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보다 앞선 1만5000년 전 한반도에서 세계 최초로 벼농사를?
한국인은 오랫동안 쌀을 주식으로 삼아 왔다. 밥을 먹어야 힘이 난다는 뜻의 '밥심'이라는 단어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벼를 처음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충북 청주 소로리에서 발견된 볍씨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 볍씨들은 약 1만 5000년 전의 것으로 이전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던 중국의 볍씨보다 2000년 앞선다. 이는 세계 최초로 벼농사가 시작된 곳이 한반도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이 역사적인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 청주소로리볍씨 발굴 현장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최근에 쓰신 '벼 고고학 연구로 작물화 비밀을 밝힌 중국 과학의 힘'이라는 글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8월 30일 필자는 이렇게 시작하는 이메일을 받았다. 발신자는 조용구 충북대 식물자원학과 명예교수였다. 조 교수가 언급한 필자의 글은 지난 6월 동아사이언스 닷컴에 올린 연재 칼럼으로 벼농사의 기원을 밝힌 중국 과학자들의 '사이언스' 논문을 소개한 글이었다.
중국 양쯔강 일대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발굴된 벼의 '식물석'을 분석한 결과 1만 3000년 전부터 야생벼를 재배했고 1만 1000년 전부터는 순화벼를 재배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식물석이란 지하수의 실리카 성분(규산)이 침투해 화석화된 식물조직이다.
이게 맞다면 동아시아에서 벼가 순화(작물화)된 시기는 서아시아에서 보리와 밀이 순화된 시기와 비슷하다. 서아시아의 보리나 밀보다 짧게는 1000년에서 길게는 3000년 늦은 1만~8000년 전 벼가 순화됐다는 기존 시나리오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그렇게 감명 깊게 쓴 것 같지는 않은데...' 이런 생각을 하며 다음을 읽어보니 바로 본론이 나왔다. 조 교수와 동료 연구자들이 2024년 7월 국제학술지 '플랜츠(Plants)'에 발표한 '한반도에서 발굴된 최초의 순화된 청주소로리볍씨'라는 리뷰 논문을 알리기 위함이었다.(doi: 10.3390/plants13141948)
제목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청주소로리볍씨가 1만 5000년 전에 세계 최초로 한반도에서 벼농사를 시작했던 증거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위의 칼럼이나 2022년 출간한 작물 게놈 해독 정보를 바탕으로 순화 과정을 재구성한 책 '식물은 어떻게 작물이 되었나'에서 외면했기 때문이다.
'아니 한국 과학작가가 어떻게 한반도의 놀라운 발견을 언급조차 하지 않을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책을 쓸 때 20여 년 전(1998년과 2001년 두 차례) 발굴된 청주소로리볍씨를 넣을지 많이 고민했지만 결국 뺐다. 벼농사의 기원에 대해 필자가 읽은 과학 논문 수십 편 중어디에도 청주소로리볍씨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서야 식물학 분야의 국제 학술지에 얼굴을 내밀었다. 27쪽에 이르는 긴 리뷰 논문을 천천히 읽어봤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청주소로리볍씨가 세계 최초라는 주장이 굉장히 설득력이 높다는 것이다.
문득 '이분들은 그동안 뭘 하고 있다가 이제야 논문을 발표한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의문을 포함해 몇 가지 질문을 조 교수에게 보냈고 아무래도 직접 와서 발굴 현장도 둘러보고 자세한 얘기를 나누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제안에 청주로 향했다.
● 1만 5000년 된 볍씨가 발견된 곳
오송역에서 필자를 차에 태운 조 교수는 바로 소로리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조 교수는 청주소로리볍씨가 발견되고 20년이 넘은 지금에야 리뷰 논문이 나온 데에 대해 "1998년 이융조 교수님의 제안으로 볍씨의 DNA 분석을 맡았다"며 "그 뒤 내 연구에 바빠 미루고 있다가 2023년에 정년 퇴임을 하면서 자료를 모아 리뷰 논문을 썼다"고 설명했다.
