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불행에 몸과 마음이 과민하게 반응한다면

한겨레 2024. 11. 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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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사이
감정의 전이 증폭
‘감수성 풍부’도 지나치면 문제
과몰입 땐 우울증·PTSD 악화
어릴 때 돌아가신 엄마 ‘트라우마’
나쁜 기억 대체할 좋은 생각을
게티이미지뱅크

지영(가명)씨는 50대 여성으로 대학생 두 아이를 둔 주부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슬픈 사연이 나오면 눈을 떼지 못하고 하루 종일 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사연의 주인공을 안쓰럽게 생각합니다. 사고가 나서 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는 일 또한 자주 있습니다. 가족들은 지영씨를 보고 지나치게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영씨의 먼 친척 중 한명이 돌아가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고인과는 평소에 자주 만나지 않는 사이였지만 장례식장으로 찾아갔습니다. 고인은 결혼을 안 했고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셔서 가족이 많지 않았습니다. 지영씨는 마치 자기 일처럼 장례식장에서 열심히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장례 절차 중에 누워 있는 고인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영씨는 사실 돌아가신 분의 얼굴을 보는 일이 처음이었습니다. 표정이 없는 차가운 얼굴을 보고는 지영씨는 너무 놀라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부축해 겨우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무의식 저편에 숨어 있던 기억

집으로 온 지영씨는 그 얼굴이 떠올라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고인에게 자신이 소홀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것 또한 그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머릿속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새벽 4시가 넘었는데 아직 뜬눈으로 새우고 있었습니다. 어제 본 고인의 얼굴 표정이 생각나면서 무서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고인은 마치 화가 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영씨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삶과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경계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영씨가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하고 울고 있자 남편이 걱정이 되어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지영씨는 하루 종일 고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스마트폰으로 플랫폼 영상을 켜자 범죄나 사건 관련 영상들이 연관 검색으로 보였습니다. 지영씨는 썸네일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영상에서는 과거에 있었던 사건 사고들을 마치 이야기하듯이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지영씨는 이런 내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영상을 보면서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하자 피로가 심하게 몰려왔습니다. 식욕이 떨어져 하루에 한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지영씨는 집 밖에 나가지 않고 계속 침대에 누워만 있었습니다. 이유 없이 슬퍼지고 눈물이 났습니다. 그날 장례식장에서 본 얼굴을 잊고 싶지만 계속 생각이 났습니다. 이러다가 자신도 고인처럼 갑자기 죽게 되는 건 아닌지 불안이 생겼습니다. 이전에 친한 사람도 아니었고 자신 때문에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그 뒤로도 한달 동안 과하게 몰입되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남편과 자녀들의 권유로 인근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했습니다.

지영씨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검사한 결과 불안이 동반된 주요우울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진단되었습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사람이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의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그 사건에 공포감을 느끼고 사건 후에도 계속적인 재경험을 통해 고통을 느끼며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과도한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는 질환입니다. 지영씨는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얼굴을 잠깐 보았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 대한 공포감이 사라지지 않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 생각과 악몽으로 떠오르는 재경험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도저히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불안과 우울증이 동반되었습니다.

지영씨의 어머니는 지영씨가 초등학교 때 암으로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지영씨는 항암치료로 수척해진 어머니를 보면서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고인의 얼굴을 보며 어릴 때 자신이 본 어머니의 얼굴을 자신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었고 지영씨가 본 고인의 얼굴과 무척 비슷했습니다. 지영씨는 너무 어릴 때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자신의 무의식의 저편에 숨어 있었던 이별의 기억을 소환하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와는 그 얼굴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친밀한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길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유튜브 등에서 아무렇지 않게 만나는 사고 영상들은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강한 자극이 될 수 있습니다. 지영씨는 그런 영상들을 보면서 자신의 감정이 더욱 증폭되는 느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고에 대한 영상들이나 스토리텔링은 사고를 예방하는 효과보다는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에게 감정의 전이를 강화시키게 됩니다. 결국은 트라우마의 기억을 악화시키는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우울증의 증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영씨는 자신이 느끼는 현재의 경험이 과거의 트라우마와 관련되어 있고 완경기가 오면서 더욱 감정의 기복이 심해진 것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인의 사망 상태를 본 것이 어릴 때 어머니 사망의 트라우마를 재현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남편이나 자녀들이 지영씨를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고 이 상황을 이해했기 때문에 회복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영씨는 자신이 감정의 전이가 강하기 때문에 타인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도움을 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에 감정의 전이에 몰입되면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경험이 연결되면서 우울·불안 상태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생각의 연상이 강해지면서 자신과 상관이 없는 사건 사고의 내용에도 큰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영씨는 먼저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괴로워하기보다는 나쁜 기억을 대체할 다른 좋은 생각들을 더 많이 채워 넣기로 했습니다. 또한 집에만 있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계속 끔찍한 영상을 보는 버릇을 줄이기로 했습니다. 우울증에 대해서는 약물 치료도 병행하면서 수면과 의욕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잠을 잘 자면서 과각성과 불안 또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결국 지영씨는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서 그리운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책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상담소’를 썼습니다. 글에 나오는 사례는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으며,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경우를 통합해서 만들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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