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태평양전쟁 직전까지 극장가 휩쓴 할리우드 서부극
‘전 세계의 작년도에 있어서의 흥행 성적 우수 영화의 주연 배우 조사는 세계 20개국으로부터 통계를 수집한 결과 베스트 텐은 다음과 같이 판명되었다. 1,게리 쿠퍼 2,그레타 가르보 3, 클라크 케이블...’ (‘게리 쿠퍼는 영국에서 인기 제일’, 조선일보 1938년 2월10일)
게리 쿠퍼가 1937년 세계 20개국 흥행 영화 주연배우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뉴스다. 출연작 ‘벵갈의 창기병’ ‘평원아’(平原兒) ‘해(海)의 혼’이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었다.
◇인기 상한가 게리 쿠퍼
게리 쿠퍼는 1930년대 조선에서도 인기를 누렸다. 그는 할리우드 서부극 주인공으로 유명했는데, 1937년 4월28일 경성 약초(若草)극장에서 개봉한 ‘평원아’(The Plainsman)가 대표적이다. ‘파라마운트 창립 25주년 기념작으로 제작된 역작! 링컨의 몰후(沒後)서부 개척에 활약하는 군대와 ‘인데안’과 제휴하는 음모가 사이의 충돌을 취급한 사실에 의한 서부 개척사로 ‘십자군’ 이래 거장 데밀이 오래간만에 메가폰을 들었고, 게리 쿠퍼와 진 아서가 공연하였다.’(매일신보 1937년 4월29일)
일본 굴지의 도호(東寶)영화사가 직영한 약초극장은 1935년 지금의 중구 초동에 지하 1층, 지상 2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세워진, 당시까지 조선 최대, 최신식 극장(1200석)이었다. 약초극장은 광복 후에도 스카라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한국 영화계의 주요무대로 활약을 펼치다 2005년 헐린 비운의 극장이다.
◇스펙터클한 호쾌함과 대리 만족감
1930년대 후반 경성 극장가에서는 할리우드 서부극이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게리 쿠퍼의 ‘평원아’를 비롯, ‘신천지’(Wells Fargo, 1939년 개봉) ‘대평원’(Union Pacific, 1940년 개봉) 등 파라마운트사(社)가 제작한 서부극이 특히 환영을 받았다. ‘신천지’는 도호의 맞수인 쇼치쿠(松竹)의 개봉관으로 1936년 들어선 명치좌(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됐다. 명치좌는 지하2층, 지상 4층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최대 1500명을 수용하는 대극장이었다.
1930년대 중반 중일전쟁을 전후해 할리우드 서부극이 일본에서 크게 유행한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역사학자 이연식은 ‘ ‘만주 개척’에 이어 이제는 중국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대일본제국의 장엄한 대동아공영권 서사가 미국의 서부 개척 내러티브와 친화성을 띠고 있었고 활극 특유의 스펙터클한 호쾌함과 대리 만족감은 제국과 대중의 욕망을 한데 묶어내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경성의 영화배급권은 일본 업체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일본에서의 서부극 열풍은 경성에서 그대로 되풀이됐다.
◇스필버그 ‘인생멘토’, 세실 드밀 감독
‘평원아’ ‘대평원’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감을 준 인생 멘토로 꼽은 세실 블라운드 드밀(Cecil B.DeMille·1881~1959) 감독 작품이다. 스필버그는 세실 드밀이 찍은 ‘지상 최대의 쇼’를 어릴 때 처음 본 인생작으로 꼽았다. 세실 드밀은 찰턴 헤스턴, 율 브리너 주연의 ‘십계’(1956), ‘삼손과 데릴라’(1949)로 널리 알려졌으나 1930년대엔 서부극을 많이 찍었다.
◇'국산(일본산) 영화’보라며 서양영화 ‘스크린 쿼터제’도입
충무로 극장가의 할리우드 서부극 인기는 1930년대 중반 이후 서양 영화에 대한 스크린 쿼터제가 실시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둔 성과라 이례적이다. 총독부 경무국은 극장에서 상영하는 서양영화의 편수를 1935년 전체의 75%, 1936년 66%, 1937년 50%로 제한했다. ‘총독부 경무국에서는 연전에 영화취체규칙을 제정하고 국산영화 장려라는 특수한 입장에서 상영영화의 수량상 통제를 하였다. 즉 소화 10년(1935년)에는 구미의 양화(洋畵)를 4분의3으로 하고 동 11년(1936년)에는 3분의2로 하고 다시 소화12년(1937년)부터는 2분의1로 하기로 결정하야 금년부터는 어떤 영화관에서든지 상연영화에 대하여 서양 영화는 그 절반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제한받는 서양영화 금년부터 절반씩’, 조선일보 1937년 1월8일)
◇태평양전쟁으로 영미영화 수입 끊겨
서양영화 스크린 쿼터제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씨네마 활동 사진이라면 오늘의 도시 생활자들이 눈과 귀를 통하여 얻는 대중적 오락기관으로 내지는 교양의 향상을 위하여 없지 못할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인데, 그 영화는 종래 대개가 미국과 구라파에서 수입되는 것들이고 일부 일본 내지에서 들어오는 것이 없지 않았으나 구미 각국의 그것에 비하여 여러가지 점으로 빈약한 것이 사실이어서 일반의 취미는 구미의 영화를 더 많이 즐겨왔는데….’(위 기사)
대중은 미국,유럽 영화를 즐기는데 총독부는 빈약한 ‘국산(주로 일본산)영화’를 보라고 몰아가는 데 대한 불만이 컸던 모양이다. 국제 정세도 날로 악화됐다. 미국은 1939년 7월 일본에 미일통상항해조약 폐기를 통고하면서 미국 영화 수입도 차질을 빚었다. 여기에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대전 발발은 찬물을 끼얹었다.
‘일반 구라파 영화의 수입은 절망이라고 단연하여도 과히 틀리지는 않을 것’(‘구주대전과 영화계, 양화 수입은 절망’, 조선일보 1939년9월9일)이라는 우려까지 나왔다. 할리우드 서부극 흥행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으로 미국·영국 영화 수입이 완전히 중단되면서 막을 내렸다. 전쟁 선전영화와 국책 영화만 트는 극장가 분위기는 우중충하고 지루했을 것이다.
◇참고자료
이연식, 다시 조선으로, 역사비평, 2024
김려실, 투사하는 제국, 투영하는 식민지, 삼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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