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기업은행에서 사라진 2억원대 자기앞수표 행방은?
최근 5년간 기업은행 횡령 사건만 18건 발생...내부 통제 시스템 또 구멍
(시사저널=이석 기자)
경찰이 IBK기업은행에서 발생한 수상한 자금 흐름에 대해 조사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대구에 위치한 기업은행 한 지점에서 당사자인 A씨 몰래 계좌가 만들어진 데다, 수억원의 돈이 입금된 후 자기앞수표로 인출됐음에도 은행 측이 신원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고소장이 접수됐기 때문이다.
사건을 접수한 대구 달성경찰서는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문제의 수표가 인출될 당시 찍힌 기업은행 지점의 CCTV 화면과 관련 전표 등을 확보한 상태다. 이후 고소인뿐 아니라 피고소인을 불러 자초지종을 들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향후 경찰 조사 과정에서 고소인 주장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적지 않은 논란이 예상된다.
고소장 접수한 대구 달성경찰서, 조사 착수
당사자인 A씨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계좌가 개설됐고, 단기간에 한도가 크게 증액된 배경이 우선 주목된다. 일반인의 경우 은행에서 신규 계좌를 개설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신원 확인 이후 계좌가 만들어져도 일정 기간 동안 거래에 제한을 받는다. 온라인 이체의 경우 30만원, 창구 인출 시 100만원만 가능하다. 2016년 대포통장 근절을 위해 도입된 제도 때문이다. 국무조정실은 지난해 규제심판회의를 열고 은행의 1일 신규 계좌 한도를 종전 대비 3배 이상으로 확대했다. 그럼에도 온라인 이체 한도는 100만원, 창구 인출은 300만원이 한계였다. 이 거래 제한을 풀기 위해서는 고객이 실적을 쌓아야 하는데, 통상적으로 3개월에서 6개월 걸린다는 게 금융권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A씨의 계좌 개설과 이체 한도 증액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A씨 등에 대한 취재와 경찰 고소장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A씨는 3월25일 대서 달서구에 위치한 한 커피숍에서 B씨를 만났다. 자신이 보유한 774㎡ 부지에 대한 매매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토지 매매대금은 8억3000만원. B씨는 계약금 1억3000만원을 주고, 잔금 7억원은 10여 일 후 지급하기로 하고 매매계약서를 작성했다.
처음에는 거래은행을 기업은행으로 정했다. 이후 B씨 측이 가져온 기업은행 계좌 개설 서류에 서명했다. 하지만 추가 협의 과정에서 거래은행이 대구은행으로 바뀌었다. B씨는 곧바로 A씨의 대구은행 계좌로 계약금 1억3000만원을 입금했다. 며칠 후 A씨는 B씨에게 중도금 4억2300만원을 받고 소유권을 먼저 이전해 줬다. 잔금 2억7700만원은 4월5일까지 지급하는 것으로 양측은 합의했다. A씨가 이전에 서명했던 기업은행 계좌 개설 서류는 자연스럽게 잊혔다.
하지만 B씨는 약속된 4월5일까지 잔금을 입금하지 않았다. A씨가 법원에 문제 부동산의 가압류 신청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고 있던 기업은행 통장이 개설돼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확인해 보니 매매계약서 작성을 위해 만났던 3월25일 이 계좌가 개설돼 있었다. A씨는 시사저널과의 전화통화에서 "문제의 기업은행 계좌에 2차례에 걸쳐 2억7700만원이 입금된 후 3시간여 만에 자기앞수표로 전액 인출됐다"면서 "나도 모르는 계좌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단기간에 거액의 돈이 드나든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수사기관의 조사가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A씨 계좌에 있던 2억7700만원의 돈이 본인 확인 없이 자기앞수표로 발급될 수 있었던 점도 의문이다. A씨는 "계좌에 있던 돈이 수표로 인출됐다면 반드시 본인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면서 "하지만 은행 CCTV에 찍힌 수표 발급자는 80세 여성(A씨)이 아니라 남성이었다. 은행이 최소한의 본인 확인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기업은행의 시스템에 구멍이 뚫렸을 수 있다는 얘기다. A씨는 당시 수표를 발급한 은행 직원 C씨와 수표를 인출해간 D씨도 경찰에 고소한 상태다.
기업은행 측 "객관적인 사실 확인은 불가"
이와 관련해 기업은행 측은 "당행(기업은행)은 소송의 당사자가 아닌 데다, 언급한 부분은 (고객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객관적인 사실 확인이 불가한 점 양해 바란다"고 해명했다. 유선전화와 서면질의서를 통한 거듭된 해명 요청에도 은행 관계자는 "(시사저널은) 계좌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답해줄 의무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최근 계속되고 있는 은행권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이번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최근 우리은행과 KB국민은행 등에서는 내부 통제 부실로 인한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지난 7년간 발생한 횡령사고액만 1661억원(127명)에 달한다. 지난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시중은행장들이 대거 증인으로 출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주요 은행들은 내부 통제 강화나 준법경영부 설립을 통해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은행권의 횡령사고는 근절되지 않고 있다.
기업은행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금감원은 지난해 말 고객 돈 5억원 횡령 사건이 발생한 기업은행에 대해 불건전 영업행위 금지 위반으로 과태료 9000만원을 부과했다. 국회 정무위 소속 강명구 국민의힘 의원이 기업은행을 통해 전달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기업은행에서 발생한 횡령 사건만 18건, 피해액은 46억원에 이른다. 고객 돈을 빼돌린 직원들은 가상자산이나 주식 투자, 도박에 탕진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환수 실적은 전체의 3분의 2로 여전히 저조했다. 강명구 의원은 "기업은행은 국책은행으로 국민이 어려울 때 우산이 돼야 한다"면서 "내부 통제 강화와 함께 징계부지금 제도 도입 등 문제 해결을 위한 강력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성태 기업은행장도 최근 열린 전국 영업점장 회의에서 "금융사고 예방에 만전을 기하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김 행장의 당부는 '공염불'에 불과했다. 이번 사건에서 드러나듯 거액의 수표가 도난당했음에도 기업은행 측은 후속 조치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A씨의 법률대리인을 맡고 있는 김재철 변호사는 "나중에 수표가 유통될 것에 대비해 지급정지를 하거나 법원 공탁을 하는 것이 상식이다"면서 "하지만 은행 측은 아무런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처음에는 A씨가 직접 와서 통장을 만들고, 수표도 직접 인출했다고 거짓 해명을 했다. A씨 측이 CCTV 확인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이지 않다가 뒤늦게 경찰 조사에서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따른 책임 규명 역시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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