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영화 총잡이들 사이로 굴러다니는 공 같은 풀…근데 그거 뭐지? [그거사전]

홍성윤 기자(sobnet@mk.co.kr) 2024. 11. 9.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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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사전 - 42] 서부영화에서 바람따라 굴러가는 풀 ‘그거’

“그거 있잖아, 그거.”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만 이름을 몰라 ‘그거’라고 부르는 사물의 이름과 역사를 소개합니다. 가장 하찮은 물건도 꽤나 떠들썩한 등장과, 야심찬 발명과,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코드와, 간절한 필요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거사전]은 그 흔적을 따라가는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고, 때론 유머러스한 여정을 지향합니다.
회전초는 [사진 출처=Luismi Sánchez, unsplash]
명사. 1. 회전초 2. (영어) 텀블위드, 윈드위치【예문】서부 영화에 카우보이는 없을 수 있지만, 회전초가 없는 건 용납할 수 없다.

회전초(回轉草·tumbleweed)다. 윈드위치(windwitch·바람마녀)라는 별명도 있다. 하나의 식물 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마른 줄기가 공처럼 뭉쳐 굴러다니는 여러 종류의 풀을 싸잡아 부르는 이름이다. 지역 마다 회천초의 종류는 판이하다. 수선화·국화·엉겅퀴·달맞이꽃·볏과 등 다양한 식물들이 회천초에 속한다. 이 글에서는 미국 서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러시아 엉겅퀴에 한정해 설명한다.

두 명의 총잡이가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다. 허리춤에 갖다 댄 손가락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술집 나무 문이 성마른 바람에 흔들리고, 작부의 긴장한 눈빛이 어둠 속에서 반짝인다. 세포 하나하나 찡그린 듯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짜증 섞인 표정 뒤로 굴러가는 회천초와 모래바람만이 정적을 깨트린다.

대중이 기억하는 회전초 클리셰는 바로 이 장면이다. 긴장감이 감도는 2명의 총잡이 사이를 눈치 없이 굴러가는 회전초는 그 자체로 서부극을 상징한다. 영국 광고 회사가 선보인 2분짜리 광고 캠페인 ‘Pearl & Dean: Tumbleweed Trainer(2016)’의 한 장면. 1950년대 서부극 제작 과정에 참여한 회전초 훈련사(?)의 이야기를 다룬 가짜 다큐멘터리다. [사진 출처=Pearl & Dean]
미국 서부개척시대 황무지의 상징과도 같은 식물이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우선 서부 영화 속 회천초의 이미지로 자리 잡은 러시아 엉겅퀴(영어 salsola tragus, 러시아어 Солянка сорная)의 경우 미국에 유입된 시점이 19세기 중후반, 미국 전역에서 발견될 정도로 확산한 시점은 19세기 말엽으로 기록돼 있다. 서부 시대의 끝 자락쯤에나 등장한 셈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미국 출신도 아니다. 유라시아 대초원에서 자생하던 회전초가 아마(亞麻) 씨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 퍼진 외래 식물이다. 이런 점은 오히려 ‘이민자의 나라’ 미국과 결이 통한다. 그리고 신대륙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그 땅을 정복했다는 점 마저도 닮아있다.

한해살이풀인 회전초는 가을이나 겨울 건기가 되면 마른 뿌리에서 줄기가 떨어져 나와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한가하게 마냥 굴러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유는 꽤 절실하다. 바로 씨앗을 퍼트리기 위해서다. 바람 따라 굴러다니면서 발생하는 충격과 마모를 이용해 씨앗을 땅에 떨군다. 풀더미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큰 개체의 경우 수 ㎞에 걸쳐 이동하며 씨앗을 최대 25만 개까지 퍼뜨릴 수 있다고 알려졌다.

식물학에 산포체(散布體·diaspore)라는 용어가 있다. 과일·종자·포자 등 영양체에서 분리돼 이동, 다음 세대 식물의 기반이 되는 조직을 뭉뚱그려 말한다. 산포체는 그 특성에 따라 바람을 타고, 물에 흘러가서, 동물의 털에 달라붙고, 과일을 먹은 동물이 씨앗을 배설하는 과정을 거쳐 자신들의 자손을 널리 퍼트린다. 회전초 역시 거대한 산포체다.

산포체의 영어 표기인 디아스포어는 ‘흩어지다(이산離散)’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διασπορά에서 온 단어다. 단어를 더 쪼개보면 ‘너머’를 뜻하는 dia와 ‘(씨를) 뿌리다’라는 뜻의 spero가 합쳐진 말이다. 같은 뿌리를 가진 단어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자의든 타이든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민족 집단과 그 이동 현상을 뜻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다.

