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사자밥 될 뻔한 세 번의 악몽…‘천사’의 잇단 도움 [ESC]
두 번 펑크 이어 모래에 바퀴 빠져
사자 경계, 방향 바꾸며 랜턴 비춰
짜증 폭발 속 도움 준 군인 오스카
그에 대한 답례는 코끼리 고아원에
사자가 우글거리는 야생의 숲 한가운데서 타이어가 터지는 바람에 차 안에 갇힌 우리 셋. 밤이 깊어서 나타난 군용 트럭의 주인공은 술에 취한 군인이었다. 얼마나 마셨는지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눈빛은 제대로 풀려 있었다. 다행히도 옆의 운전병은 멀쩡한 눈빛에 술 냄새도 나지 않았다.
“타이어 터졌어요? 우리가 도와줄테니 걱정 말아요.” 그의 이름은 오스카. 취해서 횡설수설하는 그의 동료 질라에게 총 들고 보초를 서라 하더니, 본격적으로 구조 모드에 들어갔다. “여기 사자가 우글거리는 곳이라 정말 위험해요. 랜턴 켜서 주변으로 계속 방향 바꿔가면서 비춰야 해요.” 오스카가 당부했다. 터진 타이어를 빼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타이어 교체에 필요한 장비가 없었다. 차를 들어 올릴 자키도, 삽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공구 상자에서 본 것 같은데 없었다. 모래를 파내서 땅을 평평하게 만들어야 할 때 오스카는 텐트 폴대를 이용했다. 타이어의 조임을 풀어야 할 때도 폴대를 구부려서 해결.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군인정신의 발휘였다. 거의 두 시간 만에 타이어 교체 성공! 환호성을 지르는 우리에게 오스카가 물었다. “어디까지 가야 해요?” “무첸제까지 가는데 밤길이라 겁이 나요.” “우리가 같이 가줄게요.” 오스카의 등에 솟은 날개가 보이는 것 같았다.
20년 여행 인생, 최대의 위기
우리 차가 앞서고, 오스카의 트럭이 따라오는 상태로 30분쯤 모랫길을 달렸을까. 오스카가 차를 세우고 다가왔다. “여기서부터 혼자 갈 수 있겠죠? 제 동료가 빨리 부대로 가자고 재촉해서요.” 미안한 기색으로 길을 설명하던 그가 갑자기 “제길!” 가벼운 욕설을 내뱉었다. “운전하면서 이상한 점 못 느꼈어요?” 묻는다. 내려서 앞바퀴를 보니 타이어가 15년쯤 쓴 걸레처럼 너덜거리는 상태였다. 뒷바퀴만 터진 줄 알았는데, 앞바퀴도 터진 거였다! 오스카가 절망하는 우리를 달랬다. “괜찮아요. 이것도 해결할 수 있어요.” 이때만 해도 그의 짜증 지수는 100점 만점에 30점 정도였다.
이번에는 더 고난의 행군이었다. 차체 아래에 걸려있는 예비 타이어를 꺼내야 했으니. “쇠지렛대 있어요?” “지렛대요? 그건지는 모르겠지만, 렌터카 회사에서 뒷좌석에 타이어 장비가 들어있다고 했어요. 근데 뒷좌석이 안 올라가요.” 그가 “뒷좌석 망가뜨려도 괜찮아요?” 묻는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뒷좌석을 억지로 들어 올려 틈 사이로 손을 넣은 그가 말했다. “여기 아무것도 없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히 있어요.” 좌절하는 그를 대신해 내가 손을 집어넣었다. 겨우 집어넣은 손을 휘저으니 무언가 잡혔다. 가늘고 긴 상자를 꺼내 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쇠지렛대, 일명 빠루였다! 빠루라니, 이름부터 파워풀했다. 오스카가 모랫바닥에 드러누운 채 작업을 시작했다. 보는 사람이 미안할 정도로 고된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그가 두 번째 타이어를 갈아 끼웠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그동안 그는 우리에게 랜턴 불빛으로 사자를 경계하라고 계속 당부했다. 나는 독서등을 꺼내 들고, 형란샘은 핸드폰의 랜턴을 켰다. 문제는 우리의 과학도 형란샘. 사자 경계보다 타이어 갈아 끼우는 일에 흥미가 꽂혀버렸다. 랜턴 한 바퀴 성의 없이 휙 휘두른 뒤에 집요하게 타이어 교체 과정 관찰. 내가 쿡 찌르며 “형란샘, 랜턴요!” 하면 “아, 맞다” 하면서 10초간 휘~ 돌리다가 다시 타이어로 시선 및 랜턴 고정. 형란샘 어깨를 치는 일을 열 번쯤 해야 했다. 이런 집요한 관찰력이 과학도의 기본인 건가. 두 번째 타이어도 무사히 교체한 오스카에게 숙소에 도착하면 사례로 주려고 했던 돈을 건넸다. 무첸제까지 꼭 같이 가달라고, 우리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사정하면서. 그의 술 취한 동료 질라는 계속 우리를 두고 갈 길 가자고 하는 눈치가 빤히 보였다. 알겠다고 답한 오스카가 트럭으로 돌아갔다.
