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SF 단편들…천선란 신작 '모우어'

황재하 2024. 11. 10.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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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개의 파랑' 작가
'모우어' [문학동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느껴. 언어가 되는 순간 감정은 단순하고 납작해져. 자연과 우리는 분리되고, 우리는 또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규정하고, 구분하려 들겠지. 우리는 한계에 부딪힐 거야."

인류가 심판의 날을 맞이하고 3천년에 걸친 형벌의 시기를 거친 머나먼 미래. 인간은 탐욕과 불신과 혐오가 모두 언어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기고 언어를 금지한다.

사람들은 언어를 대신해 머릿속에 떠올린 말인 '의음'(意音)으로 서로 소통한다. 언어에 정복되지 않기 위해 의음으로 의사 표시를 할 때는 반드시 입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를 내야 한다는 규칙도 있다.

이 같은 미래 사회의 일원인 '초우'는 호숫가에서 홀로 울고 있는 아기를 발견하고, '모우'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마을로 데려온다.

그러나 모우는 '의음'이 아니라 말의 소리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고, 규칙을 어기며 입으로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낸다. 결국 모우는 언어에 호기심을 보인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할 위기에 놓인다.

2019년 '천개의 파랑'으로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을 받은 과학소설(SF) 작가 천선란의 신작 단편집 '모우어' 표제작 이야기다.

언어를 금기시한 것과 더불어 미래 인류에게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수명이 훨씬 길어졌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녀를 낳지 않고도 개체 수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수백 년 동안 늙지 않고 살게 된다.

작가는 미래 인류의 수명이 늘어난 이유를 "그 과정에는 인류의 생명공학이 이바지했을 터인데, 그것들과 관련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았다"고 짧게 언급한다.

그러나 종반부에 이르러 언어를 포기한 것과 인간의 수명이 서로 연관돼 있음이 드러난다. 유일하게 언어를 쓰기 시작한 모우에게 다른 사람들과 달리 노화가 시작되면서다.

모우는 초우에게 의음을 쓰지 않고 목소리를 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포기한 언어와 그에 딸린 불완전성이 곧 잃어버린 인간성이라는 듯이.

"언어를 알게 되면서 엄마(초우)도 나와 같은 시간을 살게 되겠지. 느려지고, 멀어지고, 작아지고, 힘겨워지겠지. 이건 저주야. 맞아, 저주가 맞아. 기껏 자연이 인간을 다시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저주의 주문이야.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말을 하더라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영원히 말의 미로 속을 떠돌다 고립되고 외로워지는 인간이 되겠지. 하지만 나는 엄마가 그러길 바라."

소설가 천선란 소설가 [연합뉴스 자료사진]

신작 소설집에는 표제작과 '얼지 않는 호수' 등 미발표작 2편을 비롯해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모두 2020∼2024년에 집필됐다.

인류가 멸망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은 현생 인류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 인한 허전한 감각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게 한다.

'얼지 않는 호수'는 세계가 온통 꽁꽁 얼어붙어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진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진 인간들은 굶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먹으며 연명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그녀도 자신의 심장을 꺼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던 아이의 귓불을 씹은 적 있었다. 그녀가 씹을 수 있는 게 고작 귓불 하나였다. 손은 너무 많이 맞잡았으며, 등과 어깨에는 숱하게 입을 맞췄고, 발가락은 그 사이사이를 씻겨주었던 기억 때문에."

주인공인 '그녀'는 그리운 사람을 찾아 헤매던 끝에 모든 것을 체념하고 버려진 건물에 혼자 정착해 살아간다. 그렇게 33년을 보낸 그녀 앞에 죽은 친구의 심장을 들고 여행하는 소년 '야자나무'가 나타난다.

멸망한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그녀와 달리 야자나무는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는 야자나무의 이야기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야자나무에게 이야기의 힘을 전해준 사람이 바로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다가 포기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야자나무가 모든 것이 얼어붙은 행성에서 얼지 않는 호수를 찾아 여행을 떠나듯 그녀 역시 그리운 사람을 찾아 33년 만에 다시 길을 떠난다. 소용없다고 느껴 포기했던 인간의 온정과 희망이 그녀에게 돌아온 것이다.

이 밖에 앤솔러지와 문예지 등에 공개됐던 '너머의 아이들', '뼈의 기록', '서프비트', '사과가 말했어', '입술과 이름의 낙차', '쿠쉬룩'이 함께 수록됐다.

'서프비트'는 초능력을 가진 10대들의 정체성 탐구와 성장 과정을 다루고, '뼈의 기록'은 장의사 안드로이드와 병원 미화원의 우정을 그린다. '너머의 아이들'은 외계 존재를 진압하기 위해 선별된 어린아이들이 겪는 아픔을 다룬다.

천선란의 작품은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을 다루지 않는다. 각자의 세계에서 위태롭고 외로운 처지에 놓인 이들의 성장을 다룬다.

"지구를 여행하며 경계에 선 사람들을 만났다. 정체성, 가치관, 국경, 그리고 삶과 죽음. (중략) 이 소설은 그들에게 길잡이가 될 수 없다. 그러길 바라지만, 비통하게. 그렇지만 홀로 버텨야 하는 그 경계에서 조금은 덜 외롭게 할 수 있지 않을까."('작가의 말'에서)

jae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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