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영광 언제까지”...이 회사가 벌인 쩐의 전쟁, 포스트 재벌 체제 신호탄 [나기자의 데이터로 세상읽기]
고려아연과 치열한 쩐의 전쟁
상속세 부담에 지배구조 취약
적대적 M&A 앞으로 더 늘듯
50% 달하는 상속·배당 세율
절반 낮추면 재벌가문에 기회
주가·주주환원에 긍정적 영향
투자자 외면받는 기업엔 채찍
적극적인 상장폐지 정책 필요
재계에선 국내 기업사(史)의 분기점이 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지난 9월부터 국내 대표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가 국내 재계 순위 32위인 영풍그룹의 핵심 계열사 고려아연 경영권을 얻고자 공개매수에 나섰습니다. 국내 사모펀드가 시가총액 10조원 이상 대형 기업에 대해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고려아연이 ‘3세 경영 체제’가 되면서 현 최윤범 회장 측의 지분이 15%대까지 낮아진 상황이었습니다. 40조원을 굴리는 동북아 최대 사모펀드인 MBK는 이 지점을 공격합니다. 고려아연의 기존 대주주였던 영풍과 손잡고 공개매수를 통해 지분을 확보한 뒤 고려아연 1대 주주로 올라서려고 한 것이죠.
이 같은 MBK 시도에 대해 당초 반발이 거셌습니다. 기존 재벌체제가 안정적이고 중장기적인 경영을 할 수 있는데, 사모펀드가 경영권을 획득하면 ‘단기 차익’에만 골몰할 수 있다는 비판이 대표적입니다. 당장 정치권과 고려아연 임직원들이 MBK 인수에 반대하고 나섰었죠. 울산 시민의 고려아연 주식 모금운동도 벌어졌죠.
다만 분명한 것은 기존 ‘재벌체제’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1945년 광복 이후 국내 경제체제는 재벌 가문들이 주요 사업 영역을 키워오며 발전해왔습니다. 삼성(이재용), SK(최태원), 현대차(정의선), LG(구광모) 등 4대 그룹은 여전히 재벌 가문 2~4세들이 최고경영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죠. 4대 그룹 외에도 대다수 그룹에서 재벌 가문들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죠.
그동안 미국·일본 등 선진 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결국엔 ‘가문 경영→펀드 및 자산운용사가 선임한 전문경영인 체제’로 흐름이 바뀌게 됩니다. 100년 기업인 미국 GE, 일본 히타치 등을 해당 국가 금융기관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죠. 재벌 가문은 대가 이어질수록 상속세 부담으로 인해 더 이상 지배력을 유지하기 힘들어집니다. 이 때문에 이번 MBK의 고려아연에 대한 적대적 M&A 시도는 “더 이상 특정 가문 경영이 영속적이진 않을 것”이라는 사회적 메시지를 내포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포스트 재벌체제를 제대로 구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단순히 특정 가문의 지배력을 낮추고, 금융기관이 이를 대체해 소유하는 구조로 향하는 것만이 바람직할까요?
투자은행(IB)업계 한 고위 관계자는 “일본 재벌기업 구조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 군정에 의해 진행된 재벌 해체 과정서 특정 가문이 배제되고 금융기관 공동소유로 바뀐 바 있다”며 “다만 이 때문에 특정 오너가 리더십을 가지고 빠른 의사결정에 실패한다는 비판도 많이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금융기관 소유 기반 전문경영인 체제가 ‘무조건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죠.
어느 체제가 더 우월하다고 판단하긴 힘드니, ‘능력 위주’로 경영하게끔 제도를 정비하는 게 합리적이란 의미입니다.
상속세율을 25%로 줄이고, 배당소득세를 전면 분리과세(15.4%)로 전환한다면? 상속세 부담이 지금의 절반이 되는 만큼 좋고, 배당소득세율이 상속세에 비해서 낮기 때문에 재벌가문 입장에선 배당을 늘리며 주주환원에 적극 나서게 됩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코스피 상장사의 평균 시가배당률은 2.72%입니다. 해당 시가배당률을 높이면서 주가상승과 주주환원 모두 같이 갈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한 외국계 IB 관계자는 “결국 주가란 것이 수급과 실적 2개가 뒷받침돼야 장기적으로 우상향할 수 있는데, 만일 세제개편으로 주주환원율이 높아지면 투자자들이 유입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수급 측면이 개선될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재벌 기업 중에서도 실적을 낼 수 있는 기업은 주가가 더 오를 것이고 실적을 내지 못하는 기업은 그렇지 못하는 양극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즉, 현재 재벌가문이 주요 대기업을 지배하고 있으니, 상속세·배당소득세를 깎아서 이들에게 ‘경영 능력’을 펼치면서 주가를 올릴 기회를 주자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실적을 개선하면서 배당을 더 늘려줄 수 있는 재벌 대기업은 투자자가 더 몰리면서 수급과 실적 모두가 개선돼 주가가 오를 것입니다. 반면 그렇지 못한 재벌 대기업은 투자자들에게 외면받으며 주가가 곤두박질칠 것이고 재벌가문도 경영 능력을 입증하지 못한 꼴이 됩니다. 후자는 창업주 가문에 비해 자금력이 풍부한 사모펀드로부터 ‘적대적 M&A’에 노출돼도 할 말이 없게 됩니다.
