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30년 닮아가나”...일본화 지수로 본 한국경제 [노영우의 스톡피시]

노영우 전문기자(rhoyw@mk.co.kr) 2024. 11. 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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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는 우리나라의 반면교사다. 1980~90년대 일본은 우리나라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일본 기업의 제품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한국의 기업들은 일본 것을 모방하는데 열중했던 시절이다.

그러다 일본이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30’년으로 불리는 장기불황에 빠지자 일본 사례는 닮아서는 안 될 모델로 바뀌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경제가 일본을 닮아가고 있다는 염려가 구체화되고 있다. 상황을 점검해본다.

일본 경제학자인 타카토시 이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1990년대 일본이 저물가 저금리 저성장이 고착화 되는 상황을 경험한 후 경제를 분석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일본화 지수’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 지수는 각국 중앙은행의 정책 기준금리, 물가상승률, 실제 GDP(국내총생산)과 잠재GDP간의 차이를 비율로 나타낸 GDP갭률의 합계로 표시된다. 저금리 저물가 저성장이 고착화될수록 일본화지수는 낮게 나타나고 이 경우 장기 불황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경제는 불황에 빠졌는데 정부와 중앙은행이 돈을 아무리 풀어도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지수가 단순하고 직관적이어서 국가 경제를 설명하는데 자주 인용된다.

우리나라의 일본화 지수를 계산해봤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24년 현재 우리나라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5%로 전망됐다. 또 GDP갭률은 -0.252%로 계산됐다.

실제GDP가 경제 실력을 나타내는 잠재GDP에 이정도 못 미치고 있다는 얘기다. 기준금리는 연3.25%수준이다. 세 가지 숫자의 합으로 표시된 일본화지수는 5.52이다. 같은 방식으로 계산한 일본의 지수는 2.6이다.

일본화지수가 낮을수록 경제에 저물가 저성장 저금리 현상이 고착화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는 이 지수의 절대 값은 일본의 2배가 넘는다. 단순 수치상으로는 일본보다 형편이 나은 셈이다.

다른 나라의 일본화지수를 계산해보면 미국이 8.86으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경제규모도 크고 경제 발전단계도 높은 나라임에도 경제가 상당히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다음으로 호주(7.79) 캐나다(5.7) 이탈리아(5.33) 독일(4.61) 순으로 높다. 국제비교에서 볼 때 우리나라의 지수는 중간 수준이다. 하지만 속내를 뜯어보면 만만치 않은 현실과 직면하게 된다.

일본화지수의 핵심은 GDP갭 비율이다. 경제가 잠재적 실력을 얼마만큼 발휘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한 국가의 실물 경제가 실력 발휘를 못하면 물가가 내려가고 정부는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금리를 낮춘다. 이런 점에서 GDP갭률은 일본화지수를 가늠 짓는 가장 중요한 잣대다.

우리나라의 GDP갭 비율은 매우 낮은 수준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2012년 GDP갭 비율이 -0.387로 떨어진 이후 2024년까지 10년 넘게 줄곧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은 후 막대한 돈을 풀었던 2022년만 유일하게 ‘플러스’를 기록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GDP갭 비율은 장기불황을 겪고 있는 일본보다도 훨씬 낮다. 2012년부터 2025년까지의 GDP갭률을 평균해보면 일본은 -0.16, 한국은 -0.58로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2025년에도 우리나라의 GDP갭 비율은 -0.02수준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 반면 일본은 0.06으로 전망됐다. 장기불황의 대명사인 일본경제보다 GDP갭 률이 낮다는 것은 우리나라 경기 불황이 만성화 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전체적인 일본화지수가 낮은 것은 저금리 상황에 기인한다. 2024년 일본의 정책금리는 0.25%로 우리나라보다 3%포인트나 낮다. 또 일본의 물가상승률은 2.2% 수준으로 우리나라보다 조금 낮은 수준이다.

우리나라 실물 경기는 일본보다도 좋지 않은데 기준금리가 일본보다 훨씬 높아 전체적인 일본화지수가 높게 나온다는 얘기다.

이처럼 우리나라 일본화 지수는 상대적으로 일본보다 높은 고금리를 유지한데 따른 것이다.

향후 정책 환경도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좋지 않다. 일본은 장기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1995년9월에 기준금리를 0.5%로 낮추면서 사실상 제로금리 시대를 열었다. 그래도 경기가 되살아나지 않자 기준금리를 마이너스까지 낮췄다.

금리에 더해 아베신조 전 일본총리가 2012년부터 ‘아베노믹스’라고 불리는 ‘무제한 양적완화’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무한정 돈을 푼 것이다. 이런 정책을 30년가량 이어오고 있다.

다만 2022년 이후 일본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이 2%를 넘어서면서 이 나라도 기준금리 인상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는 상태다.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와 무제한 양적완화 정책은 경제 규모가 크고 엔화가 국제통화로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정책이다.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경제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원화도 국제 통화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과도하게 낮추면 원화 값이 빠른 속도로 하락(환율상승)해 경제에 큰 부담을 줄 수 있다.

올해 들어서도 내수 경기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한국은행은 환율 부담 때문에 적극적인 금리 인하 정책을 펴지 못했다.

실물 경제는 사실상 장기불황 상태에 빠져있지만 금리를 낮추는 확장적인 통화정책은 환율을 비롯한 대내외 여건 문제로 제약을 받고 있어 거시경제정책의 공간은 갈수록 협소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일본화지수가 외견상 일본보다 높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일본보다 결코 나은 상태가 아니라는 얘기다.

미래의 전망도 밝지 않다. 눈에 띄는 것이 2020년 이후 우리나라 경제를 책임질 노동가능인구가 일본보다 더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경우 경제성장 단계가 우리보다 앞서갔고 고령화도 일찍 진행됐다. 그러다보니 1963년 이후 우리 경제가 성장궤도에 접어든 다음부터는 우리나라 노동가능인구 증가율은 일본보다 항상 높았다.

일본은 90년대 중반 이후 노동가능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우리나라는 2018년까지 증가세를 유지했다. 그러다 2019년부터 우리나라 노동가능인구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2021년에는 우리나라 노동가능인구 감소율이 -0.9%로 일본(-0.6%)보다 커졌다. 1963년 이후 57년 만에 한일간 노동가능인구 증가율이 역전됐다.

2022년과 2023년에도 우리나라의 노동가능 인구가 일본보다 훨씬 가파르게 줄어들고 있다. 일할 사람이 사라지는 나라의 경제가 역동적으로 움직일 리가 없다.

경제의 근본 체력은 급속히 약해지고 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의 공간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우리경제가 일본이 겪었던 장기불황국면에 이미 진입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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