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만 보면 “당신과 키스하고 싶어요”…수시로 추파 던진 세계적인 경제학자 [히코노미]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11. 9.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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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코노미-8]“지금 당신과 키스하고 손을 잡을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얼마나 행복할까요.”

편지를 쓰는 내내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집니다. 불그스름한 연인의 입술이 생각나서였습니다. 다시 만년필을 꽉 쥐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상대방을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격정적인지를 글로써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침대를 바라보며 연인과 뒹구는 자기 모습을 상상합니다. 세상 그 어떤 커플보다 격렬히 사랑을 나눌 수 있을 텐데.

폴란드 화가 알렉산더 레서가 1837년 그린 누워있는 남성의 누드. 동성애를 묘사한 작품으로 통한다.
욕망이 절절히 묻은 편지를 받은 이는 화가 던컨 그랜트. 어쩐지 이름에서 남자의 향기가 묻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수신인도, 발신인은 모두 생물학적 남성. 두 사람이 동성 연인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편지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 남자의 이름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 1930년대 대공황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경제를 설계한 거물 경제학자. 그는 동시에 남성의 육체를 탐닉한 동성연애자였습니다. 수많은 남자와 잠자리를 한 뒤에 이를 일기장에 기록할 정도로 메모광이기도 했었지요.

성적으로, 학문적으로 자유로웠던 그는 세계 경제사의 물줄기를 바꿨습니다. 그가 살아온 삶, 그가 만든 세계를 탐색하는 시간입니다.

“내 삶은 그리 간단치는 않았다네.” 존 메이너드 케인스. 1933년.
개방적인 집안의 천재 소년
“케인스, 항상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렴.”

귀족이었으나, 허례허식과는 거리가 먼 집안. 케인스 가문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영국 사회 상류층이면서도 열린 분위기를 추구합니다. 케인스의 아버지 존 내빌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한 경제학자, 어머니 플로렌스 역시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 여성 사회운동가였습니다.

“케인스, 늘 이웃을 살펴보거라. ” 어머니 플로렌스 에이다 케인스.
부잣집에서 살면서도 언제나 낮은 곳을 살피던 사람들.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 굶고 있는 부랑자들을 살피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던 부부. 두 사람은 세 자녀에게도 사랑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요. 부모의 생각을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언제나 자녀의 생각을 물었고, 그 판단을 존중합니다.

횃불을 들고 고성을 지르며 끌고 가는 부모가 아니라, 촛불로 자녀가 나아가야 할 길을 조용히 밝혀주는 현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케인스는 부모라는 너른 울타리에서 자유롭게 뛰어놀았지요. 부모의 지능과 성품을 물려받은 덕분인지 그는 어디를 가나 두각을 드러냅니다. “학교의 그 어떤 소년보다 뛰어나다”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공부, 그게 제일 쉽더군.” 자유, 1908년 젊은 시절 20대의 케인스. [사진출처=런던국립초상화박물관]
보수적 사회의 진보 기지 케임브리지에 가다
1902년. 케인스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합니다. 부모가 다녔던 곳, 그래서 오랜 시간 꿈꾸던 곳이었습니다. 케임브리지는 보수적인 영국 빅토리아 사회에서도 단연 ‘자유로운 학풍’으로 유명했습니다. 옥스퍼드, 에든버러 등 다른 명문 학교들이 전통을 고수하는 반면, 케임브리지는 격식을 파괴하는 방식의 교육 철학으로 이름났지요.

학생과 교수가 자유롭게 토론하면서 때론 격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껄끄러운 주제인 종교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할 수 있었던 곳이 케임브리지였지요. 케인스의 성향과 너무나 닮은 조직이었습니다.

케인스가 수학한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킹스 칼리지. [사진출처=Andrew Dunn]
케임브리지언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케인스에게 한 제안이 들어옵니다. 예술·문학·정치에 대해 토론하는 지적 모임에 합류하라는 권유. 화가·소설가·학자 등 구성원 면면도 화려했습니다.