트럭을 따라 주행하기 삼십여 분.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모랫길에 야간이라 운전이 조심스러웠던 미옥샘이 속도를 너무 늦추는 바람에 바퀴가 모래구덩이에 빠져버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바퀴는 헛돌 뿐. 아, 신이시여! 삼종 세트라니! 이건 너무 가혹한 운명의 장난 아니십니까!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20년간 혼자 여행 다니는 동안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나였지만, 이건 정말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환장할 것 같은 심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니 거대한 창공을 가득 채운 별무리가 놀리는 것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위리안치 당할 대역죄 저지른 심정
비상등을 켜고 서있으니 오스카가 트럭에서 내려 다가왔다. 능지처참이나 위리안치 당해야 할 대역죄를 저지른 역도의 심정으로 고백했다. “모래 구덩이에 빠졌어요.” 그의 분노 지수가 마침내 100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뭐? 아니! 어떻게! 여기서! 빠질 수가 있어요? 이제 포장도로까지 1㎞ 남았는데! 이보다 더 험한 길도 다 헤쳐왔으면서! 왜! 여기서! 빠지냐고요!” 오랫동안 구애한 암컷을 빼앗긴 수사자가 포효하듯 울부짖는 그에게 그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수밖에. 나라도 짜증이 폭발할 만했으니. 두 번 구해줬는데 세 번을 구해야 하다니.
“우리한테는 로프도 없단 말이에요!” 그의 중얼거림에 정신이 번쩍 든 내가 답했다. “우리 로프 있어요. 어딘가에 분명히 들어있어요!” 미옥샘과 형란샘은 로프를 본 기억이 없다고, 우리에게 로프가 어디 있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분명히 렌터카를 빌리던 날, 로프를 본 기억이 있었다. 그날 찍었던 동영상을 찾아보려고 핸드폰을 뒤지는데 오스카가 소리를 질렀다. “로프도 없어서 미칠 것 같은데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여기서 로프 어디 있는지 찾으려는 건데요.” 절망으로 흥분한 그는 내 설명을 듣지도 않았다. 수사자는 계속 포효할 뿐이었다. 동영상은 찾아보지도 못한 채 말했다. “툴박스에 있을 거예요!” 일단 성난 사자를 달래야 했다. 툴박스를 여니 포장도 뜯지 않은 노란 로프 덩이가 나왔다. 그 아래 놓여 있는 삽을 보고 무릎이 꺾였다. 오스카가 열어보고 삽이 없다고 했는데 꼼꼼히 살폈어야 했다.
로프를 거는 그에게 다가가 약간의 돈을 더 건넸다. 정말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 순간,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안 주고 빈둥거리기만 하던 그의 동료 질라가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나타나 “뭐 하고 있어?”라고 물었다. 아, 쓸데없이 눈치만 빠른 놈! 이 돈은 오스카에게만 주고 싶었는데! 트럭과 우리 차를 연결해 모래 구덩이에 빠진 차를 오스카가 끌어당겼다. 차가 모래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마지막 남은 고난의 대장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오스카의 분노의 질주였다! 미옥샘은 안전 벨트도 못 맨 상태였다. 질주하는 트럭을 따라 기를 쓰며 핸들링을 하느라 넋이 나간 상태. 그렇게 10분쯤 달려 드디어 포장 도로가 시작되는 구간에 들어섰다.
