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긋한 꽃, 상큼한 과일, 은은한 수묵…여행지·어린시절 향을 찾아서 [ESC]

한겨레 2024. 11. 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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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향기 만드는 사람들
시향 작업 거쳐 나만의 향 만들기
허브향 ‘리트세아쿠베바’ 상쾌한 ‘오렌지’ 등
“첫인상에 혹하지 말고 탐구해야”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향수제작 공방 센트위키에서 조향사 김혜은씨가 조향에 앞서 향을 맡아보는 시향 작업을 하고 있다. 스튜디오 어댑터 염서정

“평소에 어떤 향을 좋아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코를 킁킁거리게 할 만큼 은은한 향기가 났다.

지난달 29일 찾은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향수제작 공방 센트위키. 조향사 김혜은(36)씨는 평소 어떤 향을 좋아하는지, 기피하는 향이 무엇인지를 첫인사처럼 물었다. 간단한 질문이지만 의외로 대답하기 까다로웠다. 생각 끝에 “상쾌하면서도 달콤한 향을 좋아한다”는 추상적인 답변을 내놨다. 김씨는 그 한마디에 작은 갈색 병에 담긴 50여개의 향수 시약을 골라 테이블 위에 펼쳐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향기를 정확히 모릅니다. 평소에 섞여 있는 향을 주로 맡기 때문이죠. 향수를 좋아하는 사람들마저도 그래요. 향을 쪼개어 하나하나 따로 느껴보는 시향 작업을 거치며 비로소 내가 좋아하는 향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게 되지요.”

1~2g 차이에 향 느낌 휙휙 변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향수제작 공방 센트위키에서 조향사 김혜은씨가 향수들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스튜디오 어댑터 염서정

먼저 상큼한 향이 특징인 ‘시트러스 노트(계열)’의 향료부터 시향을 시작했다. 스포이트로 하얀 시향 종이에 향료를 한방울 뚝 떨어뜨리고 휘휘 흔들어 알코올을 날린 뒤 향을 맡았다. 허브 향과 풀 냄새가 특징인 ‘리트세아 쿠베바’, 가볍고 상쾌한 ‘오렌지’까지 10여개의 향을 맡은 뒤 첫 느낌과 선호도를 적었다. ‘향을 맡는 순간의 느낌을 내 언어로 자유롭게 적으면 된다’는 조언을 참고했다.

수박의 하얀 부분 향이 나는 수분감 가득한 ‘헬리오날’부터 미나리과 식물로 더덕 냄새를 짙게 풍기는 ‘갈바눔’, 강렬한 인상의 ‘페퍼민트’ 등 프루티 노트의 향을 맡고서도 느낌을 자세히 기록했다. 중간중간 다양한 향기로 피로해진 코를 달래주기 위해 커피콩 향을 맡으며 환기했다. 이후에도 다양한 꽃향기 계열과 메케한 스파이시 계열, 주로 다른 향료와 섞어 향의 깊이감을 조절하는 베이스 노트와 우디 노트, 달콤한 디저트 향을 풍기는 구르망 노트까지 무려 2시간에 걸쳐 50여개에 달하는 향료 시향이 이어졌다.

“같은 향을 맡고도 서로 다른 느낌을 떠올리는 게 참 재미있어요. 방금 ‘로즈메리’ 향을 맡고 ‘향긋하다’고 표현하셨죠? 누군가는 맡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지린내같이 불쾌하다’고 하기도 해요. 허브 특유의 ‘리날로올’이란 성분을 받아들이는 차이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 차이일 뿐 정답은 없어요. 심지어는 누군가에게는 강렬하게 느껴지는 향이 다른 사람에게는 무취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어요.”

