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짐 뿜뿜’ 좋지만 길고 깊게 읽기…이해·소통이 사유의 성장 이끌어
텍스트 힙의 빛과 그림자
한강 노벨 문학상 맞물린 ‘텍스트 힙’
읽고 쓰고 토론하는 분위기 확산
지난달 10일(현지시각)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한강 작가가 선정된 뒤 오랜만에 책을 사거나, 다시 책을 잡거나, 글을 쓰거나, 독서 모임에 가입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가을바람처럼 텍스트에도 솔솔 바람이 부는 듯하다. 이런 바람이 ‘텍스트 힙’(Text hip) 열풍으로 이어질지에 관심이 쏠린다. ‘텍스트 힙’은 ‘글·문자’(text)와 ‘최신 유행에 밝은·멋진’(hip)이란 뜻의 영어 단어를 합친 신조어다.
하지만 이런 ‘텍스트 힙’ 바람과 함께 ‘텍스트 문해력 논란’이 공존하는 게 현실이다. ‘금일’을 ‘금요일’로 오해하거나, ‘사흘’을 ‘4일’로 착각하기도 한다. 시민들이 텍스트와 함께하는 현장을 찾아보고, ‘텍스트 힙’이 한때 유행 같은 열풍이 아니라 지속적인 순풍을 타기 위한 대안도 찾아보자.
청계천·광장·문화센터·독서모임
지난달 26일 토요일 오후 서울 청계천 ‘책 읽는 맑은 냇가’. 잔잔히 흐르는 냇가에서 삼삼오오 책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곳에선 책을 갖고 오지 않더라도 빌려서 읽을 수 있다. 서울시 직영 서울도서관에서 다양한 책을 대출해준다. 서울도서관이 서울광장, 청계천, 광화문광장 등 3곳에서 운영하는 ‘서울야외도서관’(올해는 11월10일까지, 매주 목~일요일) 중 하나다.
책 대출 아르바이트를 하는 황성하씨는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를 제일 많이 빌려 가고 있어요. 평일에는 직장인이 많이 찾고, 주말에는 연인들이나 아이와 함께 오는 부모들이 많죠. 외국인들도 한강 작가의 번역본을 많이 찾아요”라고 했다. “청계천에 그냥 놀러 오시는 분도 많지만, 옆에 책이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것 같아요. 다들 ‘책 진짜 오랜만에 읽는다’는 말씀을 많이 하세요.”
광화문 책마당에선 고석윤(45·회사원)씨는 아내와 딸과 함께 책을 읽고 있었다. 고씨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온라인으로 구매했는데 일주일이 넘었지만 아직 받지 못했다”고 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도 갔는데, 한강 작가 책 대부분이 품절됐더라고요. 그래서 이곳을 찾았어요. 무엇보다 책을 이렇게 편하고 쉽게 읽을 수 있는 게 아이한테 좋은 거 같아요.” 고씨의 아내는 “딸이 어렸을 때부터 책에 관심을 보였어요. 딸에게 책을 같이 읽어주는 엄마가 되기 위해 저도 책을 읽다 보니 딸과 함께 책을 읽고, 책을 좋아하게 됐죠”라고 했다. 딸은 “오늘 책 다섯권을 읽었다”며 손가락 다섯개를 쫙 펴며 웃었다.
같은 날 오전 교육기관인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장르 소설 기획하기’ 강좌를 수강하는 이소이(45·습작생)씨는 “텍스트와 종이책이 주는 느낌을 참 좋아해요. 책을 좋아하니 자연스럽게 뭔가 창작도 하고 싶었죠. 하지만 육아로 글을 쓸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어요. 이젠 아이들이 다 커서 창작에 도전하려고 해요”라고 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는 ‘한강 작가 작품 함께 읽기’라는 새 강좌도 마련했다. 한국 문학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8명의 평론가와 함께 한강 작가의 작품 세계를 알아가는 프로그램이다. 이 강좌를 기획한 하혁진 문학평론가는 “많은 사람이 한강 작가의 책을 ‘사겠지만’ 누구나 그의 작품을 ‘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강 작가의 수상이 불러온 독서 열풍이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흐름으로 이어지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입니다”라며 기획 의도를 밝혔다.
유튜브 대신 북토크 찾은 회사원들
텍스트를 읽는 것도 쉽지 않은데, 직접 글을 쓰려는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사람은 원래 스토리(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런데 이전에는 소설·시처럼 글쓰기에도 구분이 지어져 있었고, 이런 분야에서 글을 쓰고 인정을 받으려면 ‘등단’이라는 과정도 거쳐야 했죠. 하지만 요즘은 웹소설·웹툰같이 다양한 장르가 나오면서 글쓰기에 전통적인 구분이 사라졌어요. 등단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고요. 더 많은 이들이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거죠”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만인의 만인에 대한 글쓰기’가 되면서 이야기의 품질을 평가하기는 어려워졌어요. 예컨대 조회수가 높다고 좋은 글이라고 평가하기 힘들죠”라고 덧붙였다.
