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성폭행한 남친이 변사체로…“내가 용의자라니, 습지 출신이라고 차별하나”[씨네프레소]
[씨네프레소-138]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
그는 습지 소녀라고 불렸다. ‘눅눅한’ 별명으로 불리게 된 건 누구도 소녀의 본명을 궁금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습지 근처에서 홀로 살아가는 그에게 호기심을 가졌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관심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늪을 경이로워하면서도 발목이 빠질까 봐 접근하지 않듯 멀리서 그를 보며 숙덕거릴 뿐이었다.
그러나 부친의 폭력성은 가족을 뿔뿔이 흩어버렸고, 혼자 남은 소녀는 숲을 부모와 자매, 선생으로 삼아 살아갔다.
땅에서 양분을 공급받아 자라나는 나무처럼 카야는 늪의 가르침을 몸으로 받아들이며 성장했다. 습지 소녀라는 별명은 그에게 멸칭일 수 없었던 셈이다.
자신을 키운 늪의 모든 것을 책에 실었다. 당장 안목 좋은 출판사에서 러브콜이 쏟아졌다.
그건 명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가 만들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석학들이 늪을 공부했다면 소녀는 그저 늪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2022)은 이처럼 출판계에서 촉망받던 여성이 살인범으로 지목받게 된 사연을 담아냈다.
카야에게 글을 가르쳐준 테이트는 대학교에 진학한 뒤 돌변했다. 습지에서 만나기로 한 날에 돌아오지 않았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소녀와 늪에 남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카야가 가족에게 버려지며 받은 상처를 다 아는 남자였다. 그런 사람에게 다시 버림받은 상처는 쓰라렸다.
카야는 처음엔 체이스의 무례함에 놀랐지만 곧 사랑에 빠졌다. 자신에게는 무례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테이트는 떠났지만 체이스는 자기 곁을 지켰다는 게 크게 다가왔다.
질 나쁜 남자였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카야의 뒷얘기를 하고 다녔다.
“습지 소녀가 잠자리에서 짐승 같이 달려드냐”고 본인 친구가 질문하자 혼내주긴커녕 “살쾡이 같다”고 답했다.
결정적으로 체이스는 약혼한 여자가 있었다. 카야와 만난 건 ‘즐기려는 목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체이스는 늪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세상은 카야가 바람둥이 체이스에게 배신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는 것을 살인 동기로 해석했다. 카야가 그에게 “죽여버린다”고 말한 것 또한 살인범이란 증거로 수집됐다.
습지 소녀의 눅눅함을 늘 께름칙하다고 여겼던 마을의 모든 사람이 카야를 범죄자로 몰아갔다.
카야를 돕는 것은 그를 오랫동안 지켜봤던 식료품점 주인장 부부와 마을의 변호사, 그리고 옛 남자친구 테이트뿐이었다.
누구나 분노의 표현으로 한 번쯤 써봤을 만한 “죽여버린다”라는 말이 ‘살인 증거’로 채택되는 이 억울함을 당신은 감당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그 말이 겨눈 건 죽어 마땅한 강간 미수범이었는데 말이다.
배심원단은 소녀의 결백을 인정하고, 카야가 작가로서 삶을 살 수 있게 허용한다. 날개를 단 카야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가 되고, 자기 누명을 벗겨준 테이트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먼 훗날 늙은 카야는 자기 엄마와도 같았던 습지에서 영면에 들고, 테이트는 수십 년 전 아내가 억울한 옥살이를 피해서 두 사람의 동화 같은 인생이 만들어졌음에 감사한다.
그러나 유품을 정리하던 도중 아내가 깊이 숨겨둔 비밀을 발견하는데, 바로 카야는 진범이었다는 것이다.
카야가 체이스를 살해하기 전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폭력에 노출된 카야는 체이스에게서 달아날 방법을 궁리한다.
신고하는 게 어떻겠냐는 질문에 카야는 아무도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다. “보안관 사무실에 끌고 가 사람들 앞에서 말하게 하고 싸게 굴었다며 제 탓을 하겠죠.”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카야는 체이스를 죽였다. 다시 말해, 카야가 사적 제재에 나서게 된 건 공권력을 불신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론을 불신한 이유도 큰 것이다.
그러나 카야는 말하는 듯하다. 법의 형평성을 논하기 전에 애초 세상이 자기 편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학대받는 사람이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하게 되는 데는 무능한 공권력만큼이나 차별적인 대중의 시선이 큰 몫을 차지한다고 말이다.
대중이 카야와 피해자들의 사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건 가해자가 처벌받은 다음에서다. 대중은 피해자를 편 드는 것에 아무런 부담이 없어진 다음에야 공권력의 무능함을 탓한다. 그러나 영화가 얘기하는 건 공권력만큼이나 대중의 책임도 크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불신한 대상은 다름 아닌 당신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카야의 “자연에 선과 악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일 뿐”이라는 대사가 그렇다.
카야는 체이스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보게 만드는 대사다. 동물을 평생 관찰해온 카야의 시선에 체이스는 그저 육식동물이었을 뿐이다. 육식동물이 약자를 찾아다니듯 그 또한 본능에 따라 움직였던 것이다.
아마도 카야는 체이스에게 동조하는 대중 또한 별로 원망하지 않았을 듯하다. 그들 또한 강한 동물의 눈치를 보는 다른 짐승처럼 여론에 적당히 숨었을 뿐이다.그게 생존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 짐승처럼 움직이기에 카야 또한 약한 동물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자기 목숨을 지켰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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