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맏아들이 실세? 미국판 국정농단?[노원명 에세이]

노원명 기자(wmnoh@mk.co.kr) 2024. 11. 10.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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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장남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파워맨중 한명으로 그의 장남인 트럼프 주니어가 주목받고 있다. 그는 선거 국면에서 아버지의 러닝메이트로 J.D.밴스를 낙점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트럼프 2기 인사를 주도할 것이라 현지 언론은 전망하고 있다. 인수위 상임고문직을 맡은 본인도 대놓고 그렇게 말했다. “정권 이양 과정에 깊게 관여할 생각이다. 대통령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런 사람을 내각에 두고 싶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트럼프 주니어가 ‘1위 대리인’이 될 것이라 전망한 바 있다.

국내 언론들은 이런 전망에 별 모순이나 저항감을 못 느끼는 듯 ‘태연히’ 옮기고 있다. 그 태연함이 내게는 다소 뜻밖인데 지금 국내적으로 대통령 부인에 의한 국정농단 논란이 뜨겁기 때문이다. 지금 논란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김건희 여사가 권력의 배후에서 윤석열 대통령 ‘1위 대리인’으로 행세해 왔다는 의심일 것이다. 대통령 아들이 공식적인 직함을 갖고 차기 정부 인사에 관여하면 괜찮은 일이 대통령 부인이 사적으로 같은 일을 하면 국정농단이 되는 것인가. 물론 트럼프 주니어는 디올백을 받거나 주가조작에 관여한 의혹을 받지는 않고 있다. 디올백과 도이치, 혹은 양평 고속도로가 없었으면 김 여사의 ‘대통령 대리 행세’도 납득되는 것인가.

이쯤에서 비위가 역해졌을 독자를 위해 미리 변명하자면 이 글은 김 여사를 변호하자는 의도로 쓰는 글은 아니다. 내게는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2022년 7월에 쓴 칼럼에서 “아직은 김 여사를 상대로 ‘사람을 싫어하는 병’을 앓고 있지 않다”고 고백했는데 그 사이 기어코 발병하고야 말았다. 그녀가 나오는 사진을 보거나, 심심하면 터져 나오는 녹취록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상한다. 안 보고 안 듣고 싶다. 사람을 싫어하는 병의 전형적 증상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배우자의 조언이 국정농단이면 국어사전을 새로 써야 한다’는 지난 7일 윤 대통령 기자회견 발언이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두고서도 비난이 와글와글 들끓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날 윤 대통령이 한 말 중 가장 쓸만한 말로 평가한다. 그것은 ‘우리는 대통령제에 대해 아무 정립된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는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과 한국은 같은 대통령제이지만 문화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 대통령 당선인의 아들이 새 정부 인사기준을 떠들고 다니면 정부 출범도 전에 민심 이반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김영삼 정부에서 대통령 차남 김현철이 ‘소통령’으로 군림했지만 밖으로는 쉬쉬 했다. 이명박 정부에선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의원이 ‘만사형통’ ‘영일대군’으로 불리며 막후세도를 누렸다. 그러나 한국 국민은 그들이 막후에서 대통령을 호가호위하는 꼴을 봐줄 수 없었다. 민심이 악화하자 검찰이 나섰고 그들은 자신이 세도를 누리던 정권이 끝나기도 전에 감방에 갇혔다. 김현철과 이상득이 구속된 것은 비위 혐의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아무 비위도 저지르지 않고 오직 대통령을 상대로 영향력만 행사했다면 무사했을까. 무슨 죄든 만들어서 처넣었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지금까지 국민 심기를 거슬러 놓고 법망을 빠져나간 이는 없었다. 권력을 다루는 사람을 상대로 죄를 묻기 시작하면 엮지 못할 것이 없다.

대통령 부인 역할도 미국과 한국은 비슷한 듯 다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아내 엘레노어 루스벨트는 전통적 미국 영부인 상에서 떨어져나온 최초의 예외자였다. 여권 운동가였던 그녀는 영부인으로 있으면서 정기 기자회견을 했고 신문에 고정 칼럼을 썼다. 처음엔 욕을 많이 먹었으나 결국 새로운 영부인상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엘레노어는 하반신 마비였던 남편을 대신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민심을 듣고 남편에게 전했다. 정책조언을 한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엘레노어 이후 가장 파워풀한 영부인 소리를 들었다. 정책조언 수준을 넘어서 대통령 비서실이 있는 ‘웨스트윙’에 사무실을 두고 건강보험개혁 태스크포스를 이끌었다.

엘레노어 루스벨트와 힐러리 클린턴은 대통령 부인을 떠나 무슨 기준에서도 뛰어난 스펙과 지성의 소유자들이었다. 어떻게 그들과 김 여사를 비교하겠는가. 그런데 궁금하다. 만일 국내 최고 학부를 나와 외국에서 학위를 따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이 한국 대통령 부인 자리에 앉았다고 치자. 그가 대통령인 남편을 상대로 주요 인사를 천거하고 본인이 잘 아는 정책과 관련해 입법을 주문했다고 가정하자. 한국 국민이 이걸 ‘자격있다’고 할까, ‘니가 무슨 자격으로’라고 할까.

엘레노어 루스벨트와 힐러리 클린턴을 재수 없다고 생각한 미국 국민은 꽤 많았다. ‘우리가 대통령 뽑았지, 영부인 뽑았냐’는 비판은 어느 나라, 어느 문화에서도 합리적인 비판의 범주에 들어간다. 트럼프 주니어가 인수위 전면에서 설치는 것에 대해서도 ‘정권이 가족 사업인가’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미국 좌파 지식인 상당수는 그럴 것 같다. 그래도 이를 두고 ‘국정 농단’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미국 국민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것과 처벌해야 할 것을 구분하는 편이다. 긴 대통령제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직 탄핵당한 대통령이 없고 감옥에 간 전직 대통령이 없는 것은 그 영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통령제 역사가 짧아서일까. 우리는 아직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의 행위 양식에 대해 합의된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지가 있긴 한데 현실이 아니라 천상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다. 그 기준에선 언제나 못난 대통령, 주제넘은 대통령 부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지금 김 여사는 자격도 없으면서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한다고 손가락질 받는다. 굉장한 스펙의 영부인이 비슷한 일을 하면 ‘잘나셨어! 정말’ 그러지 않겠나.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분을 상대로 ‘사람을 싫어하는 병’을 앓은 지 꽤 됐다. 그러나 싫은 건 싫은 걸로 끝나야지 그때 마다 쫓아내는 것이 목표가 되면 이 나라 대통령제가 버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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