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살롱] 비인간 생명체들과 동맹 일구는 도시 할머니 텃밭에서 배우다
“너희는 우리를 묻어버리려고 했지.”
-디노스 크리스티아노풀로스, '소액의 벌금' 중
수확철이 시작되었다. 대도시의 골목 구석구석 자투리땅과 화분 텃밭에서 자라던 옥수수, 고추, 깻잎, 방아, 대파, 토란들이 슬슬 자리를 비우고 있다. 담벼락을 따라 늘어선 화분에 심어진 생강, 배추, 무들이 가을의 마지막 햇살을 있는 힘껏 끌어당기고 있다. 잠시 멈추어서 사진을 찍는다. 그늘진 초록이다.
도시의 구석진 틈새
빈틈없는 도심 속, 해가 거의 들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놓인 화분 텃밭에서 미지근한 초록을 피워내는 식물들에게 자주 감탄한다. 쓰레기통 옆에서도, 버려진 땅에서도, 묵묵히 인간과의 동맹을 이어 나가는 이 식물들이 나를 묵묵히 살아가도록 격려한다.
이 그늘진 초록을 가꾸고 돌보는 것은 대개 할머니들이다. 티끌만 한 빈틈 한 조각 찾기 어려운 대도시에서 할머니들은 공(空)터를 발견해 뿌리가 있는 초록을 돌보며 나비, 무당벌레, 지렁이, 벌들을 불러 모은다. 흙 속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 균근, 진균들을 불러 모은다. 비인간 존재자들과 함께 거주할 공(共)터를 만든다. 비인간 존재들과 동맹하는 생태적 틈새(ecological niche)를 돌보며 도시의 틈새를 만든다. 우편번호도 없고, 도로명 주소도 없는 틈새의 공유지를 만들고 있는 도시 할머니들의 화분 텃밭에 나는 깊이 매료되었다.
빼앗긴 공유지
오랫동안 공유지는 토지에 대한 권리와 사회적 권력이 약했던 여성들에게 유난히 중요했다. 실비아 페데리치의 책 '캘리번과 마녀'에 따르면 공유지는 여성에게 "사회생활의 중심지, 즉 그들이 회합하고, 소식을 교환하고, 자문을 구하고, 공동체의 사건들에 대해 남자들과 다른 여자들만의 관점을 형성해 나갔던 곳"이었다. 하지만 15세기부터 공유지에 울타리가 설치되고, 토지를 사유화하는 인클로저로 인해 부랑자나 이주노동자, 용병이 되었던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임신과 육아 때문에 이동이 쉽지 않았고, 용병이 되기는 더욱 어려웠다. 삶을 영위하던 물리적 근거였던 공유지가 사유화되고 화폐 관계가 경제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 시기에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먹고 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그중에서도 혼자 사는 늙은 여성들에게 훨씬 잔인했다. 갈 곳이 없고 생존할 수단이 적었기에 집과 토지를 떠날 수 없었던 늙은 여성들은 인클로저에 끝까지 저항했다. 지주들은 늙은 여성들을 쫓아내기 위해 땅을 망쳐놓았고, 헛간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지만, 마냥 물러설 수만은 없었다.
가난한 마녀들
"아침 일찍 한 가난한 여인이 굶어 죽은 아들의 시체를 안고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울면서 지나가자 봉기가 시작됐다." 자식을 굶기지 않기 위해 투쟁에 나섰다. 아내, 미망인, 독신녀, 미혼의 딸, 하녀들은 쇠스랑과 낫을 들고 공유지를 되찾기 위해 울타리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많은 경우 식량 폭동을 일으키고 이끈 것은 여성이었다. 이러한 저항운동에서 여성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그들이 가정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국은 이들을 "쓸모없는 인간들" "가난한 것들" "비천한 자들" 그리고 "마녀들"이라고 불렀다. 저항하며 고분고분하지 않은 가난한 여성 농민들은 손쉽게 '마녀사냥'의 표적이 되었다. 그들은 마을 어귀와 구석진 땅에 씨앗을 뿌려 온갖 채소와 약초들이 자라는 '마녀들의 텃밭'을 일구며 저항했다.
최후의 공유지
인클로저의 거대한 물결이 거의 모든 공유지를 약탈한 19세기에 이르렀을 때,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경작자와 공유지 사이의 연관에 대한 기억조차 사라졌다"고 토로했다. 21세기에 들어선 우리는 공유지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그 '감각'조차 희미하다. 하지만, 도심의 구석진 틈새에서 할머니들이 돌보고 있는 깻잎, 해바라기, 생강, 무가 자라는 화분 텃밭을 보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최후의 공유지를 떠올린다. 도심 속 할머니들이 돌보고 있는 화분 텃밭을 보며 600년간 이어져 오고 있는 마녀들의 ‘저항’을 떠올린다. 쓸모없고, 가난하고, 비천하다고 여겨지는 가난한 도시의 마녀들을 떠올린다. 주차장에 밀려나고, 재개발공사에 밀려나고, 아파트에 밀려나면서도 '경작자와 공유지 사이의 연관에 대한 기억'과 감각을 계승하며 텃밭을 일구며 최후의 공유지를 돌보는 우리 시대의 마녀들에게 이끌린다.