시향이 끝나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향료 6개를 추려냈다. 오렌지와 달콤한 향이 특징인 ‘아우란티올’, 아기에게서 나는 향과 비슷한 ‘머스크’까지 향료를 원하는 비율대로 조심히 섞었다. 불과 1~2g의 차이에도 향의 느낌이 휙휙 변했다. 예상보다 너무 강렬하거나, 다른 향과 섞였을 때 영 어울리지 않는 듯한 향도 있었다. 몇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마침내 내 취향에 딱 맞는 향을 찾아내 공병에 조심히 담았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향을 찾는 법은 간단해요. 첫인상에 혹하지 말고 계속 향을 탐구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겁니다. 짧은 첫 느낌에 반해 그 향을 잔뜩 넣었다가 바로 다음날 질려버리거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향에서 풍기는 다른 면모에 반감을 갖기도 하죠.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급히 단정 짓지 말고 두고두고 고민해보세요. 향을 찾으러 오셨다가 2~3시간의 고민 끝에 ‘나’에 대해 알게 됐다는 분들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 것 같아요.”

“세계일주 순간, 벅차게 떠올라”

지난달 24일 강화도에서 열린 ‘가을밤 향기 워크숍’에서 조향사 임지연씨가 참가자들에게 각종 향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임지연 제공

향은 힘이 세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냄새를 통해 불현듯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여기서 오감을 통해 추억을 소환해내는 ‘프루스트 효과’라는 말도 생겼다. 비단 소설 속 주인공뿐만 아니다.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다. 비가 그치고 창문을 열었을 때 불현듯 어느 순간이 떠오르거나,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을 때 어머니 또는 그 음식을 함께 나누었던 누군가가 생각난 적이 있을 것이다.

강화도에서 향수 제작 공방 라팁씨를 운영 중인 임지연(35)씨는 길을 가다 짧은 순간 우연히 맡은 향 때문에 조향의 세계에 들어섰다. 임씨는 3년간의 긴 세계일주를 마치고 10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행지에서의 기억은 일기장과 사진첩 속에 남겨두고 평범하게 일상을 살던 어느 날, 길에서 어떤 향을 맡고서는 그대로 멈춰 섰다. 이집트 다합에서 자유롭게 스쿠버다이빙을 하던 그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애써 눌러놓았던 여행지에 대한 그리움과 행복했던 추억이 갑자기 벅차게 느껴질 정도로 크게 다가왔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향인데, 중동 지역 특유의 꼬리꼬리하면서 향긋한, 향신료 냄새였어요.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세계여행을 하던 그때의 어리고 도전정신 넘치던 제 모습이 확 생각나는 거예요. 그때의 행복한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그때 그 향이 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렇게 취미생활로 시작한 조향 작업이 이제는 업이 됐다. 임씨는 최근 자신이 향기를 통해 이집트 여행의 행복한 추억을 떠올렸던 것처럼, 강화도로 여행 온 사람들에게 지역의 향을 만들어보는 기회를 마련해주는 데 몰두하고 있다. 강화의 마니산을 모티브로 해 숲속에 있는 듯 상쾌한 느낌의 향수를 만들고, 논밭이 펼쳐진 강화에서 가을 지나 벼를 베고 난 뒤의 특유의 향을 담았다. 겨울을 이겨내고 올라오는 순무의 내음 담은 향도 만들었다.

강화도에서 열린 ‘가을밤 향기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가을밤에 어울리는 향료의 향기를 맡은 뒤 느낌을 적고 있다. 임지연 제공

스스로를 ‘향기여행 안내자’라고 표현하는 임씨는 지난달 24일에는 야외에서 ‘가을밤 향기 워크숍’을 열었다. 1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 ‘가을밤의 향’을 찾느라 분주했다. ‘가을밤’이라는 단어 하나에 다양한 경험이 쏟아졌다. “선선한 밤에 아까 널어둔 뽀송한 빨래를 걷을 때의 향긋한 느낌” “장작불을 땔 때의 메케하면서도 정겨운 향기” 등 사람들마다 ‘가을밤’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향이 모두 달랐다. 향료를 조합해 직접 가을밤의 향기를 만들고 ‘오늘 밤 나의 달’, ‘달 그리고 별’과 같은 이름을 붙였다.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향수를 뿌리면, 예쁜 달이 떴던 가을밤도 함께 떠오르겠죠. 향기와 기억은 끈끈하게 연결돼 있다는 걸 직접 느끼고 난 뒤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경험을 선물하는 데서 행복을 느껴요.”

