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트럼프 전략’의 완패

정인환 기자 2024. 11. 9.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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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미국 대선 트럼프 압승…20년만에 총득표수도 과반 넘어 바이든과 차별화 실패한 해리스, 히스패닉·진보 유권자 지지 ‘이탈’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24년 10월29일 격전지인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선거유세 도중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등장하는 영상을 지켜보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4년 11월5일(현지시각)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압승을 거뒀다. 확보한 선거인단 규모뿐 아니라 총득표수에서도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460여만 표 이상 크게 앞섰다. 상원도 공화당이 탈환했다. 하원도 과반 의석을 넘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사위가 깊은 어둠에 휩싸인다. 미국이, 세계가 움츠리고 있다.

‘빨간 신기루’라고 한다. 미국에서 선거 때마다 개표 초반 공화당 후보가 약진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선거구별로 개표를 진행하고, 개표가 끝난 지역부터 먼저 결과를 발표한다. 인구가 적은 외곽·농촌 지역은 상대적으로 공화당 지지세가 강하다. 개표 시작 직후엔 공화당 후보 지지표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란 뜻이다.

‘빨간 신기루’만 있고 ‘파란 변화’는 없었다

‘파란 변화’도 있다. 개표가 중반을 넘기면서 민주당 후보가 전세를 뒤집는 현상이 종종 벌어진다. 민주당 지지층은 주로 인구가 많은 대도시에 밀집해 있다. 개표를 마치는 데 상대적으로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다. 대체로 민주당 성향 유권자가 선호하는 우편투표함까지 열리는 개표 막판이 되면 민주당 지지표가 쏟아지기 마련이다.

11월5일 밤 개표가 시작되자 ‘빨간 신기루’ 현상이 뚜렷했다. 하지만 개표가 중반을 넘어선 뒤에도 ‘파란 변화’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민주당 지지층은 막판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소셜미디어엔 “개표가 끝나봐야 안다”거나 “오늘 밤 최종 결과가 확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글이 넘쳐났다. 자정을 훌쩍 넘긴 11월6일 새벽 2시께 격전지(스윙스테이트)인 펜실베이니아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판세를 뒤집고 해리스 부통령을 앞서기 시작했다. ‘빨간 신기루’가 ‘빨간 변화’로 뒤바뀐 순간이다.

11월6일 새벽 2시30분께 트럼프 전 대통령이 선거본부가 있는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에서 ‘승리’를 선언했다. 격전지 개표 결과가 확정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펜실베이니아주 개표는 이미 ‘트럼프 승리’로 막을 내린 채였다. 그로부터 3시간 남짓 뒤, 에이피(AP) 통신을 비롯한 미국 주요 매체들이 일제히 ‘트럼프 당선 확정’ 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막판까지 피 말리는 접전 양상이었지만, 최종 선거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일방적 승부였다.

AP 등 미국 매체 보도를 종합하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29개 주에서 승리하며 주별로 할당된 대통령선거인단 절반(270명)을 훌쩍 넘어선 295명을 확보했다. 특히 승패를 가를 격전지로 꼽힌 7개 주 가운데 위스콘신·미시간·펜실베이니아·노스캐롤라이나·조지아 등 5개 주에서 승리를 확정 지었다. 11월6일 밤까지 개표가 진행 중인 네바다와 애리조나주에서도 각각 5%포인트가량 앞서고 있어, 격전지에서 모두 승리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해리스 부통령은 19개 주와 워싱턴디시에서만 트럼프 전 대통령을 앞서면서 선거인단 226명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2016년 대선 때 트럼프 전 대통령은 7대 격전지 가운데 네바다를 제외한 6개 주에서 승리했다. 2020년 대선 때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노스캐롤라이나를 제외한 6개 주에서 이기며 당선됐다.

2024년 11월6일 새벽 극우 성향의 폭스뉴스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이 확실하다는 보도를 내놓자, 미국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 컨벤션센터에 모인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20년 만에 공화당 대선 후보 과반 득표

전체 득표수와 득표율에서도 격차가 컸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 전역에서 약 7252만 표(득표율 50.9%)를 얻었다. 공화당 대선 후보가 과반 득표를 차지한 것은 2004년 이후 20년 만의 일이다. 해리스 부통령은 약 6783만 표(득표율 47.6%)를 얻는 데 그쳤다. 앞서 2016년 대선 때 트럼프 전 대통령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게 전국 득표수는 약 300만 표(득표율 격차 2.1%포인트) 뒤졌지만, 선거인단 304명을 차지하며 당선을 확정 지었다. 각 주에서 1표라도 더 얻은 후보가 해당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을 모두 차지하는 이른바 ‘승자독식’이란 미국의 독특한 선거제도 때문이다.

