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트럼프 승리의 숨은 공신은 바로 美 민주당
미국 제45대 대통령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 2016년 11월 9일 밤 8시 22분(미 동부 시각), 뉴욕타임스(NYT)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당선 확률이 82%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은 클린턴이 아닌 도널드 트럼프였다. 당시 대선 예측에서 뼈아픈 실수를 한 건 NYT만이 아니다. 미국의 주류 언론 상당수가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트럼프를 지지한 이른바 ‘샤이 트럼프(shy Trump)의 표심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며칠 전 끝난 제47대 미 대선에서도 또다시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NYT는 대선 이틀 전인 11월 3일, 승부를 결정지을 경합 주 7곳 중 4곳에서 민주당의 카멀라 해리스가 트럼프를 근소하게 앞선다고 보도했다. 그런가 하면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선거 전날 두 후보의 승리 가능성을 반반으로 점쳤다가 선거 당일인 5일 아침엔 막판에 나온 여론조사를 반영했다면서 해리스의 승리 가능성이 56%로 트럼프(43%)를 크게 앞선다고 보도했다. 그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트럼프는 민주당의 옛 강세 지역인 이른바 블루월(blue wall) 3곳(펜실베이니아·미시간·위스콘신)을 비롯한 경합 주 전역에서 승리를 거뒀다.
세계적인 공신력을 자랑하는 영미권 주류 언론이 연거푸 대선 결과 예측에 실패한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주(州) 별로 승자를 결정하고, 승자에게 선거인단을 몰아주는 미 대선의 승자독식 방식 특성상 여론조사의 작은 오차가 큰 오류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 여론조사 기관의 표집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 등이 제기됐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파고 들어가 보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던 주류 언론의 관행이 이런 결과를 불러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사실 2016년 대선 때도 트럼프의 승리를 짐작하게 하는 신호는 많았다. 양 후보의 선거 유세장에 직접 가 보거나 서민층 표심에 익숙한 사람들은 트럼프 지지층이 주류 언론이 예측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견고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바닥 민심은 주류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에 대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NYT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은 2016년 대선 직후 게재한 칼럼에서 “아마도 나를 비롯한 대다수 NYT 독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라며 잘못을 시인하기도 했다. 엘리트 의식과 진보 성향이 강한 NYT 등 주류 언론은 ‘미국 우선주의’를 부르짖으며 이민자와 여성들에 대한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트럼프의 추종 세력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엄연히 존재하는 트럼프 열풍을 보지 않으려 하거나, 보면서도 과소평가했다. 트럼프 지지자들 역시 엄연한 유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에만 의존한 나머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은 비단 주류 언론만은 아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직전인 11월 1일 “내가 취임한 이래 1600만 개 일자리가 창출됐으며, 지난 50년 사이 미 역대 어느 행정부보다 낮은 실업률을 기록했다”고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바이든 집권 기간 동안 1980년대 초반 이래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일반 국민들에겐 정부가 발표한 수치적 성과보다 가파르게 오른 휘발유와 생필품 값, 식료품 값이 더 와닿을 수밖에 없지만, 집권 정당은 여전히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당이 내건) 민주주의, 헌법적 권리, 자유 수호를 선택하겠느냐 트럼프의 혼돈과 분열을 선택하겠느냐”라는 해리스의 공약은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민주당이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를 강조하고 그의 도덕적 결함을 부각시키는데 혈안이 돼 있는 동안, 그들은 당장 월급날을 걱정해야 하는 일반 서민들이 자유 민주주의 같은 거창한 이상보다 경제적 안정이라는 현실적 가치를 더 우선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간과했다.
일각에선 민주당 젊은 의원들이 주도하는 과도한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인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바로잡으려는 운동) 문화가 중도 성향 유권자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관측도 나온다. 트럼프가 대선 기간 내내 “부모 동의를 받지 않은 미성년자의 성전환 수술을 법적으로 막겠다”라며, 이 문제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한 해리스와 대립각을 세운 것 역시 최근 민주당이 지향하는 PC 문화가 부담스럽다고 느낀 중도 성향 지지자들을 의식한 전략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해리스를 비롯한 민주당에선 이런 대다수 유권자의 정서를 읽지 못했거나, 보고서도 외면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믿는 ‘확증 편향의 오류’에 빠진 것이다. 한 마디로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념과 논리에 취해 대다수 유권자의 표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행정부와 집권당의 부족한 현실 인식이 어느 정도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남의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정치권과 정부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을 때 유권자의 마음은 떠나가게 마련이다. 만약 트럼프의 재집권을 둘러싼 미국 상황이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 정부와 정치권 역시 단체로 확증 편향의 오류에 빠져 있는 게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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