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 자연의 경이로움과 평화…‘꿈결 같던 공존’ 감동
남극을 떠나오며
칼바람 맞으며 식생·대기 관측
땅속 촘촘히 온습도 센서 매설…
모험·상상력·호기심 가슴에 품고
월동 대원·펭귄들과 아쉬운 작별
중국 장성기지에서 돌아와 아빠에게 사진과 자랑이 담긴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었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중에서야 아빠가 쓰러졌다고 엄마가 전해주었다. 걱정할까봐 가족 모두 말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휴게실 전화기로 집에 연락했다. 극지연구소가 인천에 있기에 세종기지의 발신번호도 ‘032’였다. 나는 엄마가 오해할까봐 그 사실부터 해명했다. 나는 여전히 거기서 1만3204킬로미터 떨어진 남극이라고. 다행히 빨리 입원 치료를 받아 고비는 넘겼지만 아직 불안한 상황이라고, 엄마는 전했다.
당장은 누구에게 말하고 싶지도 않아서 드라이랩에 틀어박혀 노트북만 들여다보는데 카밀라 언니가 들렀다. 언니 얼굴을 보자 “아빠가 쓰러지셨대요” 하는 말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언니는 놀랐을 나를 걱정하더니 “사실 그래서 과학자들도 출장 때마다 부모님을 꼭 뵙고 와” 하고 말했다. “다들 이제 부모님들 나이가 있으시니까.” 우리는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훈련을 받고 부산역에서 남극에 간다고 알렸을 때 전화기 너머로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하던 아빠가 떠올랐다. 혹시 불안 많은 아빠가 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건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들던 차에 언니가 그렇게 말하자 진정되었다. 나이 든 부모가 있다면 누구나 겪는 일이다. 그래서 아무 일도 아닌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감당할 만한 일인 것이다.
“박사님, 그 실험 언제 해요? 제가 같이 밤새워준다니까요?” 나는 화제를 바꿨다.
“다들 하라고 말만 하는데 작가님은 같이 하겠다고 하네.” 카밀라 언니가 웃었다.
언니는 대기의 관점에서 식생을 관측하는 실험을 구상 중이었다. 문제는 이를 위해 네 시간마다 한번씩 나가 관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서 쓱 보고 숫자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 식물 한 개체 한 개체에 돔을 씌워 기다렸다가 값을 재야 했다. 24시간 내내 남극의 칼바람을 맞으며 몇 시간씩 떨고 한밤에도 나가야 하는 매우 피곤한 일정. 게다가 기지 원칙상 2인1조로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 괜히 다른 사람 고생시킬까봐 언니는 망설이고 있었다. 결국 이튿날 언니는 고난의 실험을 해냈는데 그 파트너는 의리와 선량함과 이번 남극행으로 불타는 연구 의지까지 갖춘 엠 박사였다. 내가 따라나설까봐 실험은 비밀리에 시작됐고, 편안히 자고 일어나 보니 언니와 엠은 밤사이 대기관측동 옆에서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맹추위를 겪어낸 뒤였다.
귀국 뒤 그리움 진할 텐데…
“진짜 추워요.” 엠 박사의 핼쑥한 얼굴이 간밤의 고생을 생생히 전하고 있었다. 나는 왜 깨우지 않았냐고 서운함을 표한 뒤 오후 관측에 참여하겠다고 별렀다. 날은 흐리고 바람도 강했지만 출남극을 앞두고 바빠진 과학자들에게 당장 빌려 쓸 “고양이 손”이라도 되고 싶었다. 언니의 실험‘밭’에는 둥근 플라스틱으로 우스네아와 이끼 실험군이 표시되어 있었다. 엠 박사는 ‘미니팜’을 들고 다니며 식물 자체의 이산화탄소(CO₂) 양을 측정했고, 언니는 작은 유리돔을 덮어 한동안 기다린 뒤 식물이 대기에 방출한 이산화탄소 양을 쟀다.
“좋다는 실험자재들 다 써봐도 이 방법이 최고였거든요.”
