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잠실섬·무너진 삼풍백화점…‘상전벽해’ 강남의 개발사 엿보기

김신성 2024. 11. 9.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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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달구지 다니던 한적한 농촌 지역
제3한강교 놓이며 불모지 개발 서막
한강변 섬 물막이·골재 채취로 파괴
부동산 투기 등 탐욕의 역사도 소개

강남의 탄생 ― 대한민국의 심장 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한종수·강희용·전병옥/ 미지북스/ 1만9800원

“뽕밭이었던 잠원동은 무 농사가 잘되었고, 서초동은 화초를 키우는 꽃동네였다. 압구정은 배나무 과수원골이었고, 도곡동은 도라지 특산지였다. 청담동은 이름처럼 물 맑은 청수골이었다. … 개포동·일원동 주민들이 서울 시내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지금의 타워팰리스 부근 양재천변에서 ‘엔진배’를 타고 탄천을 따라 올라가 뚝섬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이 부근에서 서울 시내까지 육로로 걸어가면 1박2일이 걸렸다 하니 그 정도로 강남은 오지였다.”(28∼29쪽)
서울 강남 압구정동 개발 당시 풍경. 미지북스 제공
한강 이남 미개발 불모지였던 강남이 우리나라와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역사를 소개한다. 아직 ‘영동’이라고 불리던 시절, 장차 경제성장을 견인할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장벽 같던 한강을 건널 수 있게 해준 제3한강교가 완공되면서 강남은 본격적인 개발 시대를 맞는다. 대대적인 수방(水防) 사업을 통해 강남은 거대한 개발 부지로 재탄생하고 변변한 건물 하나 없던 허허벌판에는 격자형 도로가 깔렸다. 그리고 오늘날 강남을 있게 한 주인공들―유명 아파트와 거리, 빌딩, 수많은 사건―이 공간을 채우기 시작한다.
우리가 ‘강남’이라 부르는 곳은 1963년 이전까지 경기도 광주군과 시흥군에 속한, 논밭이 대부분이고 달구지가 다니는 소로(小路)의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예전에는 ‘영등포 동쪽’ 또는 ‘영등포와 성동(城東) 중간’이라는 뜻의 ‘영동(永東)’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1970년대에 시작된 개발 계획의 정식 명칭도 ‘강남 개발’이 아닌 ‘영동 개발’이었다. ‘강북’이 곧 서울이었고, 한강 이남의 사람들은 강 건너를 ‘서울’이라고 불렀다.
한종수·강희용·전병옥/ 미지북스/ 1만9800원
강남은 개발 잠재력이 엄청났지만 한강이 장벽이었다. 당시만 해도 다리를 놓는 일은 국가적 대역사였다. 1917년 건설된 최초의 한강 다리 제1한강교(한강대교) 이후 제2한강교(양화대교)가 놓이기까지 반세기가 걸렸다. 그래도 한강에 다리가 들어선다면 강남은 도심에서 지척이었다. 1969년 12월25일 마침내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준공됐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강북’과 ‘강남’을 이어준 첫 번째 다리였다. 훗날 ‘말죽거리 신화’로 불리는 땅값 폭등의 원인이 되었으며, 그보다 먼저 착공한 경부고속도로와도 이어져 그 출발점이 되었다. 제3한강교는 ‘강북’으로부터 ‘강남’을 잉태하는 탯줄이 되었다.

강남엔 약점이 있었다. 지대가 낮아 물에 자주 잠기는 것이었다. 대대적인 수방 대책 없이는 도시로서 기능할 수 없는 땅이었다. 한강을 서울 중심 생활권으로 만들기 위한 한강 개발이 1967년부터 시작됐다. 강변1로를 제방도로 형태로 건설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한강 수위를 유지하기 위해 댐이 필요했는데 마침 소양강댐이 1973년에 완공됐다. 그러나 반포, 서초동 일대는 여전히 강변도로보다 지대가 낮았다. 벼락이 쳐 배수펌프장에 전기 공급이 중단되면 꼼짝없이 물이 찰 수밖에 없었다. 서울시는 고육지책을 내놓았다. 저지대 지역은 모두 3층 이상 건물을 짓게 했다. 최악의 경우 주민들이 3층 이상으로 대피하면 인명 피해는 없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마침내 침수 지역까지 전부 아우르는 엄청난 규모의 ‘아파트 지구’가 강남에 공식 탄생했다. 강남 최초 아파트 단지 논현동 공무원아파트가 지어졌고 영동 주택단지가 조성되어 분양을 마쳤다. 1976년 8월 공식적으로 ‘아파트 지구’가 고시된다. 반포지구 167만평, 압구정지구 36만평, 청담지구 11만평, 도곡지구 22만평, 잠실지구 74만5000평 등 강남에 설정된 아파트 지구는 다른 지역과 비교를 불허하는 압도적인 규모였다.
완공 직후의 제3한강교(한남대교). 이 다리는 ‘강북’으로부터 ‘강남’을 잉태하는 탯줄이 되었다. 미지북스 제공
그런데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영동 개발이었지만 놀랍게도 10여년 만에 완료되었다. 개발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고 강남은 계속 확장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잠실을 개발했다. 이때 지어진 아시아선수촌 아파트와 올림픽선수촌아파트는 잠실이 강남권에 묶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잠실종합운동장과 예술의전당, 코엑스 등 오래도록 강남의 간판이 될 랜드마크들이 이 시기에 자리를 잡았다. 강남 개발은 수서와 일원, 분당 등으로 번져나갔다.

책은 강남 개발 시기를 거치며 사라져버린 옛 기억의 장소들 또한 차근차근 돌아본다. 수방 사업의 일환이었지만 한강변에 제방을 쌓고 강변도로를 만들면서 지워버린 옛 한강변의 풍경, 압구정동과 옥수동 사이에 있던 저자도(楮子島)가 1970년대 초 아파트 대단지 건설을 위한 골재로 채취되어 없어진 이야기, 잠실 물막이 공사 탓에 잠실섬 남쪽으로 흐르던 송파강이 석촌호수로만 남게 된 사실 등을 빠짐없이 소개한다. 정부 유력 인사가 주도한 부동산 투기, 한보그룹 회장이 일으킨 수서 사건, 끊어진 성수대교와 무너진 삼풍백화점에 얽힌 사연 등 강남 곳곳에 남겨진 에피소드들 또한 강남 개발사로 적었다.

강남의 성공은 우리 도시사에 깊은 그늘을 드리우기도 했다. 부산, 대구 등 광역시는 물론이고 소도시들조차 마치 비법이라도 배운 것처럼 강남 개발 과정을 본떠 신도심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지방 도시들은 구도심이 죽어버린, 특징 없는 붕어빵 도시들이 되어갔다. 지금은 어떤 개발론자도 63빌딩과 올림픽도로, 잠실 주경기장 등을 서울의 자랑이라 하지 않는다. 그런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책은 강남의 역사를 증언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강남에 끌려가는 사회를 성찰하면서 우리 도시들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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