2016년 세워진 청주소로리볍씨 기념탑 아래에서 두 노학자가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단법인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융조 이사장과 우종윤 원장이다. 두 사람은 충북대 역사교육과 스승과 제자 사이로 1998년과 2001년 발굴에 각각 책임자와 실무자로 참여했다. 잠시 얘기를 나눈 뒤 일행은 800m 떨어진 발굴 현장으로 이동했는데 실망스럽게도 현장은 잔디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올해 83세인 이 이사장은 여전히 활력이 넘쳐 발굴 현장에서뿐 아니라 한국선사문화연구원으로 이동하고 나서도 청주소로리볍씨에 대해 열변을 토해냈다.
신석기유적지에서 나온 고양가와지볍씨(약 5000년 전)와 충주조동리볍씨(약 6200년 전)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우 원장은 차분하게 발굴 당시 상황을 덧붙였다. 두 사람의 얘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1997년 오창산업단지(당시 충북 청원군) 조성 사전 조사를 하던 중 소로리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당시 논이었던 소로리 A지구를 맡은 이융조 충북대 교수팀은 6개월의 조사 끝에 토탄층에서 탄화된 볍씨 12개를 찾았고 3년 뒤 진행된 2차 발굴에서도 6개를 찾았다.
토탄층은 산소가 부족해 부패와 분해가 완전히 되지 않은 식물의 유해가 진흙과 함께 퇴적한 지층이다. 이들은 식물학자인 허문회 서울대 교수와 박태식 국립식량과학원 농업연구원 연구관, 서학수 영남대 교수, 조용구 충북대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고 이 가운데 일부가 순화된 벼라는 답을 얻었다.
아울러 시기를 추정하는 확실한 방법인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위해 전문기관인 미국의 지오크론랩과 미국, 일본, 한국 등 저명한 연구소에 1차 발굴에서 볍씨가 나온 토탄과 볍씨 시료를 보냈고 약 1만 5000년 전의 것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 낟알을 일부러 떼어 낸 흔적에 주목
이융조 교수는 2003년 6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5회 세계 고고학대회(WAC-5)에서 이 결과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고 마침 학회를 취재하고 있던 영국 방송사 BBC의 기자가 기사화하면서 전 세계도 이 사실에 관심을 갖게 됐다.
대학 교재로 널리 쓰이는 콜린 렌프류와 폴 반의 'Archaeology(한글판 제목은 '현대 고고학의 이해')' 4판이 2004년 나왔는데 여기에 1만 5000년 된 청주소로리볍씨가 세계 최초 순화벼로 소개됐다. 이전 3판까지는 1만 1000년 된 중국 볍씨가 있던 자리였다.
아쉽게도 여기까지였다. 필자가 읽은 벼농사의 기원에 대한 논문들 어디에도 청주소로리볍씨가 언급되지 않는 이유다. 사실 '현대 고고학의 이해'에서도 연대 결정법을 다루는 4장 말미의 지도와 표에 나온 게 전부로 정작 농업의 기원을 다룬 7장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연대 측정으로 확인한 1만 5000년 전 볍씨의 존재만으로는 부족했던 걸까.
그런데 리뷰 논문을 보면 볍씨 가운데 일부가 재배벼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나온다. 박 연구관이 진행한 소지경(작은 자루) 형태 분석이다. 소지경은 낟알과 벼 이삭 지경을 연결하는 부분을 말한다. 야생벼는 낟알이 성숙하면 소지경에서 쉽게 떨어져 흩어지는데 이를 '탈립성이 크다'고 말한다. 그래야 자손을 널리 퍼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농부는 낟알이 익어도 매달려 있어야, 탈립성이 작아야 수고를 덜면서도 온전히 수확할 수 있다. 따라서 순화 과정에서는 탈립성이 작은 변이 개체를 선별해 재배하는 게 중요하다.
