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이》 손잡고 국악이 살아온다
(시사저널=정덕현 문화 평론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드라마 《정년이》로 인해 여성 국극과 국악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콘텐츠와 결합해 '힙'해지고 있는 국악의 세계. 그 시너지는 어떻게 생겨나고 있을까.
여성 국극 1세대의 한마디
"죽을 때까지도 못 잊을 거예요. 내 나이가 벌써 90인데, 부모님이 물려주신 목구멍은 성해요. 그래서 말은 잘하고 노래는 잘하는데…춤도 움직일 수는 있어요. 그러나 앞으로 더 남은 여생이라도 우리 여성 국극을 위해 힘쓰라는 말씀으로 알고 이 영광스러운 상을 받겠습니다."
10월2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이데일리 문화대상'에서 국악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조영숙 명인은 수상 소감에서 이런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 그가 수상자가 된 건 《조 도깨비 영숙》이라는 작품에 서게 되면서다. 이 작품은 이날치 밴드의 베이시스트이자 각종 영화, 드라마의 음악감독이기도 한 장영규와 가장 현대적인 방법으로 전통 가곡을 노래하는 박민희가 여성 국극 1세대인 조영숙 명인의 삶과 예술을 조망한 하이브리드 무대다. 《선화공주》의 전막을 올린 이 작품에서 조영숙 명인은 90세의 나이가 무색하게 선화공주부터 철쇠까지 1인5역을 소화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잔뜩 굽은 등으로 운신도 쉽지 않지만 여전히 쩌렁쩌렁한 목소리에서 젊은 시절의 여성 국극 배우가 떠오른다. 그건 다름 아닌 최근 tvN에서 방영되고 있는 《정년이》에서 우리가 푹 빠져 있는 '매란국극단' 배우들의 모습이다.
조영숙 명인이 수상 소감에서 밝힌 것처럼 여성 국극은 사실 이대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세종문화회관에 조영숙 명인에 대한 헌정을 담은 무대가 올라 국극이 새롭게 조명받을 수 있었던 데는 드라마화된 《정년이》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이미 웹툰으로도 큰 인기를 끈 작품이지만, 드라마화되면서 당대의 여성 국극이 얼마나 힙하고 멋진 것이었는가를 대중에게 실제 무대를 통해 설득시켰기 때문이다.
《정년이》가 선보인 여성 국극은 195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창극의 한 갈래로 소리만이 아니라 춤, 연기까지 모두 소화하는 종합공연예술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 《춘향전》이나 호동과 낙랑공주 같은 역사를 소재로 한 《자명고》 같은 작품들이 무대에 올랐다. 드라마 《정년이》는 이를 재연해 내기 위해 1년 이상 공을 들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드라마를 통해 재연돼 공개된 《춘향전》 《자명고》는 극 중 극으로 호평을 받으며 화제가 됐다. 그리고 《정년이》가 촉발시킨 여성 국극에 대한 관심은 이제 그 창극 속에 담긴 춤과 소리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사실 드라마 《정년이》의 음악감독은 조영숙 명인의 삶과 예술을 담은 《조 도깨비 영숙》에 참여한 장영규다. 그가 얼마나 이 일에 진심인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장영규는 과거 어어부밴드 시절부터 국악 퓨전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미국 공영방송 라디오 NPR에 가발을 쓰고, 하이힐을 신고 등장한 영상이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희문이라는 걸출한 신예 국악인을 스타덤에 올려놓았던 민요 록밴드 '씽씽밴드(SsingSsing)'에도 베이시스트로 참여했다. 또 판소리 수궁가를 재해석한 《범내려온다》의 이날치 밴드로도 활약하고 있다. 국악의 현재화에 앞장서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그가 음악감독을 맡은 《정년이》는 우리의 소리가 얼마나 멋진가를 음악적으로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첫 회에 천재 소리꾼인 정년이의 엄마 채공선이 부르는 《심청가》의 한 대목인 《추월만정》은 물론이고 《춘향가》의 《광한루 추천가》 《사랑가》와 《자명고》에서 구슬아기 역할의 주란(우다비)이 부르는 《왕자마마》 같은 곡들이 너무나 멋스럽게 들린다. 물론 그건 드라마가 스토리와 캐릭터를 더해 들려주는 것이라 생겨나는 효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음악적으로도 완성도 높게 구현된 결과여서 가능해진 일이다.