일본이 이 부분에선 우리를 앞서가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2026년까지 일정 수준 이상 유통물량을 확보하지 못하는 기업, 즉 투자자의 관심을 못 받는 기업에 대해 프라임 시장(우리로 치면 코스피)서 퇴출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죠. 강제 조항은 아니지만 기업들에는 상당한 압박을 줍니다.
투자자의 관심을 못 받는 기업, 즉 주주환원에 미흡하거나 혹은 실적 개선이 이뤄지지 못해 주가가 우상향하지 못한 기업은 시장에서 퇴출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상장폐지되는 기업 중에 ‘그래도 소생 가능한’ 기업들의 경우는, 금융자본 최선봉에 있는 사모펀드가 이를 인수해 ‘밸류업’을 시키는 구조입니다.
2023년 12월, 일본 전자산업의 상징인 도시바가 상장폐지됐습니다. 일본 사모펀드 JIP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이 도시바 주식 전량을 2조엔(약 18조원)에 사들이고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상장폐지시킨 것이죠.
도시바는 그동안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로부터 항시적으로 ‘주주환원’ 압박을 받아왔는데요. JIP 주도로 SI로 참여한 주부전력·오릭스 등이 합심해서 2조엔을 만들고, 과감하게 상장폐지를 시켰습니다. 이후 시마다 다로 도시바 CEO는 유임됐고, 총 7명의 이사진 중 JIP가 4명, SI로 참여한 주부전력·오릭스 쪽에서 각각 1명씩 이사진을 파견했죠. 새로운 지배체제가 만들어진 겁니다.
주가가 오르지 못했던 기업들을 상장폐지하게 되면, ‘5~10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경영을 할 수 있다는 장점(단기 이익에만 매물되지 않을 수 있음)’이 있습니다. 아울러 ‘전체 주가지수’에 악영향을 끼친 좀비기업이 증시에서 퇴출당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또 다른 외국계 IB 고위 관계자는 “일본의 경우는 전체 주식 수 3분의 2만 모으면 상장폐지가 가능하도록 하는 등 적극적인 상장폐지 정책을 통해 증시 밸류업(투자자 우호 환경 조성)에 나서고 있다”며 “우리도 재벌 3세로 이어지면서 투자자 관심을 끌지 못하는 많은 코스피·코스닥 상장 기업이 있는데 이에 대한 적극적인 상장폐지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정부도 이에 공감하고 나섰습니다.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지난 4월 서울 중구 매경미디어센터에서 열린 ‘매경 이코노미스트클럽’ 강연에서 “지난해 국내 증시에 신규 상장된 기업은 119개, 상장폐지된 회사는 27개로 진입한 회사 대비 퇴출된 회사 비율이 22.7%에 그쳤다”며 “이는 미국 146.2%, 일본 72.7%에 비해 매우 낮다. 좀비기업이 상장폐지되지 않고 남아 시장 신뢰를 해치는 것이 한국 증시의 디스카운트 요인”이라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재벌가문 중에서 경영을 잘하는 곳은 그대로 경영권이 유지될 수 있을 테고(주주환원이 곧 대주주인 재벌가문에도 이득), 그렇지 못하고 투자자의 외면을 받는 곳은 더 자금이 있는 사모펀드에 인수당하거나 혹은 상장폐지될 겁니다. 즉, 전체적인 흐름에서 보면 ‘가문 경영의 비중이 줄고, 펀드·자산운용사 선임 전문경영인 체제가 늘어나는’ 형식이 될 겁니다. 미국 빅테크들을 주요 미국 자산운용사(블랙록, 뱅가드, 스테이트스트리트, 피델리티)가 과점 소유하고 있고, 해당 자산운용사들은 미국인의 퇴직연금(401k) 등을 통해 빅테크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죠.
결국 한국 증시 및 기업 밸류업의 종착지는 주요 기업 과점 주주가 되는 ‘자산운용사의 역량 증진’입니다. 자산운용사들이 ‘한탕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될성부를 기업에 투자하면서 적극적으로 될성부를 기업을 발굴하고 이에 대한 민간 투자를 유치해야 하는 것이죠. 국내 한 행동주의펀드 대표는 “자산운용사의 자산운용 규모가 커지면 그만큼 투자자 자금이 계속 들어오면서 계속 투자재원이 마련되고, 운용사도 끊임없는 환매를 통해 해당 기업 밸류업을 뒷받침할 수 있다”며 “실적개선 기업에 자금이 계속 몰리면서 그 기업이 더욱 커지는 선순환을 마련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이를 위해선 국내 자산운용 업계의 운용능력을 제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국내 한 기관투자자 관계자는 “국내 자산운용업계의 과거 투자방식을 보면 플랫폼이 유망하면 플랫폼 투자를, 해외 부동산이 유망하면 해당 분야에 투자하는 등 ‘트렌드를 좇는 경향’이 크다”며 “한쪽으로 투자가 쏠리다가 결국엔 손해가 막심한 경우가 많은데, 트렌드를 좇기보다는 자산운용업 본업의 실력을 배양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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