청주소로리볍씨에서 소지경 분석이 가능한 13개 볍씨는 매끄럽게 탈립된 것이 9개, 소지경이 붙어 있는 게 2개, 낱알과 소지경 사이 탈리층 표면이 거친 게 2개로 확인됐다. 9개는 야생벼이고 4개는 재배벼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성숙한 낟알이 붙어 있는 이삭을 수확한 뒤 인위적으로 떼어내면(탈곡) 소지경이 잘리거나 우연히 탈리층이 잘리더라도 야생과 달리 표면이 매끄럽지 않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발굴지에서 낟알을 떼어낼 때 쓴 것으로 보이는 홈날연모(석기)도 나왔다. 따라서 청주소로리볍씨는 벼의 순화 과정 초기 야생벼와 순화벼가 혼재된 상태로 재배한 증거로 볼 수 있다.
● 청주소로리볍씨가 인정받으려면
연대 측정과 형태 분석 결과에도 1만 5000년 전 이미 한반도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었다는 게 널리 인정받지 못하는 건 기존 학계의 보수성(또는 신중함) 때문이다. 가령 1만 5000년 전 벼농사를 지었다면 그 이전부터 한반도에 야생벼가 자생했다는 말인데 순화벼의 조상인 야생벼는 아열대 식물이라 오늘날 중국 남부와 동남아, 남아시아에서만 보인다.
기후변화를 봐도 1만 5000년 전에는 지금보다 따뜻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조 교수는 "금강 지류 하천인 미호강 주변은 과거 습지였을 것"이라며 "소로리 유적에서 주로 벼과 식물과 숙주 관계인 딱정벌레류가 나온 것이 강력한 증거"라고 덧붙였다. 겨울만 날수 있다면 벼가 자라기 좋은 조건이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유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1만 5000년 전 한반도에 벼가 자생했거나 재배된 건 확실하다. 결국 이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반도에서 세계 최초로 벼농사가 시작됐다는 게 정설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게 가능할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추가 발굴로 충분한 볍씨를 찾아내 형태 분석에서 통계적 확실성을 높이고 아울러 DNA를 추출해 게놈을 해독한 뒤 오늘날 야생벼 및 순화벼의 게놈 데이터와 비교 분석하는 것이다. 탈립성 감소를 비롯해 순화된 벼의 특성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변이가 꽤 알려져 있으므로 당시 볍씨의 일부가 진짜 순화 초기 단계인지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추가 발굴 가능성에 대해 이융조 이사장은 "2012년과 2018~19년 발굴지의 토탄층 시추조사를 통해 벼의 규소체를 확인했다"며 "여건을 만들어 추가 발굴을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청주시는 2015년 청주소로리볍씨를 형상화한 시 로고를 채택하고 이듬해 세계최고볍씨 기념탑을 준공하는 한편 현재는 소로리에 청주선사박물관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소로리가 벼농사 기원지로 널리 인정받을 수 있게 뒷받침할 추가 발굴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도 추가 발굴에 대한 예산지원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 재래종과 잡초벼 한반도 벼농사 역사 밝힐까
물론 발굴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1만 5000년 전 한반도 벼농사를 입증할 수 있다. '식물은 어떻게 작물이 되었나' 집필을 준비하며 필자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일제 강점기 일본 농학자들이 한반도에서 수집한 재래종이 5623가지나 된다는것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수확량이 많은 일본 품종에 점차 밀려났고 해방 뒤에도 수확량이 월등한 상업 품종이 들어오면서 1970년대 재래종은 논에서 자취를 감췄다.
불행 중 다행으로 농업유전자원센터 종자은행에 재래종 벼 450여 가지의 종자가 보관돼 있다.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에 있는 우보농장의 이근이 대표는 이 가운데 200여 가지의 종자를 얻어 재배하며 재래종 벼 보급에 힘쓰고 있다. 필자는 2021년 가을 우보농장을 찾았는데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먼저 재래종의 다양성이 꽤 크다는 점이다. 사각형 논에 1~2m 폭으로 한 품종씩 심었는데 이삭의 색이나 생김새가 제각각이었고 벼의 키도 꽤 차이가 났다. 특히 '붉은메'라는 재래종은 적갈색 낟알 끝에 꽤 뻣뻣해 보이는 긴 까락(까끄라기)이 달려있었다.
