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를 찾아서] “드라마 우영우 같은 ‘고기능 자폐’ 치료할 수 있다”
“고기능 자폐 아동, 사회성 관장하는 뇌 기능 떨어져
언어 능력 평가와 동시에 뇌 촬영 가능한 도구 개발
자폐 아동 청소년·성인기 지나 노화 과정 연구하고파”
자폐 스펙트럼 장애(Autism Spectrum Disorder, ASD)는 자폐증의 공식 진단명이다. 기존에는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는 중증 장애부터 특정 분야에 뛰어난 서번트 증후군, 언어·인지능력은 정상이지만 정서적으로 교감하지 못하는 아스퍼거 증후군, 고기능성 자폐까지 다양한 용어가 혼용됐다. 그러다 2013년 자폐의 심각도와 증상이 다양한 스펙트럼처럼 나타난다고 해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로 명칭이 통일됐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원인은 전두엽을 비롯해 사회성을 관장하는 뇌 영역의 기능 저하다.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아이가 가만히 있으려고 노력해도 잘 되지 않아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면, 자폐 스펙트럼 아이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 이유를 모른다.
이런 자폐 스펙트럼 장애 환자 중에서도 IQ(지능지수)가 70 이상의 고기능성 자폐 환자는 높은 암기력을 보이지만, 일상적 언어를 쓰거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에는 결함을 보인다. 지난 2022년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이 그런 환자이다.
지난 5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천근아 소아정신과 교수는 “고기능 자폐는 겉으로 보면 비장애인과 비슷하지만, 대화를 나눠보면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화용(話用) 능력이 많이 떨어진다”며 “유아기 이상 학년기가 되면 저절로 터득하는 사회적 관습이나 실용적으로 쓰이는 구어체적 언어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성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소아·청소년 자폐 권위자로 꼽히는 천 교수는 고기능 자폐는 치료·관리를 통해 일상 생활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천 교수는 “자폐가 있더라도 학습을 통해 말투와 몸짓 등 행동 교정이 가능하다”며 “치료와 중재를 하려면 이들의 언어 능력을 평가하고, 사회성 언어를 담당하는 뇌 활성 영역을 관찰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국은 고기능 자폐 아이들의 사회성 언어를 평가할 마땅한 도구가 없었다. 천 교수는 언어치료사인 송승하 명지대 교수와 함께 직접 도구를 개발했다.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관용 어구를 추려 그림과 함께 묶었다. 그림을 고기능 자폐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동시에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으로 촬영했다. 어떤 행동을 하면 뇌의 특정 영역으로 피가 몰린다.fMRI는 해당 영역을 마치 불이 켜진 것처럼 보여준다. 이러한 ‘아동 사회적 언어검사(C-SLT)’ 도구는 지난 9월 출판됐다.
천 교수는 “검사는 fMRI 촬영장치 안에 들어간 아이가 사진을 보고 그림과 문구의 의미가 일치하는지 직관적으로 버튼을 눌러 답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며 “이때 fMRI로 아이들의 뇌를 촬영해 어떤 영역이 활성하는지, 또 일반 자폐 스펙트럼 환자와 고기능 자폐 환자의 뇌 회로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면밀히 관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천 교수는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의대 자폐연구센터에서 객원교수를 지냈다. 현재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 이사장도 맡고 있다. 다음은 천 교수와의 일문일답.
–최근 자폐 환자 추이가 궁금하다.
“현재 미국 CDC(질병통제예방센터) 통계는 36명당 1명인데, 전 세계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국내만 보면 30년 전 1만명당 한 명에 불과했던 소아 자폐 유병률은 최근 크게 늘어 올해는 50명당 한 명 꼴로 발생한다. 이들 중에 15~20%는 서번트 증후군, 10%는 고기능성 자폐에 해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자폐 환자 수가 늘어나는 이유는 뭔가.
“서구적인 식습관과 환경호르몬의 증가 등 환경적인 변화가 서서히 일어났다. 최근 노산이 많은데, 엄마의 난자보다 아빠의 정자 노화의 영향이 더 크다. 그런데 자폐 환자는 예전부터 늘 있어 왔다. 실제 환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기보단 최근 들어 자폐에 대한 의식이 높아졌고, 그만큼 진단 환자 수가 늘었다고 보는 게 맞다.”
–자폐에 대한 사회 인식이 바뀐 걸 체감하나.
“다행히 드라마 우영우를 통해 자폐증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진 걸 느낀다. 외래를 오는 부모들도 아이가 자폐 진단을 받았을 때 예전보다 절망하진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자폐라는 용어에 대한 반감은 큰 것 같다. 자폐는 스스로 자(自)에 닫을 폐(閉)로, 스스로 닫는다는 의미다. 국내 학회는 물론 해외 전문가들과도 소통하며 용어 개정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하고 있다.”