“노인 냄새 난다고 할까 봐 시작했지만”

대전의 향수공방 딜라잇센트에서 김영애 할머니 등 참석자들이 ‘한국의 향’ 향수를 조향하고 있는 모습. 산내종합사회복지관 제공

17세기 프랑스에서부터 향수가 산업적으로 발전했다고 알려진 만큼, 향수는 ‘서양의 것’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향수’라는 단어를 들으면 유명한 외국 브랜드의 진한 향수 향부터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향료의 역사는 오래됐다. 한국조향교육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삼국유사’ 기록에서도 향을 통해 몸을 치장하거나, 조선시대 세종 때는 향료 재배와 생산을 장려하고 성종 때는 향 식물 재배 관리를 감독하는 전향별감이라는 벼슬을 따로 두기도 했다.

대전 동구에 있는 향수 제작 공방 딜라잇센트의 조향사 조은숙(45)씨는 서양의 향이 아닌, 한국 고유의 향이 지닌 매력에 푹 빠졌다. 흰수수꽃다리 향, 수묵 향, 한지 향, 은목서 향, 미선나무 향처럼 익숙하면서도 그 정체를 쉽게 알지 못했던 향을 찾아내고 소개하고 있다. 외국에서 유래된 향과 달리 나는 듯 안 나는 듯 은은하면서도 자연의 향에 가까운 게 조씨가 말하는 한국의 향이 지닌 특징이다. “미선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특산 식물이에요. 열매 모양이 아름다운 부채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요. 사실 우리나라 곳곳에 피어 누구나 향을 맡아봤지만 잘 모르죠. 향을 맡아보면 그제야 어디선가 많이 맡아본, 익숙한 향기라고들 해요.”

조씨가 한국의 향을 소개하면서 공방을 찾는 연령대도 다양해졌다. “한번은 40~50대 친구분들이 시간을 보내러 오셨어요. 향을 하나씩 맡으면서 ‘옛날 살던 우리 동네에서 나던 향’이라거나, ‘아궁이에서 불 땔 때 나던 꺼멍내를 오랜만에 맡는다’고 감격하시는 분도 계시죠. 요즘은 자연의 향을 맡기가 쉽지 않잖아요. 멀리 산속으로, 바다로, 여행을 가야만 맡을 수 있는 향을 공방에서 맡아보고 추억에 잠기는 중장년 분들이 많아요.”

딜라잇센트에서 할머니들이 조향한 ‘한국의 향’ 향수. 산내종합사회복지관 제공

김영애(93) 할머니도 추억의 향을 찾아 며칠 전, 이 공방을 찾았다. 5년 전 우연한 기회에 처음 향수를 만들어보고는 조향의 세계를 알게 됐다는 김 할머니는 ‘어릴 적 맡았던 향’을 찾아 복지관 할머니 동료들과 함께 이곳에 왔다. “백도라지 향이랑 오미자, 한약재에서 나는 향을 골라 향수를 만들었지요. 선생님 말을 따라 이것저것 향을 섞어봤는데 세상에, 옛적에 우리 할머니 방에서 맡았던 그런 은은한 향이 나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신비하고 감격스럽던지요. 차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옷에 뿌린 그 향을 맡았는데 주책맞게 계속 웃음이 나는 거예요. 다시 어린애가 된 것처럼요.”

이날 김 할머니와 함께 공방을 찾은 할머니들은 해송과 쑥 향을 잔뜩 섞어 절에서 나는 진한 향의 향수를 만들거나, 꽃 냄새 가득한 소녀 감성의 향수를 만들었다. 2시간 내내 옛날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김 할머니는 만들어온 향수를 고이 자신의 집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다. 완성된 향수가 알코올 향을 날리고, 온전히 제 향을 발휘하는 데는 2주의 숙성 기간이 필요해서다. 하루하루 날짜를 지우며 다시 향수를 뿌려볼 순간을 기대하고 있다. “향수는 안 좋은 냄새를 감추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맨 처음에 내가 향수를 떠올리게 된 것도 암만 깨끗하게 씻어도 누가 노인 냄새가 난다고 할까 봐서였거든요. 그런데 향이라는 게 이걸 통해서 뭔가를 다시 찾고, 생각해내게 하는 것 같기도 해요. 숨기는 게 아니라, 찾게 해주는 거. 그게 향수 만들기의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김 할머니의 말이다.

장선희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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