지난달 30일 저녁 8시 무렵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독서토론모임 트레바리 강의실엔 회사 일을 마치고 온 회사원 열댓명이 모였다. 트레바리에서 이날 연 북토크 ‘중간 관리자의 리더십’에 참가하는 사람들이다. 북토크 모임장을 맡은 정다정 인스타그램 상무에게 모임을 만든 이유를 물어봤다. 정 상무는 “같은 책을 읽더라도 다른 사람 생각을 듣다 보면, 내가 책에서 읽은 것 이상으로 인사이트를 받을 때가 있죠. 책을 읽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책을 통해 소통하고, 그 소통을 통해 중간 관리자가 겪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었어요”라고 했다.
이날 북토크에 참가한 주영태 엔에이치엔 에듀(NHN EDU) 팀장은 “유튜브는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자극적인 콘텐츠가 많아 깊이 있게 뭔가 배운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어요”라며 북토크 방식의 교육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게다가 유튜브는 한 방향이잖아요. 필터링 되지 않는 콘텐츠도 많죠. 반면 책을 읽고 토론하다 보면 제 생각을 바로잡을 수도 있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점이 좋아요. 혼자라면 사 놓고도 안 볼 많은 책을 모임에 참석하면서 읽게 됐죠.”
이유진 트레바리 팀장은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뒤 회원분들이 국내외 문학 작품에 관심 폭을 넓히는 모습이 눈에 띄게 있어요”라고 했다. 또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면서 타인의 생각을 경험하고, 내 안의 편견이나 한계를 부수고, 동시에 내 생각에 공감해줄 누군가를 만나는 동질감이 좋다는 말을 자주 듣고 있어요”라고 했다.
책 읽는 공간과 분위기까지 함께 소비
동서양을 막론하고 책은 오랫동안 권력 집단의 전유물이었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이어서 일반 사람은 책을 만지기조차 힘들었다. 근세에 와서는 지식인들이 책을 향유했다. 그러나 교육의 문턱과 문맹률이 높고 지식과 교양이 여전히 일부 특권계층에 한정됐던 까닭에 대다수 보통 사람들에게 책은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았다. 내용이 난해한 책은 글자를 알아도 이해할 수 없었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이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웬만한 도전정신 없이는 읽기가 힘들다. 책이 귀하던 시절 유럽 귀족들은 소리내어 낭독하며 책을 향유했다. 지금은 당연시하는 묵독은 당시만 해도 유령의 느낌을 주던, 그런 시절이었다.
근대 들어 인쇄술의 발달과 보편적 교육의 확대에 힘입어 보통 사람도 책·신문·잡지 같은 텍스트와 친해질 수 있었다. 종이 위의 텍스트는 정보·지식·오락에서 가장 중요한 전달 수단이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은 지식 정보를 담고 공유하며 전달하는 미디어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활자 텍스트의 영향력과 위상은 영화와 텔레비전에 서서히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스마트폰은 그 속도를 가속했다. 유튜브와 함께 넷플릭스 등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나오면서 종이는 점점 더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런 종이 위의 텍스트가 다시 떠오른 건, 역설적으로 스마트폰과 동영상이었다. 4월 걸그룹 뉴진스의 신곡 ‘버블 검’ 뮤직비디오에서 멤버 민지가 미국 작가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를 읽는 모습이 나오자 책 판매량이 8배 뛰었다. 걸그룹 아이브의 멤버 장원영은 5월 유튜브 방송에서 “최근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라는 책을 읽었어요. 쇼펜하우어는 염세적인데 그런 모습에서 오히려 위로받을 때가 있어요”라고 했다. 이 책은 올 상반기 교보문고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1위까지 올랐다.
이처럼 유명인이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고 1020세대(10~20대 연령층)가 이를 따라 책을 사면서 ‘텍스트 힙’은 사람들 사이에 회자했다. 결정타는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었다. 그동안 책을 놓고 있던 많은 이에게 다시 종이 위의 텍스트를 읽게 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지난달 26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만난 시민 정애숙(62)씨는 “1020세대와 연예인이 에스엔에스(SNS)에 책을 읽는 사진을 많이 올리고 있는데요. 1020세대는 독서를 재미와 놀이처럼 여기면서 텍스트와 친해지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표정훈 평론가는 “‘텍스트 힙’이 한때의 유행 같지는 않지만 더 확산할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요즘은 ‘읽는다’는 게 엄숙한 행위가 아니라는 식으로 인식의 지평이 확장됐어요. 물질로서의 책을 소비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책을 읽는 공간과 그 분위기를 함께 소비하고, 에스엔에스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도 특징적이죠. 지난 6월에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는 20·30대 젊은 여성들이 굉장히 많이 찾아왔어요. 출판계에선 ‘이 독자들이 어디에 있었던 거냐’며 놀랄 정도였죠”라고 했다.
물론 이런 분석에는 다른 시각도 있다. 청예 작가는 “사실 ‘텍스트 힙’이란 말을 들으면 조금 웃음이 나요. 텍스트를 좋아하는 사람은 늘 있었는데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이후 갑자기 뭔가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텍스트는 ‘힙’하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아요. 늘 우리 곁에 있는데도 관심을 못 받은 것뿐이죠”라고 했다.