고무장갑의 팔목 부분을 잘라 만든 분홍 끈으로 유리돔을 밀폐하면서 언니가 말했다. 알뜰한 언니의 연구 노하우가 재밌어서 나는 웃었다. 처음에는 인터뷰를 하겠다며 지구 온난화와 이산화탄소 문제에 대해 물어댔지만 한 시간이 넘자 어쩐지 얘기는 세입자로서의 애환으로 흘러갔다. 우리는 ‘자가’의 꿈을 위해 어떻게 애써야 할지 의견을 나눴는데, 놀랍게도 결론은 집값이 떨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도와드릴까요?”
옆에서 구덩이를 파고 있는 지구물리탐사팀의 관수 연구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예의상 한 말이었는데 정말 삽을 내밀었고 나는 은근히 후회하며 삽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파는 건 파는 건데 왜 파는지는 좀 알고 싶습니다, 하고 말했다.
“온습도 센서를 20센티미터마다 5개씩 설치할 거예요. 그리고 10센티미터마다 전극을 심어 전기비저항값을 측정할 거고요. 겨울 동안 땅이 얼고 녹는 상황을 기록하는 거죠. 땅이 녹으면 전기가 잘 흐르고 땅이 얼면 그렇지 않겠죠. 이렇게 해두면 한국에 가서도 대기의 온도가 땅에 미치는 영향을 랜선을 통해 지켜볼 수 있죠.”
내가 퍼낸 자갈흙을 일일이 체로 치면서 그가 답했다. 자갈 없이 최대한 고운 흙으로 덮어놔야 전기가 잘 통하기 때문이었다. 남극을 떠나면서도 과학자들은 이곳과의 연결고리를 남겨두고 있었다. 나는 어떨까? 떠나면 돌아올 일이 없으리라는 사실에 마음이 서늘해졌다. 귀국한 뒤 남극에 대한 향수가 나를 누를 게 분명했다. 나는 아주 사소한 이별에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남극에서의 내 시간은 여행도 취재도 연구도 아니라 ‘사는 것’이었다. 관계를 만들고 대화를 나누고 호의, 기쁨, 감동과 경이, 긴장, 때론 불안과 불쾌 같은 순간순간의 감정을 지닌 채 하루하루 일상을 만들어나가는 것. 그렇기에 그리움은 더할 것이었다.
바람에 날려간 비닐봉투 쫓아 질주
그때 비닐봉투 하나가 둥실 떠올라 전재규봉 쪽으로 날아갔다. 관수 대원은 체를 집어던지고 번개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잡힐 듯 잡힐 듯 하던 비닐봉투는 남극풍을 타고 언덕을 넘어갔고 질주도 계속됐다. “관수씨 그냥 둬요! 할 수 없죠!” 누군가 소리쳤지만 그는 두 발에 모터를 단 수준으로 속력을 높였고 언덕 뒤로 사라졌다. 저게 그렇게 중요한 물건인가? 나는 어리둥절했다. 내게 말하면 비닐봉투 하나쯤은 줄 수도 있는데. “남극에 최소한의 자취만 남기는 게 과학자들의 룰이거든요.” 카밀라 언니가 웃으며 설명했다. 이윽고 비닐봉투를 손에 든 관수 연구원이 의기양양하게 등장했을 때 우리는 얼얼하게 언 입가를 열심히 움직여 환호했다.
25일에는 제이(J) 대원, 벡터와 함께 고층대기관측동과 우주환경광학관측동을 둘러봤다. 고층대기관측동에서는 유성 관측 기기가 흥미로웠다. 제이 대원은 유성이 진입하면서 일으키는 대기의 변화를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성의 빛무리에 경탄하는 우리와 달리 과학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지구의 상태 변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위성 레이더는 2007년부터 한번도 꺼진 적이 없어요. 남극 대기는 전지구적 순환에 있어 너무 중요하니까요. 지진파를 감지하는 설비도 설치되어 있으니까, 따져보면 대기뿐 아니라 지구 전체를 살피고 있는 셈이에요.”
