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트라우마가 위대한 창작의 자양분이 된다
[손관승의 영감의 길]
두 거장의 숨결 따라 도쿄 영감 여행
안목을 높이는 비결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자기보다 뛰어난 안목을 가진 사람과 어울리거나 보는 것, 그 수밖에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구마 겐고, 일본의 문학과 건축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대학 캠퍼스에 혼을 불어넣었다니 도쿄 영감 여행의 1번 일정으로 잡았다. 하루키 도서관은 와세다대학 동문(東門) 앞, 그가 즐겨 찾았다는 연극 박물관 옆에 있었다. 작가가 평생 수집한 책과 레코드판 등 방대한 자료를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고 자식도 없어서 모교에 기증 의사를 밝힘으로써 2021년 10월 개관한 도서관이다. 처음에는 하루키 기념관을 만들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 무슨 기념관이냐는 작가의 반대로 공식 명칭은 ‘와세다대학 국제문학관’이다.
도서관은 멀리서도 눈에 뜨인다. ‘대학 4호관’으로 불리던 낡고 특징 없는 콘크리트 상자 모양을 개조한 것으로 반투명 나무 루버 프레임이 음악의 악보처럼 외벽을 휘감고 있다. 문장을 음악의 리듬감에 비유하곤 했던 작가의 생각을 반영한 것일까. 나무 터널을 통해 건물로 들어서니 중앙을 관통하는 넓은 계단참이 보인다. 방문 인증샷 애용 장소로 건물의 층간 슬래브를 두 장 떼어낸 뒤 실내 터널을 만들었다. 도서관에 웬 터널? 책 ‘구마 겐고, 나의 모든 일’에 따르면 하루키 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현실과 비현실, 일상과 비일상의 이중 구조를 터널이라는 건축 언어로 해석했다는 것. “건물 중심에 나무로 덮인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터널을 만들어 대학의 캠퍼스가 지역과 사회에 개방되어 일, 공부, 생활의 경계가 사라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죽어가는 공간에 구멍을 뚫어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인상파에 영향을 준 우키요에 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를 기리는 히로시게 미술관을 설계할 때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자는 의미로 시도한 이후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프랑스 브장송 예술문화 센터, 스코틀랜드 던디의 V&A 박물관, 도쿄의 네즈 미술관도 그의 작품이다. 안도 다다오가 노출 콘크리트 활용 건축으로 명성을 얻었다면, 구마 겐고는 2020 도쿄 올림픽 국립경기장을 지을 때 일본 47개 지역 삼나무를 사용했을 만큼 목재 활용 건축가로 유명하다.
그는 2016년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고향 덴마크 오덴세에 안데르센 박물관 건축가로 참석했다가 마침 안데르센 문학상 수상자 자격으로 온 하루키와 친해지게 된다. 하루키가 수상 연설에서 안데르센의 작품 ‘그림자’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 계기였다. “그림자가 없는 빛은 진정한 빛이 아니고 우리 삶이 견고한 입체적 상태가 되려면 그림자는 필요합니다. 참을성 있게 그림자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은 내면의 그림자를 안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깊은 숲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외롭고 춥고 어둡고, 아무도 도와주러 오는 사람도 없고.” 소설 속의 여성 나오코의 고백이다. 비틀스 노래 ‘Norwegian Wood’는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 노르웨이산 목재를 의미하기에 하루키의 오역 논란도 있었으나, 깊은 숲과 그림자 이미지는 결과적으로 이 소설을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데 한몫한다. 전공투 사건으로 일본 사회가 시끄럽던 ‘멀미 나는 시기’가 작품 배경이다.
7년 다닌 대학 생활에서 배운 것은 별로 없고 지금의 부인을 얻었을 뿐이라고 하루키는 말했지만, 혼란과 정신적 위기는 창작의 위대한 자양분이 된다. 심리학자 칼 융은 인간의 페르소나에서 내면의 그림자는 부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긍정적 무의식까지도 관장해 ‘창조성의 기반’이라 했으니까.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여러 작품에도 그림자가 짙게 담겨 있다. 시대의 트라우마, 마음의 그림자 같은 것들이다.
계단 터널은 지하의 카페로 이어진다. 작가가 젊은 시절 재즈 카페를 운영할 때 썼다는 피아노가 놓여 있고, 그 옆으로 하루키 작업실을 재현한 방이 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주방에서 커피를 만든 뒤 큼직한 머그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아 글 쓰기 위해 컴퓨터를 켠다는 바로 그 데스크톱이다. 독립 작가로 살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자기만의 루틴이 중요하다고 했던 하루키가 어디선가 튀어나와 이렇게 외칠 것 같다. “네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것을 써라!” 오디오 룸에서 구마 겐고가 직접 골랐다는 북유럽 스타일의 빈티지 의자에 앉아 하루키가 수집한 재즈 음반을 감상한다. 소설 배경에 등장하는 신주쿠 재즈바 DUG의 지하 공간에서 담배 연기에 고통받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호사다.
어느덧 하루키의 나이 75세, 구마 겐고는 70세. ‘먼 북소리’에서 하루키의 말이 떠오른다. “누구나 나이는 먹는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떤 한 시기에 달성되어야 할 것이 달성되지 못한 채 그 시기가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두 거장은 여전히 실험과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도서관 터널 아이디어를 하루키에게 처음 설명할 때 평소와 달리 무척 긴장했다고 구마 겐고는 고백한다. “친구 사이지만 그는 대(大) 문학가이기 때문이다.” 가까울수록 상대를 아끼고 존중하라고 했던가. 나이 차이를 잊은 망년지교(忘年之交)의 우정 비결을 이제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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