마저 독특합니다.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나뉘어 있기 때문입니다. 수나무는 꽃가루를 바람에 실려 보내 암나무의 꽃에 안착시킵니다. 수정이 이뤄지는 결과물이 우리의 코를 괴롭히는 ‘은행’입니다. 은행나무에 은행이 없다면 수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람타고 자기에게 갈래~” 은행나무 수나무의 꽃. [사진출처=Ginkgob]
“응 꺼져.” 은행나무 암나무의 꽃. [사진출처=Ginkgob]
암나무와 수나무가 나뉘어 수정하는 유일한 식물입니다. 다른 나무들은 보통 한 줄기에서 암꽃과 수꽃이 함께 존재합니다. 옆에 있어야 수정이 이뤄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원시적인 사랑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오랜 시간 존재를 유지해 왔던 셈.
2억 7000만년을 살아온 그들의 비결
오랫동안 제 모습을 지킨 데에는 녀석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은행에서 나는 매캐한 냄새가 그 증거입니다. 은행에서 나는 냄새는 뷰티르산과 발레르산이라는 화합물 때문입니다. 이 화합물은 실제로 썩은 버터에서도 발견됩니다. 웬만한 동물이나 곤충들이 은행나무에 접근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향긋한 냄새로 곤충을 유혹해 번식하는 다른 꽃들과는 다른 모습이지요.
“똥냄새 지옥을 보고싶니?” 은행은 열매가 아닌 씨앗이다. [사진출처=H. Zell]
고약한 냄새를 풍기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은행나무가 처음 등장한 시기에는 은행(씨앗)을 짓이겨 먹는 동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씨앗이 짓이겨지면 다른 곳에서 뿌리를 내리기 어려워집니다. 동물이 씨앗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매개체가 될 가능성이 또한 적어지지요.

은행나무는 씨앗인 은행이 밖으로 훤히 드러나 있는 겉씨식물입니다. 맛있는 열매가 씨앗을 감싸 안는 형태인 속씨식물과는 달랐지요. 독한 냄새를 풍기게 만들어서 포식자들을 내쫓는 방법이 번식에 유리했던 것입니다. 새끼를 지키려는 모성이 은행을 악취로 덮은 셈입니다(놈들은 우리 인간의 먹성을 몰랐습니다).

“나를 먹는 자, 이 무덤에 묻히게 될 것이다.” 미국 뉴욕의 은행나무. [사진출처=Rhododendrites]
멸종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식물
우리 인간은 분류학적으로 이렇습니다. 동물계, 척삭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 , 사람속, 사람. 은행나무는 분류학적으로 이렇습니다. 식물계, 은행나무문, 은행나무강, 은행나무목, 은행나무과, 은행나무속, 은행나무.

분류 명칭마다 은행나무가 계속 반복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은행나무문에는 단 하나, 오직 은행나무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척삭동물문에는 약 6만 5000종의 생명체가 존재하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은행나무문에는 사진처럼 다양한 식물이 존재했지만 모두 멸종해버렸다. [사진출처=Peter R. Crane, Pollyanna von Knorring]
“너 몇년생이니?” 4900만년 전 은행나무 잎 화석. [사진출처=Kevmin]
2억 7000만년 세월 동안 다른 형태로 진화한 은행나무문의 많은 식물이 결국 멸종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은행나무를 ‘살아있는 화석’으로 부르는 이유입니다.

가을, 은행나무는 그 잎을 노랗게 물들입니다. 겨울을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햇빛이 줄어들고 기온이 낮아짐을 녀석들은 누구보다 먼저 눈치챕니다. 잎을 떨어뜨려야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다시 내년을 기약합니다. 2억 7000만년을 살아온 방식입니다.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기억하는 존재인 은행나무. 더 늦기 전에 녀석들의 월동 준비를 보러 가야겠습니다.

“날 보러 오소.” 경기도 양평 용문사의 1000년된 은행나무. [강영운 기자]
<세줄요약>

ㅇ은행나무는 무려 2억 7000만년전부터 그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해온 살아있는 화석이다.

ㅇ씨앗인 은행에서 악취가 나는 이유도 포식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ㅇ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잎을 바라보면서 생(生)의 기적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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