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 물 먹이더니…고려아연이 불 지핀 ‘상법 개정’

김은성 기자 2024. 11. 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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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충수 된 고려아연 승부수, 유증 통한 지분 확보 차질
상법 개정해 주주 권익 보호 등 최소한의 원칙 담아야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지난 10월 2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열린 고려아연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간경향] 세계 1위 종합비철금속 제련회사인 고려아연을 둘러싼 경영권 분쟁이 분수령을 맞았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이 추진하는 유상증자(유증)를 금융감독원이 제지하고 나섰다. 다수의 법무법인은 개인 주주들을 모아 고려아연의 유증을 막는 가처분 및 집단소송을 검토하고 있다. 고려아연 측은 “주주와 투자자 우려를 해소할 것”이라고 했지만, 유증을 철회할 가능성도 생겼다. 최 회장 일가가 영풍·MBK파트너스 연합과 분쟁에서 이기기 위해 추진하는 유증에 주주들이 손해를 볼 수 있게 되자 상법 개정 논의도 불붙고 있다. 전문가들은 주주권익 보호 조항 신설 등 최소한의 기본 원칙이라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금감원은 지난 11월 6일 고려아연이 지난달 제출한 증권신고서가 투자자에게 중대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경우 등에 해당해 정정신고서 제출을 요구했다고 공시했다. 금감원은 “유상증자 추진 경위 및 의사결정 과정과 주관사의 기업실사 경과, 청약 한도 제한 배경, 공개매수신고서와의 차이점 등에 대한 기재가 미흡한 부분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투자자들의 판단을 위한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도록 고려아연에 보완을 요구한 것이다. 고려아연이 지난 10월 신고한 일반공모 유상증자는 수리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돼 즉시 효력이 정지됐다. 고려아연은 향후 3개월 내 정정신고서를 다시 내야 한다. 제출하지 않으면 유상증자 계획은 철회된 것으로 간주한다. 고려아연 측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공시와 상황 등을 면밀히 검토해 시장과 투자자의 우려와 오해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89만원에 공개매수 후 67만원에 유상증자

고려아연은 지난 10월 30일 ‘국민주’가 되겠다며 2조5000억원 규모의 일반공모 유상증자 계획을 발표했다. 주주권익 보호를 위해 자사주를 공개 매수해 소각한다고하더니, 돌연 유통주식 수를 대폭 늘리겠다는 ‘황당한’ 발표를 했다. 지난 10월 23일 1주당 89만원에 자사주 공개매수를 종료한 지 7일 만에 나온 기습 공시다. 고려아연은 보통주 373만2650주를 1주당 67만원(예정가)에 발행할 계획이었다. 이는 고려아연이 예고했던 자사주 소각 절차 후 남은 발행주식 수의 20%에 달한다. 조달 금액 중 2조3000억원은 차입금 상환 목적에 쓴다고 공시했다. 자본시장법상 우리사주조합 배정 특례에 따라 공모주식수의 20%는 우리사주조합에 우선 배정했다. 80%는 일반청약 물량이다. 청약 조건도 걸었다. 고려아연은 일반공모 방식을 택하면서 우리사주조합을 제외한 모든 청약자는 그 특별관계자와 합산해 총 공모주식수의 3%(11만1979주)를 초과해 청약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고려아연은 청약 한도 조건에 대해 “주주 기반을 확대해 국민 기업화를 추진하기 위한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재계 관계자들은 “지분 경쟁 구도 속 상대방의 지분 희석을 겨냥한 것”으로 본다. 자사주 공개매수로 소각이 예정된 204만30주를 제외하고 남은 발행주식 총수(1866만3253주) 기준으로 지분율을 계산하면, 최윤범 회장의 우호 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우리사주조합엔 4%를 배정할 수 있다. 반면 영풍·MBK파트너스 연합은 아무리 청약 금액을 많이 써내도 최대 0.6%만 받을 것으로 추산된다. 상대방의 지분은 낮추고 우리사주조합을 통해 추가로 지분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다.

