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만 보면 “당신과 키스하고 싶어요”…수시로 추파 던진 세계적인 경제학자 [히코노미]
[히코노미-8]“지금 당신과 키스하고 손을 잡을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얼마나 행복할까요.”
편지를 쓰는 내내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집니다. 불그스름한 연인의 입술이 생각나서였습니다. 다시 만년필을 꽉 쥐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상대방을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격정적인지를 글로써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침대를 바라보며 연인과 뒹구는 자기 모습을 상상합니다. 세상 그 어떤 커플보다 격렬히 사랑을 나눌 수 있을 텐데.
편지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 남자의 이름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 1930년대 대공황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경제를 설계한 거물 경제학자. 그는 동시에 남성의 육체를 탐닉한 동성연애자였습니다. 수많은 남자와 잠자리를 한 뒤에 이를 일기장에 기록할 정도로 메모광이기도 했었지요.
성적으로, 학문적으로 자유로웠던 그는 세계 경제사의 물줄기를 바꿨습니다. 그가 살아온 삶, 그가 만든 세계를 탐색하는 시간입니다.
귀족이었으나, 허례허식과는 거리가 먼 집안. 케인스 가문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영국 사회 상류층이면서도 열린 분위기를 추구합니다. 케인스의 아버지 존 내빌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한 경제학자, 어머니 플로렌스 역시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 여성 사회운동가였습니다.
횃불을 들고 고성을 지르며 끌고 가는 부모가 아니라, 촛불로 자녀가 나아가야 할 길을 조용히 밝혀주는 현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케인스는 부모라는 너른 울타리에서 자유롭게 뛰어놀았지요. 부모의 지능과 성품을 물려받은 덕분인지 그는 어디를 가나 두각을 드러냅니다. “학교의 그 어떤 소년보다 뛰어나다”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학생과 교수가 자유롭게 토론하면서 때론 격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껄끄러운 주제인 종교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할 수 있었던 곳이 케임브리지였지요. 케인스의 성향과 너무나 닮은 조직이었습니다.
대문호 중 하나인 버지니아 울프나 E.M. 포스터도 이 모임에 속해있었습니다. ‘블룸즈버리 그룹’ 혹은 ‘케임브리지의 사도회’라고 불린 조직이었습니다. 케인스는 고민하지 않고 응했습니다. 수준 높은 지적 대화는 그에게 무엇보다 황홀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난잡한 동성애 관계로 비칠 수 있겠지만, 블룸즈버리 내에서만큼은 어떤 도덕적 비난이 없었습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건 인간이 가진 당연한 권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성과만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하는 빅토리아적 관습을 블룸즈버리 그룹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자유와 욕망. 블룸즈버리 클럽이 지고의 가치로 삼던 것들이었습니다. 케인스는 동성 친구들과의 잠자리를 메모로 남겼을 정도입니다.
케인스의 뛰어난 경제 지식을 눈여겨보던 곳이 있었습니다. 영국 재무부였습니다. 1906년 영국 정부는 새내기 경제학자인 그를 고용 후 인도 사무국으로 파견합니다. 식민지 인도의 숱한 경제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라는 의도에서였습니다.
자유로운 품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양한 경제지식은 인도 반도에서도 빛났습니다. 케인스는 인도의 경제가 ‘금본위제’에 지나치게 묶여 있다고 진단합니다.
미국으로부터 차관, 전시 국채 발행 등이 모두 케인스의 두뇌에서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군인이 총을 들고 전쟁할 때, 케인스는 주판을 튕기며 전장 한 가운데 섰습니다. 그가 1917년 바스훈장을 받게 된 이유였습니다. 케인스는 이제 영국 정부가 가장 신뢰하는 경제학자가 되었지요.
그들은 생각합니다. “독일은 언제나 전쟁을 꿈꿔왔다. 이참에 싹을 밟아놔야 한다.” 특히 보불전쟁(1870년)으로 독일에 의해 수도 파리가 점령당한 치욕을 당했던 프랑스가 극단적 분위기를 주도했습니다.
독일의 배상 확정금은 330억달러. 케인스가 얘기한 15억달러에 비해 20배나 높은 숫자. 독일이 수십년간 예산을 모두 쏟아부어도 갚을 수 없는 금액. 사실상 정치적 보복에 가까웠던 ‘베르사유 조약’이었습니다.
영국의 경제 관료 모두가 베르사유 조약에 침묵을 지켰습니다. 한 사람은 예외였습니다. ‘괴짜 천재’ 케인스였습니다. 그는 베르사유 조약이 몰고 올 파괴의 그림자를 먼저 포착합니다. “독일을 한 세대 동안 노예로 만들고, 수백만 명의 인간의 삶을 저하하고, 온 국민의 행복을 박탈하는 정책을 우리는 혐오해야 합니다.”
조국에 실망한 그가 영국 재무부를 떠난 배경이었습니다. 학자로서 케인스는 보다 자유롭게 베르사유 조약을 비판하는 책을 펴냅니다. 명저 ‘평화의 경제적 결과(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였습니다.
거악은 악인의 치기 어린 장난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이들의 사무친 원이 만든 증오의 사탑(斜塔)이었습니다. 케인스가 예견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독일이 벌인 2차 세계대전으로 총 5000만명이 사망합니다. 케인스의 경고를 받아들였다면, 소중한 삶은 계속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용-소비-투자의 선순환 구조를 위해서라도 정부가 ‘고용’의 첫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경제학 교과서에 전혀 없던 내용이었지요.
‘시장이 장기적 균형을 맞출 것’이라 반박하는 경제학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응수합니다.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장기적으로는 우리 모두 죽는다).” ‘장기균형’을 기다리는 사이 시민들의 삶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는 비판이었습니다.
1945년 8월, 포성은 멈췄으나 여전히 할 일은 많았습니다. 케인스는 1차 대전의 악몽이 다시 벌어지지 않게끔, 전후 경제 체제를 구상합니다. 경제의 불균형이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는 중재기관을 제안한 것도 케인스였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orld Bank) 설립이었습니다.
미국과 유럽을 수시로 오가는 삶. 과로가 겹친 탓인지, 그의 건강은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주변의 걱정에 그는 “샴페인이나 좀 더 마실걸”이라면서 유머를 잃지 않았지요.
그의 가장 격렬한 비판자였던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말했습니다.“그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세상은 훨씬 가난했을 것입니다.”
모든 국가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은 케인스주의라는 토지 위에 경제정책을 세웠습니다. 지적으로도 성적으로도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한 사내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입니다.
ㅇ정부의 적극적 공공정책으로 경제살리기를 주문한 경제학자 케인스는 성적으로도 자유로운 동성애자였다.
ㅇ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는 동성애를 옹호한 블룸즈버리 클럽 회원이기도 했다.
ㅇ지적으로도 자유로웠던 그는 기존 경제학 교과서에 없는 다양한 경제정책을 주문했고, 베르사유 조약이 히틀러와 같은 악마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ㅇ세계경제는 여전히 그의 이론에 기반해 있다.
<참고문헌>
ㅇ존 메이너드 케인스, 평화의 경제적 결과, 부글북스, 2016년
ㅇ니컬러스 웝숏, 케인스 하이에크-세계경제와 정치 지형을 바꾼 세기의 대격돌, 부키,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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