–이번에 개발한 C-SLT는 누구를 위한 도구인가.
“만 6세~12세의 고기능성 자폐 아동이 대상이다. 고기능성 자폐를 진단하는 장치라기 보다 연구하는 도구이다. 일반 아이들은 사람들이 흔히 쓰는 ‘주먹이 운다’, ‘공부와 담을 쌓았다’, ‘자기 무덤을 판다’ 등 관용어구를 단번에 이해하지만, 고기능 자폐 아이들은 정말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 예컨대 ‘주먹이 운다’라는 문구를 보면, 주먹이 실제로 눈물을 흘린다고 받아들이는 식이다. 이들이 fMRI 통에서 사진과 문구로 이뤄진 카드를 영상으로 보고, 사진과 문구가 제대로 매치됐는지 선택한다. 이때 아이들의 뇌가 활성이 될 텐데, fMRI로 촬영하면 전두엽을 비롯해 사회성을 관여하는 뇌 영역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관찰할 수 있다. 의료진이 이들의 뇌를 관찰해 연구하면 고기능 자페를 어떻게 치료하고 중재할지 알 수 있다.”
–고기능 자폐 아동은 어떻게 치료할 수 있나.
“자폐가 여러 스펙트럼으로 나뉘듯 고기능 자폐도 연령에 따라 정도에 따라 치료가 다 다르다. 응용행동분석(ABA)이 가장 대표적인 학습 훈련법이다. 사회적 행동을 하면 보상을 주는 방식이다. 다만 부모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 ABA는 매우 다양한 방식이 있다. 환자가 만 6세 이하의 유아기 또는 정도가 비교적 낮다면 또래 동년배 친구들과 교류를 통해 언어 습관, 보편적인 억양, 단어 선택 등을 따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좋다. 미술·태권도·음악 등 활동을 통해서도 증상 완화가 가능하다. 정도가 비교적 높은 아이들은 대부분 사회성 언어, 화용 능력이 부족해 언어 치료가 필요하다. 행동수정요법으로도 행동이 교정되지 않을 때는 약물 치료를 병행한다.”
–또 개발 중인 기술이 있나.
“그동안 많은 연구를 통해 조기 선별, 조기 치료를 강조했다. 지금은 신생아 코호트(집단) 연구로, 가정에서 비디오 카메라로 아이들을 촬영하고 이를 인터넷에 올리면, 자폐 조기 신호를 감지하는 앱(app·응용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다. 현재 세브란스병원을 포함해 8개 병원의 신생아팀과 협업하고 있다.”
–자폐 스펙트럼을 주제로 교과서도 출판했다.
“의대생이나 전공의 서적은 아니다. 요즘은 자폐증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져서 부모들이 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런데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는 명칭이 생긴 지 10년밖에 되지 않은 만큼, 인터넷에는 자폐 스펙트럼에 대한 오해와 가짜뉴스가 너무 많다. 물론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서적은 많지만, 전문의가 이를 제대로 분석하고 설명한 교과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외국 출판사에서 자폐 교과서 집필을 부탁했다. 외국에 영문으로 책을 낼 바에는 국내 환자와 부모를 위한 국문 책을 내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해 집필했다. 1년 정도 걸렸다. 자폐증 역사와 사례, 관련 제도 등 모든 것을 담았다고 보면 된다. 독자를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인으로 잡은 만큼,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 향후 10년 동안 세 번 더 개정하려고 한다.”
–자폐 아동에 필요한 제도는 무엇인가.
“고기능 자폐 아동보다 부모의 보살핌이 더 필요한 최중증 자폐 장애 아동을 위한 제도는 아직도 많이 부족한 현실이다. 이런 아동을 부모의 힘만으로 보살피고 책임지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부모의 경제활동도 쉽지 않다. 반면 선진국에는 이런 아동을 24시간 돌보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최중증 자폐 아동을 위한 제도 개선 움직임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 올해 1월에 전남 광주에서 시범 사업이 시작됐다. 이 제도가 잘 정착돼 최중증 자폐를 비롯한 모든 정신 장애 아동들로 대상이 확대돼 부모들의 부담을 덜어주면 좋겠다.”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
“현재 정년 퇴임까지 딱 10년 남았다. 20년 가까이 참 많은 자폐 아동을 만났다. 이들이 자라는 과정을 어느 정도 보긴 했지만, 청소년기, 성인기를 지나 노화하는 과정을 면밀히 살피지는 못했다. 자폐 아동이 어떻게 늙어가는지, 성인 자폐 환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또 무엇인지 이들의 노화를 연구하고 싶다. 소아정신과 의사로 시작한 삶인 만큼, 우리 아동 환자들의 삶을 내가 계속 따라가야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동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들이 잘 자라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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