할머니의 씨앗
나는 어쩌다 운 좋게 화분 텃밭을 돌보는 할머니를 뵙게 되면, 신이 나서 어김없이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넨다. 올해 농사는 좀 어떤지, 흙은 어떻게 관리하는지, 씨앗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비료는 어떻게 만드는지··· 이렇게 대화를 이어 나가다 보면 회합하고, 소식을 교환하고, 자문하고 했다던 오래전 공유지의 감각을 느낀다.
어떤 날에는 할머니들께 조개 껍데기를 빻아 직접 만들었다는 비료를 선물받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신문지에 곱게 싸여 있는 씨앗을 선물받기도 했다. 운 좋게 토종 씨앗을 선물받는 날이면, 씨앗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막힌 행운이 따라오기도 한다. "어려서 시집 갔는데 너무 외로운 거야. 그래서 집 앞 마당에 고향에서 받아온 목화 씨앗을 심었어. 우리 엄마가 그 목화 씨앗을 직접 줬어. 분홍색 손수건에 싸가지고. 목화가 키가 크니까, 뭔가 든든하다고 해야 하나, 따뜻하다고 해야 하나, 몰라. 그 목화로 이불도 하고, 겨울옷도 지어 입고 했지. 그때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심고 있는 목화야. 나를 다독여주는 목화지. 너도 한번 심어볼래?"
공유지의 감각적 연결
그 뒤로, 나는 10년 넘게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도시 틈새에서 작은 농사를 짓고 있다. 농부들이 보기에는 그저 하찮은 규모이지만, 나름 진지하다. 집 담벼락 둘레로 화분을 놓고 토종 목화를 기르기도 했고, 작업실 근처 공터에서 토종 옥수수를 재배할 때도 있었고, 쓰레기만 쌓이는 구석진 땅을 개간해 토종 밀과 보리를 재배하기도 했다.
특히, 토종 목화는 할머니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목화를 오랜만에 보네. 어릴 때 목화 다래 따먹다가 많이 혼났는데. 이거 어디에서 씨앗을 구했어?"라고 물어보는 할머니들이 제법 있었다. 토종 목화 씨앗을 나누며 화분 텃밭 앞에서 할머니들과 신나게 수다를 떠는 동안, 일시적으로 환하게 열리는 공유지의 감각을 맛볼 때면 주변이 온통 환했다.
얼마 안 되는 화분 텃밭으로 찾아드는 할머니-지렁이-무당벌레-달팽이-나비-벌과 같은 지구 거주자들과 함께 이 지상에 살아가고 있다는 지구적 규모의 실감에 이르게 했다. 언젠가 화분 텃밭에 지렁이가 찾아와 주었을 때, 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화분 텃밭에 이름 모를 풀이 솟으면, 반가운 마음에 풀 이름을 찾아보고 사진을 찍어둔다. 틈틈이 흙냄새 속 미생물의 시큼한 냄새를 맡으며 화학적으로 교류하며 퇴비를 조절한다. 이러한 감각적 연결망은 비인간 존재들과의 동맹 역량을 키워낸다. 흙은 내 자아를 이루는 중요한 성분이다.
동맹의 역량
도심 구석진 자리에 놓인 화분 텃밭 하나에 깃든 해방과 저항이 있다. 틈새 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빽빽한 대도시 속에서, 공유지에 대한 기억과 감각이 사라진 도시 서울에서, 멸종 가능성으로 둘러싸인 지구에서 "멸종도 아니고 탈출도 아닌 세 번째 방법인 바로 지구에 활력을 되찾아주는 길을 선택"(반다나 시바)하는 일. 활력을, 생-활력을, 생동력을 회복하며 소수적 인간들과 비인간 존재자들과 서로 동맹하는 일. "다른 세계들에 존재하는 생기발랄함과 작용 능력에 대해 사유하도록"(도나 해러웨이)하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한 일이다.
도시에서도 흙을 매개로 꾸려지는 삶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할머니들의 후예로 늙어가고 싶다. 모든 공간들이 사유화된 대도시 속에서 틈새의 공유지를 돌보며 비인간 식물-곤충-미생물들과 동맹하는 마녀들의 후손으로 살아가고 싶다. 어두운 흙 속에서 뿌리 내리는 식물의 이야기를, 토종 씨앗의 이야기를 전승하는 할아버지가 되어야지, 다짐해본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가 씨앗이었다는 걸 잊었지.”
-디노스 크리시티아노풀로스 '소액의 벌금' 중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서한영교 작가가 격주로 글을 씁니다.
서한영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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