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성폭행한 남친이 변사체로…“내가 용의자라니, 습지 출신이라고 차별하나”[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4. 11. 10.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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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프레소-138]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는 습지 소녀라고 불렸다. ‘눅눅한’ 별명으로 불리게 된 건 누구도 소녀의 본명을 궁금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습지 근처에서 홀로 살아가는 그에게 호기심을 가졌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관심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늪을 경이로워하면서도 발목이 빠질까 봐 접근하지 않듯 멀리서 그를 보며 숙덕거릴 뿐이었다.

소녀는 습지에서 가족 없이 홀로 살아갔다. 사람들은 신발도 없이 돌아다니는 소녀를 신기하게 여겼지만 다가서진 않았다. [소니 픽쳐스 코리아]
물론 그의 인생에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엄마와 동기들은 소녀를 카야라고 부르며 다정히 보듬었다.

그러나 부친의 폭력성은 가족을 뿔뿔이 흩어버렸고, 혼자 남은 소녀는 숲을 부모와 자매, 선생으로 삼아 살아갔다.

땅에서 양분을 공급받아 자라나는 나무처럼 카야는 늪의 가르침을 몸으로 받아들이며 성장했다. 습지 소녀라는 별명은 그에게 멸칭일 수 없었던 셈이다.

가족이 떠난 후에도 소녀 인생엔 이따금 따뜻한 사람들이 등장했다.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부부가 그렇다. 두 사람은 카야를 조카처럼 돌봤다. [소니 픽쳐스 코리아]
피나는 노력을 통해 글을 익혔다. 소녀는 늪의 생물들을 그림과 글로 담아냈다.

자신을 키운 늪의 모든 것을 책에 실었다. 당장 안목 좋은 출판사에서 러브콜이 쏟아졌다.

그건 명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가 만들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석학들이 늪을 공부했다면 소녀는 그저 늪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2022)은 이처럼 출판계에서 촉망받던 여성이 살인범으로 지목받게 된 사연을 담아냈다.

카야는 자신을 키워낸 늪을 책에 담아냈다. [소니 픽쳐스 코리아]
사랑꾼 남자친구의 뒷담화…“잠자리에서 살쾡이 같아”
사연은 이렇다. 카야의 인생에도 스쳐 지나간 남자들이 있었다.

카야에게 글을 가르쳐준 테이트는 대학교에 진학한 뒤 돌변했다. 습지에서 만나기로 한 날에 돌아오지 않았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소녀와 늪에 남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카야가 가족에게 버려지며 받은 상처를 다 아는 남자였다. 그런 사람에게 다시 버림받은 상처는 쓰라렸다.

카야에게 글을 가르쳐준 첫 남자친구 테이트. 첫사랑이었던 테이트는 대학교에 진학한 뒤 변했다. 카야를 만나러 오기로 한 날 나타나지 않았다. [소니 픽쳐스 코리아]
두 번째 남자친구 체이스는 모범생 같았던 테이트와 달랐다. 세상에서 흔히 ‘나쁜 남자’라고 부르는, 까칠한 매력을 지닌 남자였다.

카야는 처음엔 체이스의 무례함에 놀랐지만 곧 사랑에 빠졌다. 자신에게는 무례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테이트는 떠났지만 체이스는 자기 곁을 지켰다는 게 크게 다가왔다.

‘나쁜 남자’ 같은 매력을 지닌 남자 체이스. 카야는 그에게 천천히 마음을 내준다. [소니 픽쳐스 코리아]
알고 보니 체이스는 진짜 나쁜 남자였다.

질 나쁜 남자였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카야의 뒷얘기를 하고 다녔다.

“습지 소녀가 잠자리에서 짐승 같이 달려드냐”고 본인 친구가 질문하자 혼내주긴커녕 “살쾡이 같다”고 답했다.

결정적으로 체이스는 약혼한 여자가 있었다. 카야와 만난 건 ‘즐기려는 목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카야는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달아났다. [소니 픽쳐스 코리아]
모든 사연을 알게 된 카야가 달아나려 하자 체이스는 강제로 성관계를 맺으려 했다. 카야는 체이스를 돌로 내리쳐 달아나는 데 성공했고 “한 번만 더 귀찮게 하면 죽여버린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체이스는 늪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세상은 카야가 바람둥이 체이스에게 배신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는 것을 살인 동기로 해석했다. 카야가 그에게 “죽여버린다”고 말한 것 또한 살인범이란 증거로 수집됐다.

습지 소녀의 눅눅함을 늘 께름칙하다고 여겼던 마을의 모든 사람이 카야를 범죄자로 몰아갔다.

카야를 돕는 것은 그를 오랫동안 지켜봤던 식료품점 주인장 부부와 마을의 변호사, 그리고 옛 남자친구 테이트뿐이었다.