공화당은 의회 선거도 압도했다. 주별로 2명씩 모두 100명인 연방 상원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2년마다 3분의 1을 새로 선출한다. 이번 선거에선 34개 주에서 투표를 치렀는데, 오하이오·몬태나·웨스트버지니아 등 3개 주에서 기존 민주당 의석을 뒤집고 공화당 후보가 당선됐다. 이에 따라 선거 전 51석(무소속 2명 포함)을 장악했던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서 52석으로 의석을 늘린 공화당에 상원 다수당 지위를 내주게 됐다. 아직 개표가 끝나지 않은 펜실베이니아주 등 격전지에서 ‘트럼프 바람’이 거센 터라 공화당 의석은 더욱 늘어날 수 있다.

인구비례에 따라 지역별로 의석이 할당된 임기 2년의 연방 하원의원은 모두 435명이다. 2022년 중간선거 때 공화당은 222석을 얻어, 213석에 그친 민주당을 제치고 하원 다수당으로 복귀했다. 여전히 39개 지역구에서 개표가 진행 중인 11월6일 밤까지 공화당은 206석 당선을 확정 지으며, 과반 의석(218석)에 근접한 상태다. 반면 당선을 확정 지은 민주당 후보는 모두 190명에 그친다. 공화당이 백악관은 물론 상·하 양원까지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으로선 ‘꽃길’을 눈앞에 둔 셈이다. 애초 ‘오차범위 안 승부’로 예상됐던 선거 판세가 막판에 공화당 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운 이유는 뭘까?

상·하원 모두 ‘공화당’ 과반, 트럼프 ‘꽃길’

시엔엔(CNN) 방송 등 현지매체 보도를 종합하면, 이번 선거 역시 승부를 가른 결정적 변수는 경제였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0월19일 “미국 경제는 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고 보도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막을 내린 뒤 선진국 대부분이 긴 경기침체기로 접어들었지만, 미국 경제는 빠르게 활력을 되찾았다. 실제 2024년 9월 말 현재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2.8%를 기록한 반면, 유럽연합(EU)의 평균 성장률은 단 0.4%에 그쳤다. 미국 노동통계국(BLS)은 같은 기간 미국의 평균 실업률을 4.1%로 집계했다. 유럽연합의 평균 실업률은 5.9%였다. 성장세가 이어지면서 물가도 전년 대비 2.4%(유럽 1.7%) 높아졌지만, 성장률을 밑도는 터라 크게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고 바이든 행정부는 자신했다. 오판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24년 10월30일 격전지인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선거유세를 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여론조사 전문기관 퓨리서치센터가 10월10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남성 유권자층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51%)은 해리스 부통령(43%)을 8%포인트 앞섰다. 반면 여성 유권자층에선 해리스 부통령(52%)이 트럼프 전 대통령(43%)을 9%포인트 차로 눌렀다. 유권자의 성별에 따라 두 후보 간 지지율 격차가 17%포인트에 이른다는 뜻이다. 교육 수준에 따른 격차는 더 컸다. 고졸 이하 유권자층에선 트럼프 대통령(52%)이 해리스 부통령(42%)을 10%포인트 앞선 반면, 대졸 이상 유권자층에선 해리스 부통령(57%)이 트럼프 전 대통령(38%)을 19%포인트 차로 제쳤다. 유권자의 교육 수준에 따른 두 후보 간 격차는 29%포인트나 됐다.

두 후보 간 지지율 격차가 가장 크게 벌어진 유권자층은 고졸 이하 남성과 대졸 이상 여성이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전자에서 16%포인트 앞섰지만, 해리스 부통령은 후자에서 27%포인트 이겼다. 두 집단 간 지지율 격차는 무려 43%포인트였다. 뉴욕타임스가 10월30일 이번 선거의 승부를 가를 ‘단층선'으로 성별, 교육수준별 유권자 성향에 주목한 이유다.

신문은 “대졸 이상 여성 유권자층은 상대적으로 재정상태가 안정적이며, 임신중지권 등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다”며 “고졸 이하 남성 유권자는 일상에 영향을 끼치는 경제와 안전 등의 문제를 중시한다. 물가 인상의 직격탄 속에 이들 집단의 실업률까지 높아지면서 불안과 상실감 속에 불만이 크다”고 짚었다. 실제 노동통계국의 자료를 보면, 9월 말 현재 고졸 미만 인구층의 실업률은 6.8%를 기록했지만 대졸 이상자의 실업률은 2.5%에 그쳤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만한 간극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인 제이디 밴스 부통령 후보가 해리스 부통령 지지자를 겨냥해 “자식 없는 캣 레이디”란 비아냥을 퍼부은 것도 노림수가 있었던 게다.