대문호 중 하나인 버지니아 울프나 E.M. 포스터도 이 모임에 속해있었습니다. ‘블룸즈버리 그룹’ 혹은 ‘케임브리지의 사도회’라고 불린 조직이었습니다. 케인스는 고민하지 않고 응했습니다. 수준 높은 지적 대화는 그에게 무엇보다 황홀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쾌락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지..” 소설가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
블룸즈버리 그룹이 지적으로만 자유로웠던 건 아닙니다. 모임원들은 성적으로도 시대가 규정한 규범을 가볍게 뛰어넘었습니다. 케인스는 같은 모임의 화가 던컨 그랜트를 비롯해 뭇 남성들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습니다. 화가 던컨은 또 다른 회원인 작가 리튼 스트레치와도 그렇고 그런 사이였죠.

난잡한 동성애 관계로 비칠 수 있겠지만, 블룸즈버리 내에서만큼은 어떤 도덕적 비난이 없었습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건 인간이 가진 당연한 권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성과만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하는 빅토리아적 관습을 블룸즈버리 그룹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자유와 욕망. 블룸즈버리 클럽이 지고의 가치로 삼던 것들이었습니다. 케인스는 동성 친구들과의 잠자리를 메모로 남겼을 정도입니다.

“오늘 피시앤칩스 먹을까. ” 던컨 그랜트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 1913년.
“케인스 우리 이래도 되는걸까. ” 던컨 그랜트의 자화상.
공직에 나선 괴짜 케인스
“인도에서 근무해보게.”

케인스의 뛰어난 경제 지식을 눈여겨보던 곳이 있었습니다. 영국 재무부였습니다. 1906년 영국 정부는 새내기 경제학자인 그를 고용 후 인도 사무국으로 파견합니다. 식민지 인도의 숱한 경제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라는 의도에서였습니다.

자유로운 품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양한 경제지식은 인도 반도에서도 빛났습니다. 케인스는 인도의 경제가 ‘금본위제’에 지나치게 묶여 있다고 진단합니다.

“케인스가 인도로 온다고?” 케인스가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일한 영 연방 인도사무소.
금본위제는 은행에서 국가가 발행한 화폐를 제시하면 금으로 바꿔주는 제도입니다. 바꿔말하면 정부가 화폐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정확히 그만큼의 금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금과 연결된 국가 화폐의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건 장점. 반면 정부는 금이 있어야만 화폐를 발행할 수 있기에 금융정책은 그만큼 발이 묶이게 되는 단점도 상존합니다.
“지폐는 자고로 금이 보증해야 한다네.” 금본위제를 공약한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 케인스는 금본위제가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많은 체제라고 봤다.
인도경제는 점점 커나가고 있었지만 덩치에 맞는 ‘금’이 존재하지 않았지요. 케인스는 금본위제의 모순을 ‘인도화폐와 재정문제(Indian Currency and Finance)’에 담았습니다. 케인스가 영국 경제학계의 주목을 받게 한 논문, 아니 작품이었습니다.
1차대전의 복판에 선 케인스
1914년 대영제국의 수도 런던은 분주합니다. 유럽이 전쟁의 화마에 휘말려서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막대한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재정 계획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 전쟁에 참전한 영국은 그 어느 때보다 경제지식에 목말랐습니다. 케인스가 런던으로 소환된 배경이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차관, 전시 국채 발행 등이 모두 케인스의 두뇌에서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군인이 총을 들고 전쟁할 때, 케인스는 주판을 튕기며 전장 한 가운데 섰습니다. 그가 1917년 바스훈장을 받게 된 이유였습니다. 케인스는 이제 영국 정부가 가장 신뢰하는 경제학자가 되었지요.

“여성도 전쟁에 이바지하라.”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포스터.
전쟁의 끝은 그러나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기어이 새로운 전쟁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승전국인 협상국(영국·러시아·프랑스·일본 등)은 프랑스 베르사유에 모입니다. 패전국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생각합니다. “독일은 언제나 전쟁을 꿈꿔왔다. 이참에 싹을 밟아놔야 한다.” 특히 보불전쟁(1870년)으로 독일에 의해 수도 파리가 점령당한 치욕을 당했던 프랑스가 극단적 분위기를 주도했습니다.