고려아연의 기존 주주들은 시가보다 헐값(예정가 67만원)에 주식이 발행되는 걸 지켜만 봐야 한다. 주주 가치 희석 우려에 유증 발표 당일 고려아연 주가는 30% 폭락하며 하한가로 추락했다. 시장 안팎에선 최 회장의 개인 지배권을 방어하기 위해 회사가 돈을 빌리고, 유증에 참여한 주주들이 이를 대신 갚아주는 것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고려아연의 기습 공시 다음날인 지난 10월 31일 금감원은 현안 브리핑을 열고 “부정거래 혐의가 있다”며 칼을 뺐다. 글로벌 독립 투자 리서치 플랫폼 ‘스마트카르마’의 더글라스 킴 애널리스트는 “고려아연 유상증자 결정은 최악의 코리아 디스카운트 사례”라고 말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도 “차입을 통해 89만원에 자사주를 매입하고 유상증자를 통해 67만원(예정가)에 주식을 발행하는 자해 전략”이라고 말했다.

최악의 코리아 디스카운트 사례로 꼽혀

시장에선 두산 사례 등을 고려하면 고려아연의 유증 강행이 쉽지 않아, 경영권 분쟁은 표 대결로 결판이 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앞서 금감원은 두산로보틱스와 두산밥캣의 합병 계획도 두 차례에 걸쳐 정정신고서를 요구해 철회시켰다. 금감원의 정정 요구는 횟수 제한이 없다. 고려아연은 금감원으로부터 회계 관련 심사도 받고 있다. 고려아연이 유증 계획을 일부 수정해 강행한다 해도 오는 12월 18일 예정된 신주 상장 예정일을 맞추지 못하면 내년 정기주총에서 의결권을 갖지 못한다.

결국 조만간 열릴 임시주주총회에서의 의결권 싸움이 경영권 분쟁의 향배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공개매수 종료 후 고려아연(35%)과 영풍·MBK파트너스 연합(38%) 측은 모두 과반 지분을 확보하지 못했다. 영풍·MBK파트너스 연합 측이 요구한 임시주총은 법원 허가를 거쳐 이르면 오는 12월 또는 내년 초 열린다. 임시주총에선 영풍·MBK파트너스 연합 측이 요구한 신규 이사 선임 등을 위한 논의가 진행된다. 후보로 추천된 신규 이사는 사외이사 12명, 기타비상무이사 2명으로 구성됐다.

현재 고려아연 이사회는 13명이다. 장형진 영풍 고문 1명을 제외한 12명이 최 회장 측 인사다. 영풍·MBK파트너스 연합 측은 “독립적인 업무 집행 감독 기능을 상실한 기존 이사회 체제는 수명을 다했다”며 “주주들의 의사가 이사회의 의사결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신규 이사를 선임해 이사회를 재구성할 것”이라고 했다. 임시주총에서는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와 중간지대 주주들의 설득이 관건이 될 예정이다. 고려아연은 국가 핵심 기간산업을 담당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최윤범 회장 측이 경영권을 수성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유증 계획으로 여론이 부정적으로 기울었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현대엘리베이터·KCC 사건 소환

재계에서는 2003년 현대엘리베이터·KCC 경영권 분쟁 사건이 회자하고 있다. 21년 전 현대엘리베이터도 유증을 추진했다. 겉으로는 ‘국민기업’을 외쳤지만, 내부적으로는 경영권 방어가 목표였다는 점도 같다. 2003년 11월 KCC가 현대엘리베이터 발행주식 총수의 44.3%를 취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대엘리베이터는 일반공모 방식으로 1000만 주를 발행하는 유상증자를 결의했다. 현대엘리베이터 측은 대규모 일반공모 유증을 통해 국민기업으로 만들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현대엘리베이터의 신주발행 물량은 당시 발행주식 총수의 약 2배에 달했고, 1인당 청약 한도는 300주로 제한됐다. KCC는 유증이 기존 주주에게 불리하다며 신주발행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법원은 현대엘리베이터의 유증이 기존 주주의 신주인수권을 침해한 것에 해당한다며 KCC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유증이 현대엘리베이터 경영에 필요한 자금 조달이 아니라 경영권 유지·방어에 목적이 있다고 판단했다. 영풍·MBK파트너스 연합 측에 유리한 사례인데, 고려아연 분쟁과 단순 비교하면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려아연의 유증 규모와 청약 한도는 현대엘리베이터에 비하면 완화된 조건이다. 자본시장법 전문 변호사 A씨는 “과거 현대엘리베이터 측은 과도하게 유증을 했고 청약 한도도 엄격했다”며 “(고려아연 측의 주장대로) 공개매수 종료 후 거래량 급감에 따른 유통 물량 부족으로 상장폐지 가능성이 생기고 MSCI 지수 편출 가능성으로 긴급하게 유증을 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광일 MBK파트너스 부회장(가운데)이 지난 10월 19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MBK파트너스 고려아연 공개매수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은 강성두 영풍 사장, 오른쪽은 이성훈 베이커매킨지코리아 변호사 / 연합뉴스

