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와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묵묵히’ 코노수르 오씨오
와인 소비자 가운데 상당수가 칠레산(産) 와인을 ‘가격 대비 만족도가 좋은 와인’이라고 여긴다.
품질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유럽 와인에 조금 못 미치지만, 저렴한 가격에 적당히 즐길 수 있는 와인이라는 뜻이다. 칠레에서 와인 업계가 처음 태동한 시기는 19세기 후반이다. 130년이 지나도록 이런 인식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하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 들여온 와인을 국가별로 나눠보면 칠레산이 가장 많았다. 칠레산 와인 시장 점유율은 20.9%로 프랑스(20.6%), 이탈리아(16.8%)에 앞선 1위다.
그러나 금액으로 보면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에 이은 4위로 순위가 떨어진다. 칠레산이 전체 와인 수입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8% 정도다. 채 10%에 못 미친다. 시장 점유율은 20%가 넘는데, 금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1%에 그친다.
점유율이 비슷한 프랑스는 금액 비중이 42%에 달한다. 칠레보다 4배 가까이 비중이 높다. 그만큼 국내에서 칠레산 와인은 저렴한 와인 위주로 팔린다.
물론 칠레산 와인이라고 마냥 가격 대비 만족도를 강조하진 않는다. 저명한 와인 평론가들은 종종 산지와 생산자 등 와인에 대한 정보를 가리고 순수하게 와인 맛과 향, 질감으로만 평가하는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이라는 시음회를 연다.
세계적인 주류 시음회나 시상식에서는 100점 만점을 기준으로 95점을 넘기면 가장 높은 등급 상을 수여한다. 2010년 중반 이후 프리미엄을 표방하는 일부 칠레 와인은 이런 유명 평론가들 심사에서 연이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좋은 와인은 좋은 포도에서 나온다. 좋은 포도는 좋은 땅에서 자란다. 결국 와인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땅과 기후다. 칠레 주요 와인 산지는 일조량이 많고, 비가 적게 내린다. 이런 날씨는 짙은 향과 강렬한 농축미를 가진 포도를 재배하기 좋다.
칠레 양조가들은 “포도 관리와 생산량 차원에서 놓고 보면, 프랑스 보르도 지역 같은 유럽 본고장 와이너리에 비해 크게 뒤처지는 게 없다”고 항변한다.
이들은 칠레 와인이 푸대접을 받는 상황에 분노했다. 칠레 거대 와이너리들은 2000년대 이후 프리미엄 칠레 와인 마케팅을 강화했다.
2004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베를린 테이스팅’이 대표적이다. 이 자리에서 칠레 와인 ‘비녜도 채드윅’은 샤토 마고, 샤토 페트뤼스, 샤토 라피트 로칠드 같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세계 최고 와인을 꺾고 1등을 차지했다.
와인 업계는 베를린 테이스팅을 최근 100년 사이 현대 와인 역사에 획을 긋는 놀라운 사건이라 회자한다. 베를린 테이스팅은 칠레산 와인 역시 최고급 와인과 대적할 만하다는 신호탄을 쐈다.
자금이 넉넉하지 않은 소규모 와이너리들은 노동력을 집약했다. 밭뙤기 별로 수령이 다른 포도나무에서 나온 열매를 섞어가면서 칠레 와인과 토양이 가진 장·단점을 장기간 연구했다. ‘칠레와인이 여러분 생각보다 괜찮다’는 가설(假說)을 정설(定說)로 증명하기 위한 도전이었다.
코노 수르(Cono Sur)라는 와이너리는 칠레에서 키우지 않던 고급 포도 품종 ‘피노누아’에 주목했다. 피노누아는 껍질이 얇고, 빨리 자란다. 다만 병충해에 약하고, 더운 지역에서는 과실이 지나치게 익기 쉽다. 이렇게 과숙(過熟)한 피노누아는 정교함과 고혹적인 매력이 사라지기 일쑤다.
그러나 능숙한 생산자가 만들면 색상이 옅고, 섬세한 와인이 나온다. 와인 전문가들은 피노누아로 만든 고급 와인은 ‘고고한 귀족적 풍모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진하고 직선적인 느낌보다, 부드럽고 하늘하늘하며 우아한 느낌이 잘 살아난다는 뜻이다.
자연히 인기도 높고 가격도 비싸다. 영국 프리미엄 와인 거래소 ‘리벡스(LIV-EX)’가 최근 국가별 검색 횟수를 바탕으로 발표한 2022년 우리나라 인기 와인 순위를 보면 상위 10위 가운데 1·2·4·5·6·10위 6개 와인이 피노누아로 만든 와인이었다. 순위 안에 든 6개 와인은 최소 500만원에서 최고 4000만원대에 팔린다.
1999년, 우리는 칠레 최초로 프리미엄 피노누아를 생산했다.
그리고 그 와인을 최초로 수출했다.
마틴 프리외르 코노 수르 양조 담당가
코노수르가 던진 승부수는 성공했다. 코노수르는 1993년 설립한 비교적 역사가 짧은 와이너리다. 하지만 30년 만에 전 세계 80개국에 와인을 수출하는 거대 와이너리로 자랐다. 2015년에는 칠레 와이너리 가운데 세번째로 많은 와인을 해외로 수출했다.
지금도 코노수르는 남미 대륙 전체에서 가장 많은 피노누아 와인을 만든다. 가격대는 10달러(약 1만4000원) 이하부터 100달러(약 14만원)까지 다양하다.
2007년에는 와인 제조 과정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탄소중립(Carbon Neutral) 인증을 받았다. 코노수르 포도밭에서는 모든 직원이 자전거로 이동한다. 이산화탄소를 뿜는 자동차는 와이너리 내에서 이용하지 않는다. 와인 병도 가벼운 무게 병을 쓴다. 이 곳에서는 차가 아닌 수레로 사람이 와인을 옮기고, 거위가 밭 사이사이에서 땅 속 벌레를 잡아먹는다.
오씨오(Ocio)는 이 와이너리가 피노누아 품종 포도로 만드는 가장 높은 등급 와인이다. 오씨오는 여행자, 혹은 휴가라는 뜻이다. 2013년산 이 와인은 와인 대통령으로 불리는 로버트 파커에게 96점을 받았다.
최근에는 2024 대한민국 주류대상 신대륙 레드와인 10만원 이상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수입사는 신세계L&B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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