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에서 너의 마음까지, 영화 《청설》
(시사저널=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나와는 다른 당신의 세계에 속하고 싶다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열망은 어떻게 우리의 일상을 넓혀놓는지. 청춘은 얼마나 분주하게 밝고 서글프게 예쁜 시절인지. 《청설》은 한국 영화가 잠시 잃어버렸던 감성을 2024년의 스크린에 다시 소환한다.
소통이 필요한 시대에 찾아온 특별한 언어
이 풋풋한 멜로를 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범죄와 사기에 연루되지 않은, 사회적 압박에 짓눌리지 않는 20대 본연의 이야기를 담은 한국 영화를 보는 게 얼마 만인가. 관객 마음 안에 인상적인 파동을 만드는 조용한 영화는 마치 2000년대 초중반까지 주를 이루던 한국 멜로의 산뜻한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느껴진다.
사랑은 내가 아닌 당신의 언어를 통해 우리의 세상을 넓히고 싶다는 바람이다. 《청설》은 그 본질을 꿰뚫는 이야기이기에 영원한 클래식이다. 2010년 개봉한 동명의 대만 영화가 지금까지 많은 이의 마음속에 손꼽히는 멜로로 자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주인공들이 '손으로 말한다'는 데 있다. 등장인물들은 수어를 사용한다. 티엔커(펑위옌)는 수영장에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가 양양(진의함)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러나 농인 수영선수인 언니 샤오펑(천옌시)을 돌보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양양에게 티엔커의 마음은 누릴 수 없는 사치다. 티엔커와 양양 사이에는 서로에게 손끝으로 전하는 말들이 분주하게 오가지만, 이 사랑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한국 리메이크로 재탄생한 《청설》은 원작 영화가 이미 잘 닦아놓은 루트 안에서 이탈 없는 완주를 안정적으로 보여준다. 2020년대 한국의 20대들로 배경을 옮긴 것을 제외하면 서사에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주인공 용준(홍경)은 대학을 졸업한 취업준비생이다. 부모님이 운영하는 도시락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갔다가 여름(노윤서)을 본 뒤 그의 열병 같은 첫사랑이 시작된다.
여름의 동생인 가을(김민주) 역시 용준의 용기를 응원한다. 문제는 여름의 상황과 마음이다. 용준에게 호감은 있지만, 가을을 돌보는 데 인생의 모든 목표점이 맞춰져 있는 여름은 연애의 시작을 주저하게 된다. 두 사람이 차츰 가까워지던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사고까지 벌어지면서 용준과 여름의 마음은 한층 더 어긋나 버린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인물들이 주고받는 수어는 핵심적인 장치다. 여름과 가을이 수어로 대화하는 것을 본 용준은, 미리 알고 있던 수어를 조금씩 시도해 여름에게 말을 걸며 가까워진다. 이 고요한 언어는 원작을 처음 만나던 때와는 조금 다르게 보이고 새롭게 들린다. 자막은 더는 장벽이 아니다. 여러 경로의 영상 콘텐츠들로 인해 이미 텍스트에 익숙해진 것이 새로운 관람 문화로 자리 잡은 때이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많은 관객이 자막에 익숙해진 상태로 영화를 접하게 될 가능성이 높을 텐데, 시대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이 같은 감상의 변화는 퍽 유의미하게 느껴진다. 시선이 엇갈려도 소통이 가능한 음성 언어와는 달리 서로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는 점에서도 수어는 한층 섬세한 언어처럼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 진정한 대화의 가치, 소통의 방식이 필요한 시대에 영화가 꼭 알맞게 다시 찾아온 인상이다.
아직은 하고 싶은 것도, 명확한 꿈도 없지만 사랑은 하고 싶은 마음. 더 정확하게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과 마음이 온통 그 사람을 향해 있어 그에게 나의 모든 시간을 쏟게 될 수밖에 없는 것. 어린 시절의 사랑이 더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은 상대를 향한 정성의 마음이 최대치로 발휘될 수 있는 인생 유일의 시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연애와 취업을 포함해 더 이상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N포 세대'가 된 청춘들은 무력하게만 비칠 대상이 아니다. 청춘은 가장 순수하게 사랑에 뛰어들 수 있는 시절이기도 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청설》은 오랜만에 일깨운다.
배우들의 얼굴과 감성에 집중하는 경험
동시에 아직 직업도, 인생의 방향도 잘 보이지 않기에 방황하고 흔들리는 것 역시 청춘에게 주어지는 과제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미 각자 책임지고 보살펴야 하는 것들이 산재하기에 자신의 마음 하나만 들여다보기에는 망설여진다. 사랑도, 인생을 둘러싼 고민도 가장 현실적인 20대들의 이야기. 《청설》이 마냥 말랑하고 예쁘기만 한 멜로가 아닌 이유다.
영화는 사랑을 향해 직진하는 용준의 서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걸어야 할 인생의 길을 찾아가는 여름의 성장 서사이기도 하다. 여름은 동생 가을의 꿈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인물이다. 좋은 언니이고 싶은 마음을 넘어 동생의 목표와 꿈을 자신의 인생과 동일시한다. 그건 여름에게 가족을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련의 시간을 통해 여름은 스스로를 돌보지 않은 채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동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진정한 사랑은 걱정되더라도 믿어주고 상대방이 손 내밀 때 도와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전적으로 돕는 것이 결코 나의 꿈이 될 수는 없음을 알아간다.
반짝이는 여름의 청량한 계절감 안에서 용준과 여름 그리고 가을은 각자의 방식으로 한 뼘 더 자란다. 손으로 말과 마음을 주고받는 이들의 세계는 고요하지만, 그만큼 깊고 성숙하게 넓어진다. 관객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인물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대신 그들의 손과 눈을 바라봐야 하고, 손으로 물을 밀어낼 때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같은 소리들에 집중해야 하는 영화의 특성 덕분이다. 사랑과 꿈은 들리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빽빽하게 세계를 이룬 소리들이 잠시 비어있는 곳에서 그것을 감지하는 데는, 별다른 언어의 통역이 필요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캐스팅의 승리로 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원작의 세계 안에 한국의 청춘 배우들이 들어가 자신들만의 인상적 얼굴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니, 좋은 이야기의 힘을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배우들이 지닌 좋은 감성을 찬찬한 호흡 안에서 유심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은 영화다.
생각해 보면 과거 멜로 영화를 통한 스타 탄생은 이런 방식으로 가능했다. 그들의 얼굴에 집중하면서, 감정을 따라가면서 각자 얼마나 좋은 감성과 재능을 가진 배우인지 감지하게 되는 몇 안 되는 장르 중 하나가 멜로이기 때문이다. 영화 《결백》과 《댓글부대》, 넷플릭스 오리지널 《D.P.》와 드라마 《악귀》 등을 통해 꾸준히 성장 중인 배우 홍경을 비롯해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일타 스캔들》 등으로 라이징 스타로 자리매김한 노윤서, 아이돌 가수에서 연기자로의 성숙한 변신을 보여준 김민주까지. 20대 청춘 배우들이 한국 영화계에 모처럼 반가운 단비를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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