2024년 3월 미국 유타주의 한 마을을 덮친 회전초들. 며칠간 계속된 강풍에 굴러온 회전초들이 집과 차를 덮을 정도로 쌓였다.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지역 방송국 KSL TV의 앵커인 댄 라스콘(Dan Rascon)이 자신의 SNS에 올린 사진. [사진 출처=Dan Rascon 페이스북]
서부 영화에서 묘사하는 회전초의 존재감은 그저 황량한 분위기만 살짝 내고 퇴장하는 미미한 수준이지만, 실제로는 꽤나 위협적인 존재다. 효과적인 씨앗 분산 전략과 잡초 특유의 왕성한 번식력·생장 속도가 결합,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번성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수백 수천개에 달하는 회전초가 통통 튀며 거리를 뒤덮는 장면은 살짝 귀여운 공포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뭐든지 오버 사이즈인 미국답게 회천초 역시 사람의 신장을 훌쩍 넘겨 자동차 크기로 자라기도 한다. 잎 끝부분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어서 맨 손으로 만지면 찔릴 수 있다. 도로 위를 굴러다니며 교통을 방해하거나, 하수도를 막고, 기계 고장을 일으킨다. 울타리나 집 벽에 수 m 높이로 쌓이고 자기들끼리 얽히며 주민들을 감금하기도 한다. 농작물이나 자생 식물에 필요한 토지의 수분을 소모하면서 경쟁자의 생존을 위협한다. 회전초는 산불·들불을 일으키는 주범이기도 하다. 공기가 잘 통하는 마른풀 더미라니, 말 그대로 ‘굴러다니는 불쏘시개’다. 불 붙은 회전초가 들판의 회오리와 만나 화염 회오리가 되는 장면은 충격과 공포다. 회전초의 악행을 하나하나 나열해보니, 서부극의 웬만한 무법자 악당은 명함도 내밀기 어려울 정도다.

2014년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로키산맥에서 발생한 화염 회전초 회오리. 초필 게이지 3개를 소진하는 격투 게임 필살기 기술명 같다. [사진 출처=Thomas Rogers 유튜브]
‘이민자의 풀’ 서부극의 주연이 되다
그렇다면 회전초에 서부 영화의 감초 역할을 부여해준 건 누구였을까. 버팔로 빌이다. 윌리엄 프레드릭 ‘버팔로 빌’ 코디(William Frederick Cody, 1846~1917)는 거칠고 낭만적인, 그래서 가장 미국다운 서부 개척 시대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쇼비즈니스계의 선구자였다. 아이오와주 농장에서 태어난 그는 말을 타고 우편물을 전달하는 우편 배달부로 활동하다 남북전쟁에 북군으로 참전했다. 인디언 전쟁에서 정찰병이자 안내인으로 활동해 민간인 신분으로 명예 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다. 그는 제대 이후 철도 노동자들에게 들소 고기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고 들소 사냥꾼으로 활약했는데, 18개월 동안 무려 4282마리의 버팔로를 사냥했다. 버팔로 빌이라는 별명은 이때 생긴 것이다.
윌리엄 프레드릭 ‘버팔로 빌’ 코디. 미국 서부 시대의 최고 유명인이자, 서부 시대 그 자체인 인물이다. [사진 출처=공공 저작물]
버팔로 빌의 화려한 경력과 모험담은 당대 유행하던 대중 소설에 딱 맞는 소재였다. 그의 일대기는 소설로, 연극으로 만들어졌고 인기를 끌었다. 1883년 버팔로 빌은 ‘와일드 웨스트’라는 이름의 순회 공연을 시작한다. 야생 동물 사냥과 말 경주, 사격 시범, 노래와 춤, 화끈한 로데오와 실감나는 역사 재연극에 이르기까지 서부 개척 시대를 매력적으로 재창조한 종합 엔터테인먼트 공연이었다. 쇼는 미국내 흥행에 힘입어 유럽 전역을 순회하며 공연했으며 3만 명에 달하는 관중이 몰리기도 했다. 빅토리아 영국 여왕을 비롯한 유럽 왕족들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시절 버팔로 빌의 인기와 영향력은 ‘수염 난 테일러 스위프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염난 테일러 스위프트(Beard Taylor Swift)’를 검색하자 뜬 (당연히 조작된) 이미지. 아아, 인터넷의 심연은 깊고 어둡다. 내 검색 알고리즘이 또 다시 타락했다. 첫번째 타락은 ‘남자 팬티 앞에 뚫려있는 소변 구멍 그거’를 검색한 날이었다. [사진 출처=인터넷 커뮤니티]
비록 버팔로 빌의 과장되고 왜곡된 쇼는 대중들이 서부 시대를 인식하는 스테레오타입을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 자신은 무척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을 존중하고 시민권을 지지했으며, 여성의 권리와 참정권을 주장하고 공정한 고용과 급여를 보장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성의 참정권에 관한 질문을 받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1890년 유럽 순회 공연 도중 이탈리아 로마에서 촬영한 ‘와일드 웨스트 쇼’의 출연자들. 당시 교황 레오 13세가 직접 이들을 환대했고, 베로나 원형극장 아레나에서 공연을 펼쳤다. [사진 출처=공공 저작물]
“맞소. 큰 제목으로 버팔로 빌이 여성 참정권을 지지한다고 적어주시오. 여자가 남자의 자리를 빼앗는다고 투덜대는 작자들은 날 웃게 만들거든.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일을 할 수 있고, 똑같이 잘 할 수 있다면 같은 임금을 받는 게 마땅하지.”

버팔로 빌이 서부 시대의 상징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회전초다. 바람과 함께 자유롭게 떠도는 회전초가 서부 시대의 방랑자 혹은 개척자, 거친 야생에서의 삶을 떠올리게 만든 덕이다. 회전초는 와일드 웨스트 쇼의 초창기 홍보 전단지에서부터 등장하며 카우보이와 인디언, 총잡이와 함께 시대의 아이콘으로 거듭난다. 버팔로 빌의 쇼는 1913년 파산으로 마침표를 찍었지만, 이후 등장한 모든 서부 영화들의 원형으로 남아 명맥을 이어간다. 물론 회전초도 함께다.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회전초가 굴러갑니다.
  • 다음 편 예고 : 와인병 바닥에 움푹 들어간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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