“사고를 쳤으면 이 정도 돈은 내야지. ”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베르사유 거울의 방에서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는 협상국 리더들에게 강조합니다. 독일의 전쟁배상금은 민간인 피해뿐만 아니라 협상국 군대 손실금을 아울러야 한다고.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배상 확정금은 330억달러. 케인스가 얘기한 15억달러에 비해 20배나 높은 숫자. 독일이 수십년간 예산을 모두 쏟아부어도 갚을 수 없는 금액. 사실상 정치적 보복에 가까웠던 ‘베르사유 조약’이었습니다.

“독일 놈들 혼 좀 내야 하지 않겠어?” 왼쪽부터 영국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이탈리아 수상 비토리오 올란도,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베르사유 조약’에 반기를 든 케인스
“강요된 평화는 언젠가 폭발한다.”

영국의 경제 관료 모두가 베르사유 조약에 침묵을 지켰습니다. 한 사람은 예외였습니다. ‘괴짜 천재’ 케인스였습니다. 그는 베르사유 조약이 몰고 올 파괴의 그림자를 먼저 포착합니다. “독일을 한 세대 동안 노예로 만들고, 수백만 명의 인간의 삶을 저하하고, 온 국민의 행복을 박탈하는 정책을 우리는 혐오해야 합니다.”

“이 돈을 어떻게 갚으란 말이냐. ” 독일 제국의회 앞에서 조약을 반대하는 시위.
그의 경제학은 오직 숫자와 논리로만 이뤄져 있지 않습니다. 숫자 너머 인간의 눈을 마주할 힘이 있었습니다. 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한 독일 국민의 비참함이 먼저 보였기 때문입니다.

조국에 실망한 그가 영국 재무부를 떠난 배경이었습니다. 학자로서 케인스는 보다 자유롭게 베르사유 조약을 비판하는 책을 펴냅니다. 명저 ‘평화의 경제적 결과(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였습니다.

케인스의 명저 ‘평화의 경제적 결과’.
배상금에 폭발한 독일...나치의 등장
냉철한 ‘비관’은 현실이었습니다. 독일 정부는 배상금을 갚느라 돈을 찍어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24시간 가동되는 지폐공장은 전 국민을 가난하게 만들었지요. 실물 생산에 기반하지 않는 지폐 공급은 엄청난 물가상승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빵 하나를 사기 위해 수레로 지폐를 나르는 비참한 현실.
“차라리 벽지로 쓰는 게 이득...” 1923년 독일. [사진출처=Bundesarchiv, Bild 102-00104 Pahl, Georg ]
시민의 불안을 먹고 성장한 정치인이 등장합니다.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베르사유 조약 폐기”를 주장하는 그는 독일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습니다. 자식이 굶는 모습을 봐야만 했던 부모들, 노부모를 몰래 내버렸던 자식들, 직업 없이 도시를 떠돌아야 했던 시민들이었습니다. 막대한 배상으로 경제가 무너진 도시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간 민중들이었습니다.

거악은 악인의 치기 어린 장난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이들의 사무친 원이 만든 증오의 사탑(斜塔)이었습니다. 케인스가 예견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독일이 벌인 2차 세계대전으로 총 5000만명이 사망합니다. 케인스의 경고를 받아들였다면, 소중한 삶은 계속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923년 독일의 500억 마르크 지폐.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
“베르사유 조약은 파기될 것이오. ” 아돌프 히틀러, 헤르만 괴링, 요제프 괴벨스.
대공황, 케인스를 소환하다
잊힌 이름 케인스. 그는 러시아 여성 리비아 로포코바와 결혼해 안정적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다시 소환된 건 1930년대였습니다. 미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적 공황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기업이 무너지고, 실업이 급증하는 악순환. 영국 재무부는 그의 지성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여보, 국가가 다시 나를 찾는구려.” 케인스와 아내 리디아 로포코바.
케인스는 다시 한번 기존의 관념을 뛰어넘습니다.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주문하면서였습니다. 대규모 공공사업으로 시민을 직접 고용해 그들에게 돈을 쥐어주라는 제언. 구매력을 갖춘 시민들이 있어야 소비가 이뤄지고 다시 기업이 산다는 명쾌한 해석이었습니다.