유증의 적정성 여부와 별도로, 유증을 결정한 과정에서도 위법적인 정황이 적발돼 논란이 일고 있다. 금감원은 고려아연이 자사주 공개매수가 끝나기 전에 유상증자를 계획했으면서 이를 제대로 공시하지 않았다고 본다. 이는 공개매수신고서의 허위 기재, 부정거래로 자본시장법 위반이다. 고려아연은 지난 10월 11일 정정한 공개매수신고서에서 “영풍·MBK의 적대적·약탈적 인수합병에 대응해 기업가치 및 주주 권익을 보호하고 본 공개매수를 통해 취득하는 자기주식 전량을 적법한 절차를 거쳐 소각함으로써 주주가치를 제고하고자 한다”며 “공개매수 후 회사의 ‘재무구조에 변경을 가져오는 구체적인 장래 계획’은 수립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 10월 30일 고려아연이 유상증자 증권신고서를 제출하며 첨부한 기업실사보고서에 따르면 모집주선회사 미래에셋증권은 지난 10월 14일부터 10월 29일까지 고려아연 기업실사를 진행했다. 실사 개시일이 지난 10월 14일인 점을 고려하면 최 회장 측은 최소한 정정 공개매수신고서를 제출한 지난 10월 11일부터 유상증자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으로 금감원은 의심한다. 사실이라면 대항 공개매수가 이뤄지고 있는 시기에 “주주 돈으로 빚을 갚는” 유상증자를 계획한 셈이다.

고려아연 측은 “지난 10월 14일부터 미래에셋증권이 한 일은 자사주 공개매수에 따른 차입금 처리를 위한 부채 조달 실사였다”며 “당시 결과를 유상증자 실사에도 활용하면서 신고서에 착오 기재가 됐다”고 해명했다. 이 해명이 맞다면 고려아연은 지난 10월 23일 자사주 매입 기간이 종료된 뒤에야 유증 논의에 돌입해 일주일 만에 신고서까지 제출한 셈이다. 통상 유상증자 사전준비부터 실사, 신청서 작성까지는 1~2개월가량 걸린다.

민주당, 연내 상법 개정 처리 공식화

당장 유증이 막힌 고려아연은 ㈜한화 지분 매각과 자회사 대여금 조기 상환을 통해 5420억원의 자금 조달에 나섰다. 영풍·MBK파트너스 연합 측과의 지분 매수 경쟁 과정에서 발생한 차입금을 갚고, 재무 건전성을 높이기 위한 현금 확보 조치다. 고려아연 유증 파문은 정치권으로도 번졌다. 더불어민주당이 주주에 대한 기업 이사의 책임을 강화하는 ‘주주의 충실 의무 도입’ 등을 담은 상법 개정안의 연내 처리 방침을 공식화했다. 민주당이 추진하는 상법 개정안의 골자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와 총주주’로 확대하는 것이다.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 법안 처리에 협조하되, 주식시장 투명성 강화 등을 취지로 하는 상법 개정안을 연계해 통과시키겠다는 것이 민주당의 방침이다. 반면 국민의힘과 정부는 금투세 폐지를 추진하면서도 상법 개정에는 재계 부담 등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11월 6일 기자들이 ‘여당이 반대할 경우 단독 처리를 할 계획이 있는지’ 묻자 “충분히 설득하겠다. 반드시 관철할 의지를 갖고 있고 행동으로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김우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민간기업 경영에 매번 금융당국이 해결사로 나서면 또 다른 관치 논란이 일 수 있다”며 “여야가 형식에 얽매여 내용을 놓치지 않도록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최소한 주주 권익 보호 의무 신설 조항 등은 통과시켜 시장의 혼란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박주근 리더스 인덱스 대표는 “시장을 바라보는 주주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밸류업 분위기로 주가가 눌려 있는 등 허약한 지배구조를 가진 기업들은 앞으로도 사모펀드에 더 많은 경영권 공격을 받게 될 것”이라며 “이번 (고려아연) 사태를 계기로 기업가치 정상화와 체질 개선을 위한 한국식의 지배구조 해법을 찾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은성 기자 k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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