우리는 기지 대장의 승인을 받아야 견학이 가능한 우주환경광학관측동도 둘러보았다. 들어가자마자 천장에 설치된 유리돔과 분광계, 대형 전천 카메라(All Sky Camera)가 보였다. 제이는 네 파트로 나뉜 모니터 영상을 보여주었다. “구름인가요?” 내가 작은 점들로 표시된 원을 가리키며 물었다. “중간권 관측 영상들이에요. 이건 대기의 파동이고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파동들이 빛을 내거든요.” 값으로 치면 수억원에 달하는 천장의 장비들은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공상과학(SF)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제이의 설명은 차분하고 일정한 패턴의 파동들처럼 안정적이었다. 앞으로 쓰게 될 남극에 대한 내 소설이 지금 이 순간과 닮아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들었다. 열도 높은 모험과 상상력, 호기심, 감정의 파고와 실증과 이론과 논리 어느 사이에.
머뭇대던 펭귄들 어느새 바다로 툭툭
출남극을 이틀 앞둔 날, 벡터가 마지막으로 펭마(펭귄마을의 줄임말)를 가자고 했다. 원래는 해표마을로 가서 안 연구원팀의 장비 설치를 도울 예정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일밖에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못 간다는 말을 대체 누가 안에게 할 것인가를 두고 실랑이했다. “벡터님, 제 엠비티아이(MBTI)는요, 만약 제 팔에 고양이가 기대어 자고 있으면 잠을 깨우느니 제 팔을 잘라내는 성격이라고들 그래요. 나는 죽어도 말 못 해.” “나도 그래, 나는 심지어 ‘에프’(Feeling, 감정형)라고.” 그렇게 서로의 소심함을 주장하는 중에 안 연구원이 식당으로 들어왔고 그와 눈이 마주친 나는 어느새 미안하지만 펭마에 가야 해서 해표마을은 어렵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안은 괜찮다며 쿨하게 넘어갔다. “뭐야, 못 한다더니 잘하네.” 역시 엠비티아이(성격 유형 지표)는 참고일 뿐이구나 실감하며 나는 먹던 치킨가스를 마저 해치웠다.
다음날, 여름의 종료를 알리듯 매섭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벡터와 나는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기지에 처음 도착할 때부터 바다에 있던 빙산은 한달 동안 거의 절반이나 녹아 있었다. “근데 펭마 갈 때마다 우리 같이 있었던 거 알아?” 듣고 보니 그랬다. 서로 따로 갔다가 우연히 만나기도 했으니까. “펭마에 펭귄들이 남아 있을까요?” “모르지.” 지금은 부모 펭귄들이 아기들을 데리고 해변가에서 본격적으로 수영을 가르치는 때였다.
며칠 전 위버반도에서 본 아기 젠투펭귄들이 생각 났다. 어린 펭귄은 엄마를 따라 용기 있게 물속으로 들어갔지만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뱅글뱅글 돌더니 흰 배를 수면으로 내놓고 말았다. 40센티미터도 안 될 깊이에서 아기 펭귄은 본의 아니게 배영 자세를 한 채 허우적거렸다. 그날 나는 방수복을 입고 해변에 누워 이른바 ‘펭멍’을 했는데, 그 순간의 평화로움은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유람선이 세종기지 바로 앞까지 들어와 조디악을 탄 관광객들을 퐁퐁퐁 떨구지 않았다면 한참 더 이어졌을 행복이었다. 그들은 해변가에 누운 나를 향해 “헤이! 안녕!” 하며 불러댔지만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은 펭귄이나 해표처럼 나도 남극의 원주민이었으니까.
펭마 해변에는 펭귄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있었다. 얼음덩어리와 뒤섞인 검은 자갈, 반들반들한 검은 등과 멋진 붉은 부리. 바위에 올라 파도의 세기를 가늠하며 어느 타이밍에 뛰어들지 고민하는 성체들도 보였다. 어려울 것이다, 바다로 뛰어드는 일은. 우리가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두렵고 주저되는 것처럼.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삶이 되고 마니까 이윽고 한 마리가 용기를 냈고 그 뒤에 서 있던 녀석들도 툭툭 뛰어내렸다.
