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망치거나 말거나 인생은 계속된다

김신회 작가 2024. 11. 9.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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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신회의 매사 심각할 필요는 없지]
날카로운 첫 수능의 추억
못 봐도 나름대로 살아간다
일러스트=한상엽

수능 시험을 치르고 고사장을 빠져나오니 자녀를 기다리는 부모님들 모습이 보였다. 아이의 가방을 들어주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남의 엄마 아빠의 모습에 외로움과 시샘이 동시에 흘렀다. 버스 정류장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으니, 오늘 하루로 모든 게 결정된다는 생각에 공허함이 몰려왔다.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기필코 장밋빛이어야만 한다!

깜깜해진 길을 한참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던 엄마와 언니는 궁금한 게 많은 눈치였지만 나는 시험의 시 자도 꺼내지 말라는 듯이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TV 앞에 작은 교자상을 펴고, 기억나는 대로 답안을 적은 종이를 꺼냈다. 교육 방송에서 방영하는 수능 답안 해설을 보면서 채점할 시간이었다.

강사의 입술에서 진지하게 흘러나오는 정답은 내가 표시한 답안과 모조리 달랐다. 구겨진 종이 위로 하염없이 가위표를 치고 있자니 두 눈 가득 고이는 눈물…. 이상하다. 이렇게 다 틀릴 리가 없는데. 모든 답안 해설이 끝나고, 꼬질꼬질한 종이를 북북 찢으며 나는 목 놓아 울었다. 당시 문 밖에 있던 식구들은 노크조차 하지 못하고 나 혼자만의 드라마에 숨죽이고 있었다.

며칠 뒤, 수능 성적표가 나와 식구들에게 보여주니 식구들은 말했다. “잘 봤네!” 잘 본 거라고? 이게? 점수를 제대로 보라고! 하지만 가족들은 내가 본 시험에서 점수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눈치였다. 당시에는 다들 현실 감각이 없는 것 같아 답답했지만 시간이 지나고야 알았다. 진짜 현실 감각이 없었던 건 나라는 사실을.

학창 시절 내내 나의 성적은 형편없었다. 몸보다 큰 교복을 입고 뱅글뱅글 돌아가는 안경을 쓰고 있어서 얼핏 똘똘해 보였을 뿐이다. 게다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은 다 공부를 잘했기에 그들과 어울리는 나 역시 공부를 잘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당시 나는 어떻게 하면 실제로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보다 그 이미지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경험 나만 있나? 멋지게 생긴 사람과 내내 마주 보며 이야기하다 화장실에 와서 거울을 보면 ‘내가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하며 가슴이 무너지는 경험. 내가 딱 그랬다. 나는 공부 잘하는 친구들을 마주 보고 있었기에, 나 역시 공부를 잘한다고 착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수능 시험에 모든 것을 걸었다. 모든 것을 걸었다면 그만큼 모든 것을 걸고 열심히 해야 했는데, 그저 도박처럼 걸기만 한 채 라디오를 듣고, 교환 일기를 쓰고, 입시와는 관계없는 책만 읽었다. 그러면서도 수능 성적만큼은 잘 나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몇 년 뒤 내가 얻은 건 가위표 그득한 답안지뿐. 나는 딱 공부한 만큼의 점수를 받은 것이다.

지난 7일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외벽에 수험생을 응원하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서울시는 수험생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찹쌀떡이 외벽에 붙어 있는 모습을 연출했다고 했다. /연합뉴스

이후 어찌저찌 대학생이 되었지만 내내 꿈꾸던 캠퍼스의 낭만 따위는 누리지 못했다. 친구들하고 몰려다니며 과자나 먹고, 이른 저녁 집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면서 방바닥을 뒹굴다 잠들었다. 내가 꿈꿔온 대학 생활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꿈꿔온 생활을 영위할 만한 배짱도 근면함도 열정도 없었다. 그저 구린 고등학생에서 구린 대학생으로 약간의 자리 이동을 했을 뿐이다.

기저귀를 갈아가며 돌보던 첫 조카가 며칠 뒤 수능을 본다. 그런데 피는 못 속이는지(!) 조카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는 대학생이 된 선배 이야기를 꺼냈다. 선배의 카톡 프로필 사진에 남자 친구로 보이는 사람 사진이 올라와 있더라며 희망찬 표정으로 말했다. “대학 가면 다 연애를 하나 봐!”

조카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지만 진실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다 그런 건 아니야. 이모는 못 했어.” 난데없는 팩트 전달에 조카는 말없이 쓴웃음을 짓다가도 굴하지 않고 미래의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학생이 되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할 거라고, 부지런하게 대학 생활을 즐길 거라고. 조카의 달뜬 표정을 보면서 속으로 혼잣말이 흘렀다. 조카여, 모든 게 계획대로 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스무 살이 된다 해도 평범한 네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변하진 않을 것이야.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방문을 걸어 잠근 채 격정 모노드라마를 찍던 나를 잠자코 내버려두었던 엄마와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조카도 알게 될 것이다. 인생 최대 위기로 느껴지는 지금이 이후 만날 수많은 비극 중 그나마 작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수능 시험 하나에 모든 것을 걸기에 인생은 너무나 길다는 것을.

수능 시험을 잘 보면 좋다. 하지만 못 봐도 인생은 계속된다. 저를 보세요. 비록 수능은 잘 못 봤지만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내 말에 설득될 수험생은 없으리라는 걸 알기에 그저 응원을 보낸다. 전국의 수험생들, 최상의 컨디션으로 시험 치르시기를. 이제껏 애써온 자신을 믿어주기를. 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아자 아자 화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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