고용-소비-투자의 선순환 구조를 위해서라도 정부가 ‘고용’의 첫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경제학 교과서에 전혀 없던 내용이었지요.

‘시장이 장기적 균형을 맞출 것’이라 반박하는 경제학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응수합니다.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장기적으로는 우리 모두 죽는다).” ‘장기균형’을 기다리는 사이 시민들의 삶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는 비판이었습니다.

“밥, 아니 빵 좀 주시오. ” 대공황 시기 마피아 알 카포네가 연 구호식당 밖에 줄을 선 시민들.
1936년 그가 발표한 ‘고용, 이자 그리고 화폐의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은 전 세계 지도자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되었지요. ‘케인스 혁명’이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추진한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 ‘뉴딜’의 이론적 근거 역시 케인스로부터 나왔습니다.
“이제 정부가 시민을 고용하겠소. ” 화가 윌리엄 그로퍼의 댐 건설. 1939년 작품.
케인스는 죽었지만...그의 유산은 남았다
“나의 유일한 후회는, 더 많은 샴페인을 마시지 못한 것이네.”

1945년 8월, 포성은 멈췄으나 여전히 할 일은 많았습니다. 케인스는 1차 대전의 악몽이 다시 벌어지지 않게끔, 전후 경제 체제를 구상합니다. 경제의 불균형이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는 중재기관을 제안한 것도 케인스였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orld Bank) 설립이었습니다.

미국과 유럽을 수시로 오가는 삶. 과로가 겹친 탓인지, 그의 건강은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주변의 걱정에 그는 “샴페인이나 좀 더 마실걸”이라면서 유머를 잃지 않았지요.

“니들이 경제를 알아?” 헤리 덱스터 화이트 미국 재무장관과 대화를 나누는 케인스.
1946년 4월 21일 그가 눈을 감았습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는 추도식이 치러집니다. 국가 영웅급 장례식이었습니다. 같은 날 미국 워싱턴 국립대성당에서도 영결식이 열립니다. 미국과 영국 양국에서 존경받는 몇 안 되는 학자가 바로 케인스였던 셈입니다.

그의 가장 격렬한 비판자였던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말했습니다.“그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세상은 훨씬 가난했을 것입니다.”

“완전한 시장, 보이지 않는 손의 전능함은 인간의 꿈에서만 존재할지도 몰라.” 상념에 잠긴 케인스.
케인스의 유해는 고향 땅에 묻혀있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전 세계 경제체제에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1980년대 불어닥친 자유주의 바람으로 케인스주의를 향한 거센 비판이 일었습니다. 케인스주의는 흔들리되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굳건한 위용을 자랑합니다. 시장이 모든 걸 해결한다는 건 유토피아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국가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은 케인스주의라는 토지 위에 경제정책을 세웠습니다. 지적으로도 성적으로도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한 사내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입니다.

“여보, 나의 사상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케인스와 아내 리디아 로포코바를 묘사한 그림. [사진출처=런던국립초상화박물관]
<네줄요약>

ㅇ정부의 적극적 공공정책으로 경제살리기를 주문한 경제학자 케인스는 성적으로도 자유로운 동성애자였다.

ㅇ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는 동성애를 옹호한 블룸즈버리 클럽 회원이기도 했다.

ㅇ지적으로도 자유로웠던 그는 기존 경제학 교과서에 없는 다양한 경제정책을 주문했고, 베르사유 조약이 히틀러와 같은 악마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ㅇ세계경제는 여전히 그의 이론에 기반해 있다.

<참고문헌>

ㅇ존 메이너드 케인스, 평화의 경제적 결과, 부글북스, 2016년

ㅇ니컬러스 웝숏, 케인스 하이에크-세계경제와 정치 지형을 바꾼 세기의 대격돌, 부키, 2014년

‘경제’는 맛보기에 어려운 식재료입니다. 채권, 이자, 화폐라는 단어만 들어도 쓴맛이 올라옵니다. 맛있게 즐기려면 ‘역사’라는 양념이 필요합니다. 역사(히스토리)와 경제(이코노미)를 결합한 연재물 ‘히코노미’는 먹음직한 요리를 내는 걸 목표로 합니다. 격주로 여러분의 경제 근육을 키워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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