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돈으로 보일 때, 우리가 잃을 것들
미술로 보는 자본주의 l 가치와 가격의 괴리 ④ 화폐가 된 미술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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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미술계를 이끄는 전문가와 대중의 안목 간의 시차를 시장이 조율하면서 예술성과 자본의 공모는 일정 부분 불가피하다. 그런데 예술과 자본의 관계가 밀접해지고 밀월 관계가 지속되면서 일부 고가 작품이 자본을 닮아가는, 작품의 화폐화 및 자본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제 이들 작품은 예술보다 돈과 유사하고 자본과 유사하다.
비싼 예술작품의 가치는 그동안 희소성으로 설명해왔다. 세상에 단 한 점뿐인 작품을 배타적·독점적으로 소유하고 감상하기 위해 값비싼 비용을 지불한다는 것이다.
고가 작품을 구매하는 이유
그런데 미술작품의 전시와 거래가 극소수의 인기 작가에 집중된 오늘날, 희소성의 원리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소수의 유명 작가 작품은 갤러리나 경매회사 등에서 얼마든지 감상할 수 있는 데 비해, 시장에서 소외된 대부분의 작품은 작가의 전시회가 아니면 보기 어렵다. 특히 유명하지 않았던 작고 작가 작품의 경우 직접 소장하지 않으면 사실상 감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다양성이 사라진 미술시장에서 이제 희소성은 유명 작가의 고가 작품이 아니라 비주류 작가들의 작품 구매를 설명해준다.
유명 작가의 고가 작품을 구매하는 논리는 명품 구매와 유사하다. 즉 기능이나 품질보다 브랜드와 외관이 우선이다. 예를 들어 가방을 살 때 에르메스라면 수천만원을, 샤넬이면 수백만원을 지불하려 한다. 하지만 아무리 튼튼하고 멋진 가방이라도 명품브랜드가 아니라면 그런 금액을 결코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걸치거나 들고 있는 명품은 자신의 경제적 지위나 계급을 특정 브랜드라는 기호를 통해 드러낸다. 따라서 이때 가격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그 물건이 발휘할 수 있는 기호가치로 정해진다.
이와 유사하게 내 집이나 사무실에 있는 작품은 공간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인테리어 기능을 넘어 주인의 예술적 안목과 경제적 지위를 드러낸다. 그런데 값이 비싼 작품일수록 전문가의 검증을 통과한 작품이어서 더욱 높은 예술적 안목과 경제적 지위를 과시할 수 있다. 여기서 명품이나 비싼 예술작품은 소유자의 경제적 지위를 나타내는 기호로 작동하며, 따라서 사실상 화폐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통상 화폐는 공급에 제한이 있다. 한 나라의 중앙은행만이 화폐를 발행할 수 있고, 중앙은행의 통제 아래 일반은행이 대출을 통해 통화를 공급한다. 중앙은행의 기능은 무엇보다 국가의 경제 규모에 부합하는 적정량의 화폐가 유통되도록 통화량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급이 관리되는 대표적인 시장이 미술품 시장이다. 미술작품은 작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작품 수가 제한될 뿐 아니라 작가를 관리하는 전속화랑은 시장의 수급 동향과 구매자의 성향, 자산 규모 등을 꼼꼼히 살펴 작품을 판매한다. 모든 경제 인구가 넉넉하도록 통화량을 관리하지 않는 것처럼, 미술시장에서도 관건은 늘 수요가 공급을 어느 정도 초과하도록 작품의 공급을 관리하는 데 있다.
화폐보다 우수한 가치 저장 수단
화폐와 달리 자본은 이윤을 추구하는 돈이다. 오늘날 수천만원, 수억원대에서 수십, 수백억원에 이르는 작품을 향후 가치변화의 전망 없이 구매하는 것은 무능과 무지로 간주된다. 실제로 최근 컬렉터들은 구매 때 향후 투자가치를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심지어 투자수익을 위한 단기매매도 빈번하다. 과거의 숱한 실패 사례에도 불구하고, 미술시장이 활황이 되면 다양한 형태의 미술품 투자사업이 판을 친다. 이는 미술품이 주식이나 채권처럼 투자자산으로서 기능한다는 대중의 믿음에 기반한 것이다.
지난 리먼 사태부터 팬데믹에 이르기까지 십여 년간 전세계적인 양적완화로 풀린 엄청난 양의 통화는 자산가격의 상승을 초래했다. 이 기간에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최상위 부유층이 소유한 자산, 예를 들면 고가 주택, 고가 미술품, 고가 명품의 가격은 더 크게 상승했다.
이들 부유층은 시장이 침체할 때 자신의 자산을 싸게 팔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이들이 보유한 자산은 가격에 하방경직성이 있다. 그리고 이런 하방경직성이 확인되면 상승 시기엔 훨씬 강한 상방 탄력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고가의 미술품은 화폐가치가 하락해도 쉽게 가치가 하락하지 않아서 화폐보다 우수한 가치의 저장 수단이다. 가격이 오를 때는 우선적으로 올라서 이윤을 창출하는 돈, 즉 자본에 가깝다.
그래도 미술작품은 근본적으로 아름답고 따라서 미적 향유라는 사용가치를 무시할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 다만 오늘날 현대미술은 아름다움보다는 숭고, 즉 학습해야 느낄 수 있는 미적 감성에 호소하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동의하는 좋은 작품의 아름다움을 지니지 않는다.
게다가 유행의 주기에 따라 미(美)와 추(醜)가 등가로 교환되는 소비사회에서 아름다운 것은 언제든 추한 것으로 돌변할 수 있다. 오히려 마르셀 뒤샹의 변기나 자전거 바퀴와 같이 일반적인 미적 취향과 무관한, 어떤 미적 감흥도 일으키지 않을 대상이라야 유행의 변화를 견뎌낼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고가에 거래되는 한국의 단색화나 서구의 미니멀한 회화,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 등의 작품은 일반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지만, 모든 작품의 외관이 거의 동일해 특정 작가의 특정 연작이라는 것을 명백히 드러낸다.
예술의 향유라는 기능 마비
사회의 양극화와 더불어 미술시장도 양극화되면서 극소수 작가의 작품은 초고가에 거래되고 도처에서 전시된다. 이에 비해 그 외 대다수 작가의 작품은 접할 기회가 제한되면서 자연스레 미적 취향의 획일화를 초래한다. 그래서 초고가 작품들로만 도배된 미술시장에서 이들 작품은 화폐와 자본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막상 예술의 향유라는 기능은 마비시킨다.
다양성이 없는 곳에서 자유는 무의미하듯 다양성이 없는 미술에서 각자의 취미나 취향 역시 무의미하다. 투자가 아니라 예술의 향유를 기대한다면, 이제 투자가가 아니라 보기 힘든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에 기꺼이 희소성의 대가를 지불할 다수의 취향 있는 컬렉터들이 필요하다.
이승현 미술사학자 shl2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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