카야를 돕는 마을의 변호사 [소니 픽쳐스 코리아]
(*이하의 단락에는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됨. 원치 않으면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세요.)
영화는 관객이 카야에게 깊이 감정 이입하도록 유도한다. 평생을 세상의 멸시로 괴로워하던 여자가 처음으로 능력을 인정받았는데, 누명을 써서 살인범으로 오해받는 상황을 당신은 받아들일 수 있는가.

누구나 분노의 표현으로 한 번쯤 써봤을 만한 “죽여버린다”라는 말이 ‘살인 증거’로 채택되는 이 억울함을 당신은 감당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그 말이 겨눈 건 죽어 마땅한 강간 미수범이었는데 말이다.

“죽여버린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감옥에 가야 한다면 수용 공간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소니 픽쳐스 코리아]
관객은 이것이 말도 안 되는 마녀사냥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카야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이유로 세상의 괴롭힘을 당하는 건 공정하지 않음을 스크린 안의 법정으로 들어가서 외치고 싶어진다.

배심원단은 소녀의 결백을 인정하고, 카야가 작가로서 삶을 살 수 있게 허용한다. 날개를 단 카야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가 되고, 자기 누명을 벗겨준 테이트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먼 훗날 늙은 카야는 자기 엄마와도 같았던 습지에서 영면에 들고, 테이트는 수십 년 전 아내가 억울한 옥살이를 피해서 두 사람의 동화 같은 인생이 만들어졌음에 감사한다.

그러나 유품을 정리하던 도중 아내가 깊이 숨겨둔 비밀을 발견하는데, 바로 카야는 진범이었다는 것이다.

카야가 집 근처에서 낚시하고 있다. [소니 픽쳐스 코리아]
사적제재 콘텐츠가 고발하는 대상은…당신이다
이 작품은 물론 흔한 사적 제재 콘텐츠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카야가 왜 사적 제재에 나섰는지를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카야가 체이스를 살해하기 전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폭력에 노출된 카야는 체이스에게서 달아날 방법을 궁리한다.

신고하는 게 어떻겠냐는 질문에 카야는 아무도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다. “보안관 사무실에 끌고 가 사람들 앞에서 말하게 하고 싸게 굴었다며 제 탓을 하겠죠.”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카야는 체이스를 죽였다. 다시 말해, 카야가 사적 제재에 나서게 된 건 공권력을 불신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론을 불신한 이유도 큰 것이다.

시내에서 마주친 체이스는 카야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소니 픽쳐스 코리아[
이것은 한 사람이 사적 제재라는 제도 바깥의 해결책을 찾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평생 학대당하다가 스스로 가해자를 처벌한 후 형벌을 받게 된 폭력 피해자를 보고, 법의 형평성을 논한다.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자가 가해자를 처단할 수밖에 없었단 것이다.

그러나 카야는 말하는 듯하다. 법의 형평성을 논하기 전에 애초 세상이 자기 편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학대받는 사람이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하게 되는 데는 무능한 공권력만큼이나 차별적인 대중의 시선이 큰 몫을 차지한다고 말이다.

햇빛은 습지 소녀도 차별 없이 감쌌다. [소니 픽쳐스 코리아]
사실 카야가 학대당하고 있었단 것은 누구든 조금만 관심을 가졌다면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카야를 ‘습지 소녀’로 부르며 부러 시선 밖으로 내보냈다. 바꿔 말하자면,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은 피해자를 ‘어딘가 음침한 사람’ ‘아웃사이더’로 지칭하며 일부러 시야 바깥에 뒀다.

대중이 카야와 피해자들의 사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건 가해자가 처벌받은 다음에서다. 대중은 피해자를 편 드는 것에 아무런 부담이 없어진 다음에야 공권력의 무능함을 탓한다. 그러나 영화가 얘기하는 건 공권력만큼이나 대중의 책임도 크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불신한 대상은 다름 아닌 당신이라는 것이다.

동물의 법칙이 통용되는 곳에선 사적제재도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동물학자 델리아 오웬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는다. 작가가 오랫동안 동물을 관찰하며 느낀 통찰이 작품에도 담겼다.

이를테면 카야의 “자연에 선과 악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일 뿐”이라는 대사가 그렇다.

카야는 체이스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보게 만드는 대사다. 동물을 평생 관찰해온 카야의 시선에 체이스는 그저 육식동물이었을 뿐이다. 육식동물이 약자를 찾아다니듯 그 또한 본능에 따라 움직였던 것이다.

아마도 카야는 체이스에게 동조하는 대중 또한 별로 원망하지 않았을 듯하다. 그들 또한 강한 동물의 눈치를 보는 다른 짐승처럼 여론에 적당히 숨었을 뿐이다.그게 생존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 짐승처럼 움직이기에 카야 또한 약한 동물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자기 목숨을 지켰을 뿐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포스터 [소니 픽쳐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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