원래 까락은 야생벼의 특징으로 순화벼는 까락이 없거나 퇴화해 짧다. 주류 이론에 따르면 한반도에 벼가 전해진 건 약 3500년 전 중국어를 쓰는 청동기인들이 한반도에 유입되면서다. 이때 들어온 벼가 각 지역에서 재배되며 이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했다는 게 솔직히 믿기 어려웠다.
다음으로 앵미라고 부르는 잡초벼의 존재였다. 우보농장에서 취재 겸 벼 베기 체험을 했는데 수확한 벼를 탈곡하려고 옮기다 보니 잡초가 섞여 있었다. 그런데 벼처럼 낟알이 달려있고 쉽게 떨어졌다. 이 대표는 "이것이 앵미로 골치 아픈 존재"라고 설명했다.
수확한 벼에 섞이면 완전히 제거하기가 어려워 탈곡한 쌀의 품질을 떨어뜨린다. 설사 탈곡 과정에서 100% 없앤다고 해도 논에 떨어진 낟알이 이듬해 발아하므로 또 섞인다. 게다가 벼라 제초제에도 안 죽는다.
잡초벼라는 이름처럼 앵미는 야생벼와 순화벼 사이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앵미 역시 종류가 무척 다양해 야생벼에 아주 가까운 것에서부터 순화벼와 비슷한 것까지 분포한다. 필자가 본 것은 낟알 탈립성의 관점에서는 중간쯤일 것이다. 주류 이론에 따르면 앵미 역시 3500년 전 한반도에 벼가 들어올 때 딸려왔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조 교수는 한반도 재래종과 잡초벼를 주목하고 있다. 여기서 보이는 놀라운 다양성은 3500년 전 중국에서 온 벼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1만 5000년 전 청주소로리볍씨와 어쩌면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한반도에 자생한 야생벼와 순화벼에서 비롯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에도 발견되고 있는 잡초벼는 한반도 고대 벼의 야생형 후손 벼로서 자연에서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유지돼 왔다는 하나의 증거로 고려할 수있다"고 말했다. 그는 "동료인 김미선 박사와 함께 재래종과 잡초벼를 몇 가지씩 골라 본격적인 게놈 해독을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여기서 얻은 데이터를 기존에 발표된 벼 게놈 데이터와 비교해보면 기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벼들의 게놈이 기존에 알려진 벼 게놈 범위 내에 들어간다면 3500년 전 유입된 벼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 범위를 벗어나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한반도에 자생한 벼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 1만 5000년 전 한반도에서 벼농사를 지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인 셈이다.
● 벼농사의 다중 기원론… 후속 발굴 연구에 기대
설사 청주소로리볍씨가 1만 5000년 전 벼농사의 증거로 널리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이게 곧 한반도가 벼농사의 기원임을 뜻하는 건 아니다. 그저 벼농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거일 뿐이다.
"중국의 저명한 고고학자인 엄문명 교수는 벼농사의 다중기원론을 주장했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벼농사가 시작됐다는 것이죠. 제 입장이기도 합니다."
26년 전 청주소로리볍씨 발굴과 연구를 이끈 이 이사장은 이런 뜻밖의 말을 했다. 고고학의 다른 발견도 그렇지만 벼농사의 기원 역시 가장 오래된 발굴지의 시기를 뜻하는 것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중국 어딘가에서 청주소로리볍씨보다 더 오래된 볍씨가 나올 수도 있고 청주 소로리볍씨가 발굴된 토탄층 밑에서 이보다 더 이른 볍씨가 발굴될 가능성도 크다.
"청주소로리볍씨를 발굴하고 26년 만에 그동안의 연구를 종합한 리뷰 논문이 식물학 분야의 학술지에 실렸다는 건 정말 의미가 큽니다. 앞으로 후속 발굴과 관련 연구가 이어져 1만 5000년 전 한반도에서 벼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 받기를 바랍니다."
취재를 마치고 한국선사문화연구원 문을 나서며 혹시 '식물은 어떻게 작물이 되었나' 2쇄를 찍게 된다면 벼를 다룬 1장을 대폭 수정해 청주소로리볍씨를 자세히 소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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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주=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김태희 기자 kangsukki@gmail.com,taeh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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