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생각해낸 복수 ‘대통령의 가발 벗기기’ [독서일기]
김선희 지음
달의계절 펴냄
“많은 희곡을 쌓아놓고 읽었으면 좋겠다. 가을은 희곡을 읽는 계절이다.” 한국의 시인·소설가 스물여덟 명의 일기를 모은 〈작가일기〉(푸른숲, 1990) 83쪽에 나오는 어느 멍청한 시인의 말이다. 희곡은 언제 읽어도 좋은데 계절이 무슨 상관인가. 최근에 나온 희곡집 네 권을 읽었다.
연혜원의 〈가장자리를 위한 복수 노트〉(화이트리버, 2024)는 열여덟 개 장으로 구성된 30여 쪽 남짓한 분량의 단막극이다. 이태원 참사 때 오빠를 잃은 미현은 대통령에게 사과를 구걸하기보다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사과하고 떵떵거리는 모습 절대 보기 싫어. 영원히 수치스러운 기억을 주고 싶어.” 그녀가 생각해낸 복수는 대통령의 가발을 벗기는 것이다(대통령의 가발 착용은 작중 설정이다). 그러나 미현이 복수를 하기도 전에 대통령이 암살되고 범인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 파격적인 플롯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렇다. “피해자는 존재하는데, 가해자가 없을 수 있을까요? 자연재해라거나, 혹은 자해를 한 것이 아니라면, 가해자가 없는 피해자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김선희의 〈헤븐호텔놀이〉(달의계절, 2024) 역시 앞서 소개한 작품처럼 발단-전개-절정-반전-결말로 이루어진 잘 짜인 극작의 관례를 따르지 않는다. 스물세 개 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이들은 모두 우연한 기회에 열쇠 하나를 줍거나 얻게 된다. 사람들은 그 열쇠가 ‘헤븐 호텔’의 방 열쇠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는 눈치이지만, 열쇠를 얻은 사람의 반응은 일률적이지 않다. 어떤 사람은 그곳에 가보고 싶어 하고 어떤 사람은 무관심해서 그 열쇠를 다른 사람에게 준다. 이것은 도시 전설이다.
다들 알다시피, 유토피아는 ‘여기에 없는 곳’이다. 유토피아는 실현되면 가치를 상실하고 말기에 상상으로만 가능한 장소다. 이 때문에 미셸 푸코는 유토피아의 대안으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제안한다. 유토피아가 ‘여기는 아님’이라는 현실 부정적 전제를 은연중에 깔고 있다면 헤테로토피아는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 공간에 생겨난다. 지배와 억압이 일어나는 배치를 거역하고 현실의 공간을 정화하거나 전복하는 공간으로서 헤테로토피아는, 거창하거나 소소할 수 있다. 1969년 8월15~17일에 열린 우드스톡 음악예술축제가 전자라면, 아이들이 원시인 놀이를 하기 위해 아파트 마루에 쳐놓은 작은 난방텐트는 후자다. 그렇다면 도시 곳곳에 해방구처럼 서 있는 호텔은 어떨까. 친구가 주운 열쇠를 대신 차지하게 된 한 등장인물은 ‘헤븐 호텔’ 앞에서 왠지 모를 자격지심과 죄의식을 느낀다. 이 대목에서 헤븐 호텔의 한계는 고스란히 헤테로토피아의 한계로 전이된다. 나(우리)만 해방되고도 행복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인가.
이철의 〈산재일기〉(아를, 2024)는 무대의 스크린에 “2,080 / 122,713”이라는 자막이 영사되는 것으로 연극을 시작한다. 앞 숫자는 2021년 한 해 동안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 수, 뒤의 숫자는 재해자 수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산재 사망률이 매우 높아서 매해 수위를 차지한다. 이 연극은 통계수치로 박제된 산재 피해자들의 지워진 목소리를 개별적으로 드러내고, 산재가 일어나는 구조를 파헤치고, 그것을 근절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버바텀 연극”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버바텀(verbatim)은 ‘말 그대로’라는 뜻이다. 이 연극 형식은 실제 인물의 인터뷰 내용을 장면 구성의 핵심 자료로 삼고, 그 밖에 논문이나 통계 등 여러 자료에서 필요한 내용을 선별한다. 작가는 오랜 대담 작업에서 얻은 산업재해 피해자(피해자 가족)·활동가·노동조합원 등의 증언과 국회 청문회장(2021년 2월22일)에 나온 정치가와 기업가 등의 발언을 취합해 이 작품의 대본을 만들었다. 이 형식의 기원은 1920년대 독일에서 에르빈 피스카토어가 시도했던 다큐멘터리극(기록극)에서 찾을 수 있으며, 피스카토어의 유산은 독일 정치 연극의 자산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책 앞머리에 하종강 성공회대 교수는 원고지 10여 장 분량의 추천사에 이렇게 썼다. “희곡이 소설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도 새롭게 깨달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달라진 연극
구자혜의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워크룸프레스, 2024)은 1부에 네 편, 2부에 세 편의 작품을 싣고 있으며, A4 두 장에 인쇄된 짧은 단막 한 편이 별지로 첨부되어 있다. 이 작품들 가운데 가장 읽기 쉬운 것은 표제작이자 1부 첫 번째 작품인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사는 고등학생 캐롤은 10년째 함께 살던 반려견이 실종되자 학교에 결석하고 개를 찾아다닌다. 그녀는 개를 찾는 중에 결석 사유서를 제출하려고 하는데, 학교에서는 본인이 아프거나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죽은 경우 외에는 결석 사유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캐롤은 졸업장을 따지 못한다.
이 희곡집에 실린 작품 여덟 편 가운데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이 그나마 읽기 쉬운 것은 이 작품이 전통적인 극작술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잘 짜인 극만큼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극은 발단(반려견의 실종), 전개(결석 사유서)가 있고, 절정은 없지만, 반전과 결말(실종된 반려견이 죽은 채 나타나 캐롤에게 해결책을 준다)이 있다. 게다가 반려견도 인간의 가족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논제로 올려놓고 인간 중심주의를 꼬집으며 동물권을 확충하려는 뚜렷한 주제도 갖췄다. 하지만 작가가 정작 몰두하고 싶은 것은 연극성이다. 죽은 반려견은 천연덕스럽게 내레이터 역할을 하고(조동진의 노래를 좋아한다면서 흥얼거리기까지 한다), 등장인물들은 불쑥불쑥 자신들이 하고 있는 연극에 대해 뭐라고 한마디씩 거들지 못해 안달한다(“연극 더 이상 망치지 않을 자신 있어?”).
연극에서 말해지는 사실성은 환영주의(幻影主義·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연극이 아니라 현실인 것처럼 관객에게 보이도록 연극을 만드는 태도)일 때가 많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대에서 환영이 일관되게 유지되는 것을 감독하기 위해 〈시학〉을 썼다. 환영주의는 세계가 더 이상 환영이라는 요람에서 아기처럼 누워 있을 수 없게 되면서 극장주의(劇場主義·현실 모방을 떠나 극장에서만 가능한 표현을 추구하는 태도)에 자리를 내준다. 홀로코스트와 핵폭탄이라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이 대표적인 극장주의 연극인 부조리극을 낳은 것처럼, 구자혜는 희곡집 말미에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쓴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그 전의 연극 만들기 방식은 연습실과 극장에서 작동하지 않았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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