펭마는 지난번과 다르게 한적했다. 내가 젓갈 냄새라고 미화했던 펭귄 분변 냄새도 훨씬 덜했다. 자갈돌을 소중히 모아 만든 젠투펭귄들의 집은 비어 있었다. 밀려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떠난 것이었다. 더 큰 세상으로. 좀 더 걸어가 보니 절벽 쪽에 한 무리의 젠투펭귄들이 모여 있었다.
동물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원칙대로 가만히 서서 지켜보는데 한발 한발 내게 다가왔다. 곧 있으면 3월인데 아직 솜털을 달고 있는 아기 펭귄들이었다. 너희 늦둥이구나, 싶으면서 콧날이 시큰해졌다. 인간처럼 펭귄도 개중 좀 늦된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고마울까. 가장 강한 것만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힘과 속도를 지닌 존재들이 공존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질서라는 사실이. 아기 펭귄들은 내가 들고 있는 등산 스틱을 톡톡 쪼았다. 나중에 사람들에게 들어보니 뾰족한 부분이 내 부리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걔들은 나름 다정한 인사를 한 거라고. 나는 잘 있으라고, 겨울을 꼭 잘 견디라고 말하며 아쉽게 돌아섰다. 언덕을 내려오는데 남극에 오고 싶어 한 정확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어서였다.
멀어지는 기지, 점점 커지는 대자연
2월28일이 세종기지를 떠나는 날이었지만 날이 궂어 비행기가 뜨지 않았다. 남극에 하루 더 머무는 건 좋았지만 비행기표를 바꾸느라 기지에는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갑작스럽게 칠레 국내선 스케줄을 바꾸려고 하니 50만원이나 내야 했다. 그나마 한국행 표는 이틀 여유 있게 예매해 다행이었다. 만약 일정이 더 밀려 그 비행기표마저 날아가버리면 골치가 아팠다. 우리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비행기 언제 뜬대요? 귀국 일정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하고 서로 물었다. 엘 박사는 초연했다. 이미 일곱번이나 남극에 온 그는 이럴 때는 마음을 비우고 만화책이나 읽는 게 최고라며 독서에 집중했다.
퇴원은 했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상황인 아빠 때문에 엄마는 내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의 모든 일상이 나를 부르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여기 머물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혹시 창고에 숨어 있으면 찾다가 포기하지 않겠어요?” 내가 농담하자 명민한 권 총무는 “저희를 너무 만만하게 보시는군요, 허허허” 하며 웃었다. 월동대원들도 ‘군식구’들이 다 떠나고 나면 자기들만의 긴긴밤을 보낼 준비에 열중했다. 블리자드를 이겨내기 위해 세종기지 곳곳을 보수했다.
그리고 3월1일 새벽 5시, 우리는 캐리어를 끌고 방을 나왔고 마지막으로 방수복을 입었다. 조디악에 나눠 타고 빠져나오는데 불 켜진 세종기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선착장에 서서 손을 흔들어주는 대원들에게도. 조디악이 달릴수록 그들의 얼굴이 멀어졌고 나중에는 세종기지도 미니어처처럼 아주 작아졌다. 그 대신 기지 뒤의 백두봉이, 마리안 소만이, 동이 터오는 하늘이, 그러니까 남극의 거대한 자연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치 두달 동안 펼쳐졌던 내 일지의 배경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똑똑히 보라는 듯. 점점 붉어지는 하늘과 그 빛으로 도리어 아주 무겁게 어두워졌던 산등성이는 내 기억에 아주 또렷이 남았다. 압도적인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과 평화, 인간종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이 만들어냈던 꿈결 같던 일상. 그것을 간직한 채 나는 여기로 돌아왔다.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정을 가지고 함께해 주신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소설가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에세이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식물적 낙관’ 등을 썼다. 작고 단순하고 환해지기 위해 늘 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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