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 고친다”…우리가 아는 ‘미국 리더십’, 트럼프가 끝내나 [박수찬의 軍]
“미국이 돌아왔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이던 2020년 11월 외교안보팀을 지며하면서 세계를 향해 ‘미국의 귀환’을 선포하며 동맹 복원과 글로벌 리더십 회복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세계의 경찰’ 미국의 리더십은 막을 내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시대가 저물고 ‘미국 우선주의’가 더욱 뚜렷해진다면, 국제정세는 불확실성이 증대될 수밖에 없다.
국내에서 그 어떤 정치적 견제도 받지 않게 된 트럼프 당선인이 내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보여줄 행보에 우려의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
◆트럼프식 ‘미국 우선주의’ 짙어지나
제2차 세계대전 이래로 미국은 민주주의를 세계에 확산하고 지키는 것을 강조해왔다. 이른바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다.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는 2차 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이 자신을 모방한 법치와 자유주의 정치원칙을 자국의 우월한 국력과 결합한 것이다. 미국과 유럽을 잇는 대서양 동맹, 아시아에서의 상호방위조약 등이 이를 뒷받침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었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강경한 반공주의로 국제정치를 이끌었다.
냉전 붕괴로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이 된 이후엔 민주주의 체제 확장을 내세워 다른 지역과 국가에 대한 개입도 더욱 확대했다.
이라크를 침공해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모든 국가에서 민주주의 성장을 지원하겠다”며 적극적인 개입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그 결과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2017년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출범했다. 당시엔 일시적인 현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 당선인이 4년 만에 재당선되면서 국내 정치와 경제를 우선하는 고립주의 기조가 미국 여론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이 뚜렷해졌다.
사실 미국에선 개입주의보다 고립주의의 역사가 더 길다. 1832년 유럽과 아메리카의 상호 불간섭 원칙을 밝힌 ‘먼로주의’는 신대륙(아메리카)과 구대륙(유럽)을 서로 분리시키는 효과를 거뒀다. 1920년 국제연맹 창설 당시에도 미국은 상원에서 부결되어 가입하지 못했다.
우리가 아는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고립주의와 비교하면 역사가 짧다. 언제든 과거로 돌아갈 여지가 있었던 셈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등장은 먼로주의나 자유주의와는 다른 트럼프주의 대외정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1기 행정부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파리기후협정이나 세계보건기구 등 미국이 추진했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틀을 약화하거나 포기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2기에서도 이같은 기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오히려 더욱 정교하게 실행될 수도 있다. 1기 시절 트럼프 당선인은 경험이 부족해서 정책 수행과정에서 서투름과 비일관성이 적지 않았고, 의회 등에서 반격을 받았다.
일부 국가만 참여하는 소다자나 양자 관계 틀은 유지되겠지만,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포함되는 다자 관계는 약화할 수 있다.
1기 당시 논란이 됐던 한미 방위비분담금처럼 협상이나 재협상 또는 충격요법으로 기존 질서를 바꾸려 할 수 있다. 트럼프는 종종 나토에서 탈퇴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강대국 간 세력권 분할을 택할 수도 있다.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는 가능한 많은 나라에 민주주의를 전파한다는 것이지만, 세력권 분할에 의한 현실주의 외교는 강대국 간 세력권을 서로 인정하는 모양새다.
1902년 영일 동맹이나 1938년 뮌헨협정처럼 강대국이 세력권 분할이 실현된다면 약소국들의 국제적 입지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대만 등에 대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태도에 우려가 제기되는 대목이다.
2기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정책을 가늠할 첫 무대는 우크라이나가 될 전망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선거 전부터 전쟁의 원인이 우크라이나에 있다며 지원 중단을 암시했고, ‘영토 거래’만 있으면 전쟁은 끝날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대신 국내 경제 문제 해결을 우선하는 미국 내 여론을 감안하면, 2기 트럼프 행정부는 종전을 서두를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6일 트럼프 당선인 측근 사이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최소 20년 유예하고 현재 전선을 동결한 채 비무장지대를 조성하는 방안 등이 종전 구상으로 거론된다고 밝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입장에선 영토의 20%를 포기해야 한다. 국내 정치적 입장 등을 감안하면 수용하기가 어렵지만, 미국의 제안을 거부하는 것도 쉽지 않다. 미국의 지원이 대폭 축소되거나 중단되면 러시아의 위협은 훨씬 커진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영토 일부를 넘겨주는 방식으로 종전을 진행하면, 동유럽과 대만을 비롯해 고도의 군사적 위협에 직면한 국가들의 불안도 한층 커“질 전망이다.
특히 상·하원을 공화당이 장악해 견제 장치가 사라진 2기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가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는 트럼프 당선인의 변덕스런 행동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불안은 더욱 증폭될 위험이 있다.
트럼프 당선인이 1기 때처럼 행동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적지 않다. 2025년의 주변 환경은 2017년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한은 2017년엔 고립된 국가였으나 현재는 러시아와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치르는 러시아에 막대한 규모의 무기를 제공하고 병력을 파견한 대가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6월 러시아와 북한이 체결한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북러조약)을 언급하며 “조약에는 상대방이 침략받으면 상호 지원한다는 제4조도 있다”고 덧붙였다. 러시아가 북한에 힘을 실어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북한 핵능력도 2017년보다 훨씬 강해졌다. 고체연료를 쓰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해 미 본토 전역을 위협권에 두고 있다. 1기 트럼프 행정부 시절과는 확연히 다르다.
중국과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양국의 관계는 어느 때보다도 긴밀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최근 수년간 수십 차례 만나서 수백 시간에 걸친 대화를 나눴다.
과거에는 공개를 꺼렸던 첨단 기술도 공유되고 있다. 러시아의 첨단 스텔스기 Su-57이 주하이 에어쇼 참가를 위해 중국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군도 J-20에 이어 J-35A 스텔스기를 만들었으며, 전자전 능력도 한층 강화되는 모양새다.
국제 환경이 4년 사이에 극적으로 바뀌고, 위험 수준도 훨씬 강해진 상황에서 2기 트럼프 행정부가 1기 시절처럼 행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관측이 조심스레 제기되는 대목이다.
트럼프 당선인의 등장은 한국 정부가 지금까지 추진했던 외교안보정책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목소리로 이어지고 있다.
이익을 중시하는 트럼프 당선인의 특징과 급변하는 국제정세 및 경제 상황을 감안한 실용외교 전략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한반도와 주변 정세가 요동치는 지금, 새로운 시대를 맞는, 새로운 준비가 절실한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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