현재화하려는 국악, 한국무용
《정년이》의 인기에는 그간 끊임없이 시도돼 왔던 젊은 국악인들의 도전이 밑거름이 됐다. 국악은 최근 10여 년 동안 현재와 호흡하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해왔다. 《팬텀싱어》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해 국악이 세계 음악과 기막히게 어우러지는 놀라운 무대들을 보여줬던 고영열이나, 홍대 클럽에서 시작해 전 세계를 '얼쑤' 하는 추임새로 채워버린 이날치 밴드, 국악 오디션 프로그램 《풍류대장》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힙한 국악 밴드의 가능성을 보여준 서도밴드가 대표적이다. 뮤지컬부터 창극까지 섭렵하며 방송에도 출연하는 젊은 소리꾼 김준수 같은 국악인들도 있다. 특히 김준수와 고영열이 클래식을 베이스로 하는 퓨전밴드 '두 번째달'과 함께 2016년에 내놓은 《판소리 춘향가》는 국악의 현재적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은 명반이다. 여기서 고영열이 부른 《쑥대머리》는 한국적 정서가 물씬 배어난 발라드처럼 들리고, 김준수가 부른 《어사출두》는 엄청난 속도로 쏟아내는 가사들로 마치 한 편의 힙합을 듣는 듯한 느낌을 줬다. 또 《풍류대장》을 통해 새삼 정가의 매력을 전해 주었던 '해음'도 빼놓을 수 없다. 해음은 정가를 하는 구민지, 가야금을 맡은 하수연 그리고 거문고를 담당한 황혜영으로 구성된 국악 그룹이다.
《정년이》로 인해 커진 한국무용에 대한 관심도 예사롭지 않다. 한국무용을 현재화하려는 힙한 춤꾼들의 노력은 곳곳에서 엿보인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스테이지 파이터》는 발레, 현대무용, 한국무용을 전공한 무용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치열한 계급전쟁을 벌이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인데, 여기서 유독 눈에 띄는 이들이 한국무용을 한 춤꾼이다. 테크닉과 표현력을 보여주는 최호종이나 그의 제자인 김규년, 치렁치렁한 머리와 야수 같은 춤사위로 시선을 잡아끄는 김시원, 절제와 균형미로 어떤 장르에도 자기 춤을 소화해 내는 김효준 같은 춤꾼들이 대표적이다. 한국무용이 가진 부드러운 춤선이 기반이 됐지만, 이들의 춤은 너무나 파격적이어서 발레나 현대무용 무용수들조차 놀라게 만든다.
사실 국악은 우리 고유의 문화지만, 현재는 그 대중적 저변이 사라진 게 사실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국악은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정규로 자리하고 있었다. 조상현 같은 스타 국악인도 존재했다. 또 가요라고 해도 국악을 기반으로 하는 음악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팝 음악이 대중음악의 주류로 자리하면서 전통을 고집하던 국악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갔다. 그래서 이런 표현이 아이러니하기는 해도 '서브 컬처화'된 면이 있다. 메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화됐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 주류와 비주류를 나눠 메인과 서브 컬처가 분리되는 경계들은 무너지고 있다. 저마다의 취향으로 소비되는 문화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서브 컬처를 좋아하며 마니아처럼 취급받던 이들이 주류로 떠오르는 흐름도 생겨나고 있다. 국악도 이 흐름을 타고 있다. 너무나 좋은 것이지만 많은 이가 향유하지 않아 오히려 더더욱 응원하고픈 어떤 것으로서 국악이 주목되고 있고, 《정년이》는 그걸 촉발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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