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K가 '입도선매'하는 양성자가속기…"우주·반도체 패권 다툼에 성능 높여야"

이병구 기자 2024. 11. 1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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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한국원자력연구원 양성자과학연구단에 있는 양성자가속기. 75m 길이의 관을 따라 양성자가 초속 13만km 속도까지 가속된다. 이병구 기자 2bottle9@donga.com

두께 2m가 넘는 차폐문을 열자 75m 길이의 커다란 금속관이 나타났다. 물질을 이루는 작은 입자인 양성자를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시켜 반도체, 신약·신소재 등 첨단기술 개발에 활용하는 국내 유일 '양성자가속기'다.

"최근 반도체와 인공위성이 대기·우주방사선에 노출됐을 때도 안전하다는 국제 인증이 필요해지면서 양성자가속기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가속기로 인공적인 방사선 노출 환경을 만들어 영향평가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 상태에서 수십 년 걸리는 방사선 피폭을 1초 만에 조사할 수 있습니다."

이재상 한국원자력연구원 양성자과학연구단장은 7일 경북 경주시 연구단 본원에서 진행된 '제4회 과학언론인 원자력 아카데미'에서 양성자가속기를 소개하며 이같이 말했다.

반도체와 우주 개발 시장이 확대되면서 중성자, 양성자 등 방사선이 전자제품이나 우주 소재·부품에 주는 영향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지상에서 항공기 운항 고도까지는 주로 전하가 없는 입자인 중성자가, 그 이상 고도와 우주에서는 고에너지 양성자가 영향을 준다.

특히 반도체는 공정이 미세화되면서 방사선 노출로 인한 오류가 일어날 확률이 높아졌다. 자율주행, 인공위성 등 첨단 기술에서는 잠깐의 오류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제품의 내방사선 성능 인증 기준들도 속속 등장했다. 

이 단장은 "우주방사선 영향 평가를 하려면 국제우주정거장(ISS) 등 실제 우주비행체를 활용해서 노출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제품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가속기를 활용한 방사선 영향평가가 필수적이라는 분석이다.

양성자가속기는 고주파로 양성자 빔을 발생하는 장치와 양성자를 가속하는 RFQ 가속기, DTL 가속기 등으로 이뤄졌다. 도달한 속도에 따라 가속하는 방법이 다르다. 장치는 온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가속기 주변은 항상 27℃ 정도로 유지된다.

현재 경주 양성자가속기는 양성자를 초속 13만km까지 가속할 수 있다. 이때 양성자 빔 에너지는 100MeV(메가전자볼트) 수준으로 다른 원자핵을 쪼개 중성자를 생성할 정도의 세기다. 가속된 양성자 또는 양성자를 이용해 2차로 만든 중성자, 이온 빔은 각각 용도에 맞게 테스트룸으로 이동돼 활용된다.

양성자가속기로 만든 양성자 빔을 반도체 시료 등에 쏘고 영향을 평가할 수 있는 102번 테스트룸. 가속기가 있는 공간과 마찬가지로 두꺼운 차폐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 빔이 발사될 때는 사람에게 위험한 수준의 방사선이 나오기 때문에 차폐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이병구 기자 2bottle9@donga.com

경주 양성자가속기는 평균 가동률이 96%에 달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 이 단장은 "연간 빔 서비스 일수의 40%를 국내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서 활용한다"며 "일부 중소기업도 사용을 의뢰하는 등 점점 수요가 커져 올해 하반기에는 시범적으로 24시간 운영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경주 양성자가속기의 출력인 100MeV는 현재 국제 표준 기준에 조금 못 미쳐 아직 활용이 제한적이다. 국내 반도체 기업 납품 거래처의 대기방사선(중성자) 영향평가 최소 사양에도 부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단장은 "기준을 만족하려면 200MeV까지 성능을 높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우주방사선 영향평가 관점에서도 국제 표준은 20~200MeV 에너지 영역에서 테스트를 권장한다. 현재 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유럽우주국(ESA) 등이 우주방사선 내구성을 인증해 주고 있지만 직접 방사선 영향평가를 진행하진 않는다. 인증을 의뢰한 기업이나 기관이 각자 진행한 방사선 영향평가를 검토하는 방식이다.

국내 영향평가에서 부족한 부분은 해외 시설을 사용해서 충족해야 한다. 양성자가속기는 세계에 몇 없는 거대 과학시설이다. 이 단장은 "500MeV 이상급은 9개국에 10여 기, 100MeV이상급은 전세계에 20여 기 정도 있다"며 "반도체, 우주 기술 패권 다툼이 심화되면서 점점 자국우선주의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자체 가속기가 없으면 경쟁에서 불리하다는 뜻이다.

200MeV를 달성하려면 가속기 길이를 60m 늘려야 한다. 예산은 1500~2400억원 사이로 예상되며 현재 2029년까지 구현하는 것이 목표다. 이 단장은 "국제 인증을 받지 못한 제품은 경쟁에서 밀린다"며 "일단 200MeV까지 양성자가속기 성능 향상을 서둘러야 한다"고 밝혔다. 또 한번에 더 많은 연구기관과 기업이 사용할 수 있도록 테스트 공간도 확충될 예정이다.

이후 가속기가 1km 길이까지 확장되면 에너지를 1GeV(기가전자볼트, 1MeV의 1000배)까지 구현할 수 있다. 1GeV급 가속기는 물질 극미세 구조를 분석해 신약, 신소재 개발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병구 기자 2bottle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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