승부 가른 결정적 변수는 ‘경제’

“바이든 행정부 들어 불법 이주민이 폭증했다”는 트럼프 진영의 반복된 주장은 사실 여부를 떠나 저소득층 유권자를 중심으로 반향이 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스라엘이 2개의 전선에서 벌이고 있는 중동전쟁은 “내 임기 중엔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치솟은 식료품값과 유류값에 부담을 느낀 유권자는 코로나19 대유행 이전까지 안정을 유지했던 트럼프 1기 때를 ‘좋았던 옛 시절’로 인식하고 있었다. 역시 사실 여부를 떠나 곱씹었어야 할 부분이었다. 11월5일 시엔엔의 출구조사 결과, 유권자의 31%가 최우선 관심사로 경제를 꼽았다. 또 51%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해리스 부통령보다 경제를 잘 챙길 것이라고 답했다.

해리스 부통령 캠프의 선거전략에 대한 비판은 크게 세 갈래다. 첫째, 트럼프 전 대통령 비판에만 치중해 정작 ‘대통령 해리스’가 왜 필요한지 설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7월21일 후보직을 승계한 직후부터 해리스 부통령은 ‘트럼프 심판’에만 집중했다. 지지율은 상승곡선을 그렸다. 9월10일 열린 대선 토론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였고, 출마 선언 석 달 만에 사상 최초로 10억달러를 넘는 정치자금도 모았다. 하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통령감이 아니란 점에 집중한 나머지 정작 자신이 왜 좋은 대통령감인지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공화당계 정치컨설턴트 프랭크 런츠는 11월5일 소셜미디어 엑스(X)에 올린 글에서 “해리스는 트럼프 공격에만 집중하느라 선거에서 졌다. 유권자는 이미 트럼프에 대해 잘 안다. 그들은 해리스가 집권 첫날, 첫 달, 첫해에 뭘 할 것인지 알고 싶어 했다. 해리스가 아닌 트럼프에게 모든 선거운동의 초점을 맞춘 게 패착”이라고 썼다.

2024년 11월6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모교인 워싱턴디시의 하워드대학에서 대선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을 하는 동안 지지자가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AP 연합뉴스

둘째, 지지율 하락세가 뚜렷한 바이든 대통령과 끝까지 차별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해리스 부통령은 10월8일 에이비시(ABC) 방송 인터뷰에서 “지난 4년간 바이든 대통령이 한 일 가운데 다르게 하고 싶은 일이 있느냐”는 질문에 “단 한 가지도 없다”고 답했다. 치명타였다. 이후 해리스 부통령은 폭스뉴스(10월16일)와 시엔엔(10월23일) 등에 거푸 출연해 “해리스 행정부는 바이든 행정부의 연장이 아니다”라고 강조했지만, 정작 뭐가 달라지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앞서 엔비시(NBC) 방송이 9월27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미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응답은 65%에 이르렀지만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응답은 28%에 그친 바 있다.

흑인·히스패닉 유권자도 결집 못 시켜

셋째, 공화당 내부 반트럼프 유권자층을 상대로 ‘외연 확장’에만 골몰한 나머지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의 결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지난 9월 일찌감치 해리스 부통령 지지를 선언한 리즈 체니 전 공화당 하원의원과 선거 막판 공동유세에 집중한 게 대표적이다. 반면 청년과 소수인종 등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진보적 유권자층이 요구한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휴전 해법 제시 요구엔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해 지지층 이탈을 자초했다. 한 표가 아쉬운 격전지에서 막판에 판세가 뒤집힌 주요 변수다. 시엔엔 출구조사 결과, 해리스 부통령은 흑인과 히스패닉 유권자층에서 2020년 바이든 대통령보다 각각 6%포인트와 12%포인트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18~29살 젊은 유권자와 여성 유권자층에서도 각각 10%포인트와 3%포인트 득표율이 떨어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들 유권자층에서 모두 반등세를 보였다.

임기 중 두 차례나 탄핵돼 쫓기듯 물러났다. 91개 혐의로 기소돼 법원에서 34개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다. 성폭행 의혹도 사실로 확인됐다. 선거운동 기간엔 두 차례나 암살 미수 사건을 겪었다. 그럼에도 화려하게 부활했다. 의회 권력까지 등에 업은 터다. 거칠 것 없는 ‘트럼프 시대’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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