텍스트와 만날 때 ‘출렁거림’ 있어야
‘텍스트 힙’ 바람과 함께 ‘텍스트 문해력 논란’은 공존한다. 세로로 서 있는데 왜 ‘가로등’이냐고 물어보는 학생,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을 ‘시장에 가면 반찬이 많다’고 이해하는 학생, 교사가 말한 ‘사건의 시발점’을 두고 “왜 욕을 하시느냐”고 따지는 학생…. 지난 9월 한글날을 앞두고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교사 5848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사례다. 이 밖에도 ‘이부자리를 별자리로 생각한다’, ‘고가 다리는 비싸게 만든 다리라고 한다’는 사례도 있었다. 이 설문조사에서 교사의 91.8%가 학생의 문해력이 과거보다 떨어졌다고 답했다. 그 원인으로 스마트폰·게임 등 디지털 매체 과사용(36.5%)을 1순위로 꼽았다. 이어 독서 부족(29.2%), 어휘력 부족(17.1%), 지식 습득 교육 부족(13.1%) 등을 들었다.
이남희 작가는 문해력 저하 현상을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물에 돌멩이를 던지면 물이 출렁거리잖아요. 반면에 물에 바가지를 던지면 둥둥 떠버리기만 하죠. 여기서 물은 ‘내 인식’이라고 생각해 봐요. 돌멩이는 ‘텍스트’, 바가지는 ‘휴대폰’이고요. 출렁거림이 있어야 문해력이 높아집니다. 즉 텍스트를 많이 접해야 문해력이 향상되고 사고의 폭이 넓어지는 거죠. 휴대폰은 문해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안 되는 바가지일 뿐이에요.”
다른 시각도 있다. 김진해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국어학)는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건 텍스트를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가치관에 집착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단어나 어휘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어요. 디지털 텍스트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어요. 디지털이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기’가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디지털 텍스트로 내 의견과 다른 사람의 의견을 실시간으로 비교할 수 있고, 예전보다 훨씬 자유롭고 평등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문해력 특강’이라는 책의 공저자인 정혜승 경인교육대 교수(국어교육과)는 “문해력은 ‘텍스트를 이해하고 생산하는 의사소통 능력’입니다. 독해력이나 어휘력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글을 읽고, 이해하고, 활용해 소통하는 능력이죠. 한 부분만 보지 말고 의사소통이라는 전체적인 면에서 논의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요즘 20대는 다른 세대에 견줘 더 많은 책을 읽고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4월 내놓은 ‘2023 국민 독서실태조사’를 보면, 지난해 성인 가운데 단 한권이라도 책을 읽은 사람의 비율을 뜻하는 종합독서율은 43%에 그쳤다. 1994년 이 조사를 한 이후 역대 최저다. 60살 이상 노년층 종합독서율은 15.7%로, 2021년 23.8%에 견줘 크게 줄었다. 반면 20대는 같은 기간 3.6%포인트 준 74.5%였다. 세대별로 보면 20대의 종합독서율이 가장 높았다.
한때 열풍 넘어 지속적 순풍 타려면
‘텍스트 힙’ 바람은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그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전문가들은 친밀감 표현, 충분한 시간, 즐거움 찾기, 사유와 공감 등을 꼽았다.
청예 작가는 “책을 읽는 모습을 에스엔에스에 올리면 ‘평소에 책도 안 읽으면서 올린다’는 반응을 자주 보게 돼요. 이런 비난은 자제하면 좋겠어요. 텍스트가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봐줘야 해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늘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독서하는 모습을 보일 때 ‘아, 저 사람은 책을 좋아하는구나!’ 같은 반응을 보여주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이남희 작가는 “뻔한 얘기 같지만, 읽고 쓰는 데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정·느낌·감상을 말로 해결하는 데서 더 나아가, 읽어보고, 써보고, 느껴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이렇게 텍스트와 친하게 지내면 이전에 몰랐던 사고의 폭이 넓어지게 되죠.”
김진해 교수는 “책 읽기의 목적은 ‘즐거움’이죠. 텍스트 읽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무협지든 삼류소설이든 만화책이든 뭐든 좋다고 봅니다. 마라톤을 즐기게 되면 10㎞·하프·완주 식으로 조금씩 늘려가듯, 책 읽기도 반복하다 보면 조금씩 눈높이가 올라가게 되죠”라고 했다. 그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제안하는 문해력 기르는 방법 두가지도 소개했다. 첫째, 전자책보다는 종이책. 둘째, 시험이 아닌 즐거움을 위해 읽기다.
정혜승 교수는 “텍스트 읽기를 ‘힙하다’고 여기는 현상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책벌레’로 평가절하하는 시각을 바꿀 수 있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면서도 “다만 일시적 유행으로 사라지거나, 텍스트를 장식적으로 ‘소비’하는 데서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한권이라도 깊이 읽고, 개인과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글로 정리한 뒤 여러 사람과 공유하면 사고의 성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개인의 경험들을 하나하나 쌓아 긍정적인 효능감을 만들어 나간다면 텍스트 친화적인 사회로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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