오스카가 다가왔다. “우리는 카사네(북서부 국경도시)의 게이트가 열릴 때까지 여기서 자고 갈 거예요. 이제 포장도로로 30분만 가면 되니까 조심해서 무첸제까지 가요.” 더는 그를 잡을 면목이 없었다. 새벽 두 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미옥샘은 운전을 못 하겠다며 차 안에서 자고 가자는데, 그것만은 안 되는 일이었다. 이 나라의 치안은 열악했다. 경비원이 없는 곳에 차를 잠깐 세워두는 일조차 털어가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수준인데, 여자 셋이 길거리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밤을 보낸다고?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내는 못한데이.” 우리의 메인 드라이버이자, 셰프이자, 건축업자(텐트 접고 치는)인 미옥샘이 손을 내저으며 단호히 운전을 거부했다. 면허 따고 운전한 지 3년이 되도록 야간 운전도 못 하는 내 지리멸렬한 운전 실력이 그저 한심하고 원망스러울 뿐. 반전은 대범한 과학도 형란샘! 그런 대형 사고 직후에도 여전히 기죽지 않고 담대한 형란샘이 말했다. “운전 제가 할게요. 할 수 있어요.” 차를 몰고 포장도로를 조심조심 달려가는데 미옥샘이 외쳤다. “저거 쟈들 트럭이다!” 오스카의 트럭이 우리보다 앞서 달리며 갈림길에서 깜빡이를 켜고 기다리다가, 우리가 다가가면 마치 지긋지긋해 달아나듯 멀리 앞서갔다. 우리는 아득히 보이는 빨간 불빛을 보며 천천히 차를 몰았다.
숙소에 도착하니 새벽 두 시 반. 오스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우리가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을 본 그가 차를 돌렸다. 악몽 같았던 하루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우리 때문에 새벽 잠에서 깨어나 문을 열어준 숙소 매니저가 말했다. “에드윈이 전화 여러 번 했어. 너희 도착하면 알려달라고.” 어쨌거나 정글에서 사자밥이 될 운명은 아니었던 듯.
한 인간의 선의로 구원받은 밤
한 인간의 선의로 구원받았던 밤이었다. 오스카가 보여준 호의는 돈 몇 푼으로 갚을 수 없다. 그건 고스란히 우리의 빚이 되었다. 오래전 친구가 그랬다. 친절은 과녁을 빗나간 화살 같은 거라고. 화살을 꼭 그 과녁에 명중시켜야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내가 받은 친절을 누군가에게 돌려준다는 행위 그 자체니까. 오스카의 친절에 대한 나의 답례는 코끼리 고아원으로 날아갔다. 아기 코끼리 한 마리가 1년간 마실 수 있는 분유비가 되어.
다음날 우리는 카사네로 향했다. 어젯밤 빠져나오지 못해 안달이었던 카사네의 초베 국립공원을 다시 찾아갔다. 도로를 달리는 동안 기린이며 코끼리가 창 너머로 지나갔다. 숙소는 지난밤의 악몽을 보상이라도 하듯 근사했다. 빛나는 햇살 아래 진분홍 부겐빌레아와 하얀 천사의 나팔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몽구스 서너 마리가 정원을 제집인 양 돌아다니고 있었다. 숙소 앞 도로에는 야생 멧돼지 두 마리가 코를 킁킁거리며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날 오후 초베강 선셋 사파리를 신청해 작은 배에 올랐다. 맥주잔을 기울이며 초베강으로 넘어가는 붉은 해를 지켜봤다. 맥주는 달콤했고, 바람은 시원했다. 이우는 저녁 햇살이 금가루 같은 빛을 강물 위로 뿌리고 있었다. 눈앞의 뭍에는 악어 한 마리가 잠을 자고 있고, 멀리서 코끼리 무리가 진흙 목욕을 하고 있었다. 단체 관광객이 망원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로 코끼리 무리를 찍고 있었다. 우산아카시아나무 꼭대기에 앉아있는 아프리카바다수리 몇 마리. 그 너머로 풀을 뜯는 버펄로떼들. 배 위에서 바라보는 야생의 세계는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다. 맥주잔을 들고 뱃전으로 몸을 내민 형란샘과 미옥샘의 얼굴도 평화로웠다.
생과 사를 오가던 지난밤이 아득한 전생 같았다. 살아있다는 안도감이 온몸으로 번져갔다. 캠핑카를 끌고 50대 여자 셋이 호기롭게 디뎠던 나미비아, 보츠와나는 온갖 모험으로 막을 내렸다. 여행에서의 고난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강렬하게 기억되는 여행의 추억은 대부분 고난으로 인한 경험이다. 게다가 타인의 친절에 기대어 난관을 빠져나왔으니,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곳임을 확인한 셈이다. 사바나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을 두고, 우리는 이제 인간의 질서가 작동하는 세계로 돌아가야 했다. 모험을 통해 조금은 더 강인해진 얼굴로.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정을 가지고 함께해 주신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여행가 김남희는 2003년 이후 유목민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는 앉아서 유목하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지은 책으로는 ‘길 위에서 읽는 시’, ‘여행할 땐, 책’,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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