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동물’이라는 말, 나는 왜 불편한가 [임보 일기]
며칠 전 어느 동물단체의 캠페인에서 ‘아기 동물’이라는 말을 봤다. 아기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에 ‘짐승의 작은 새끼나 어린 식물을 귀엽게 이르는 말’이라는 뜻도 있으니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20년쯤 전에 몇몇 수의사가 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이 동물을 “아이”라고 부르는 것을 따라 병원을 찾는 개나 고양이를 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수의사 사회에서는 그게 괜찮은 거냐, 과하거나 틀린 말 아니냐 하는 불만이 돌았다. 아이는 ‘나이가 어린 사람’이나 ‘남에게 자기 자식을 낮추어 이르는 말’ 정도의 사전적 의미가 있다.
이 시대의 반려동물이란 사람과 같은 지위를 가져야 하는 동물이 되었으니, 대충 ‘아기’든 ‘아이’든 그렇게 불러도 크게 틀어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그 말이 불편하다. 마치 개를 ‘개’라 부르지 못하고 ‘강아지’라 부르는 현상처럼 마음에 걸린다. 엄연히 다 자란 개는 강아지가 아닌데 어째서 늙어 죽을 때가 다 된 개도 어른이 되지 못하고 강아지로 불리는가. 혹여 여성주의적 돌봄 관점으로 동물을 보지 않으려는 뿌리 깊은 가부장제의 저항을 아직 나의 내면에 갖고 있지 않나 걱정이 되기도 한다.
아마도 그러한 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페미니즘을 나의 정치로 받아들이고 산 지는 불과 10년도 되지 않았고, 그 전이나 후나 여전히 남성적 논리로 가득한 사회에서 인정받는 40대 남성이 되기 위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걷고 떠들고 있으니 말이다. 나에게는 옹이처럼 박힌 남근중심주의가 마음속에서 화를 불러일으키고 가시가 되는 말을 만들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시점은 이미 어떤 정념에 휩싸여 차분한 성찰이 어려워진 상태라 더 그렇다. 냅다 한 발 먼저 딛고 싶은 욕구를 참고, 선을 넘기 전에 나의 지향을 기억해내려 애써야 한다.
변명이 장황했다. 그러나 아직은 동물을 ‘아기’로 보려는 관점에 공감하기 어렵다.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이 말은 동물을 잘 대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다. 내 주변에는 삶의 꽤 큰 부분을 동물을 돌보는 일에 할애하며 사는 사람이 많다. 그들 다수는 동물을 정말 ‘아기’처럼 여긴다. 자의든 타의든 돌봄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 돌봄은 (비율상) 사람이 주체가 되고 동물이 대상이 되는 과정이다.
나의 문제의식은 돌봄의 주체가 갖게 되는 폭력성과 그 대상이 짊어져야 하는 고통이다. 인간인 아기를 돌보는 데에도 불가피한 폭력, 혹은 돌봄의 주체가 인지하면서 외면하기도 하는 폭력은 어김없이 끼어 있다. 폭력을 휘두르는 돌봄의 주체는 스스로의 폭력성을 합리화하거나 반성하며 돌봄의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사랑하니까. 아기가 먹기 싫은 음식을 강제로 먹이기도 하고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그 기억은 경험상, 최소 마흔 살이 넘어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사람과 가장 사이가 가깝다는 개만 해도 인간과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산다. 그들의 세상이 언어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만 가정해도 너무 다르다. 그래서 개를 돌보는 것은 (진짜) 아기를 돌보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나의 어린 시절을 대입해볼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아기라면 꺄르르 웃을지도 모르지만, 개에게는 번쩍 안아 들고 연신 뽀뽀를 퍼붓는 인간의 돌봄이 짜증이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행동에 가깝다. 십 년쯤 같이 지내며 인간의 뽀뽀에 대해 온몸에 힘을 빼고 체념하는 방법을 익혔거나, 설령 애정표현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뽀뽀하는 인간의 마음은 개에게 온전히 가닿기보다는 ‘참아야 하는 인간의 폭거’로 남는다. 인간은 그러다 입술을 물리고는 당황한다. 개도 물고서 당황한다.
인간을 돌보는 일에 비해 동물을 돌보는 일은 훨씬 일방적이기 일쑤다. 동물이 생을 마치고 떠날 때까지 ‘그때 네가 나에게 저지른 짓이 정말 무섭고 싫었어’라는 후기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돌봄에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 동물은 인간 세상에 끼워 맞춰진다. 그 과정은 억지로 일어나기도 하고 순순히 돌아가기도 한다. 돌봄은 대체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적어도 사랑하려는 의지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돌봄의 주체가 폭력적이라고 인지해도 스스로를 용서해버린다. 동물을 ‘아기’로 본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있다. 어차피 그들을 다 알 수 없다는 포기와 타자화가 ‘아기’인 동물을 구성한다.
최태규 (수의사·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활동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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