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신비는 파헤치지 않는 편이 낫다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가리발디
얼마 전에 책 파는 술집에 간 날이 있었다. 현직 문학평론가가 하는 곳으로 ‘취한 정글’을 표방하는 곳에. 술과 사람에 몰두하느라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정글답게 식물이 무성했고, 책꽂이에는 술과 책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나란히’라는 건 좀 과장이고 책꽂이에 다 마신 술병들이 있었다.
내가 한때 원한 적이 있던 인테리어다. 책꽂이 겸 술꽂이에 책과 술을 꽂는 것은 물론 표지가 마음에 드는 책과 술병이 마음에 드는 술을 오브제처럼 놓아두겠다는 것과 책과 술 모두 읽는 거라고 생각해서다. 술 한 병을 사면 술이 태어난 지역에 대한 이야기, 이름에 대한 이야기, 술을 만든 사람에 대한 이야기 등이 함께 딸려 오기 때문이다. 책 파는 술집 사장인 문학평론가가 나 같은 생각에서 술병을 책꽂이에 꽂아둔 것인지는 아쉽게도 묻지 못했다. 책 파는 술집 사장인 문학평론가도 그날 함께 술을 마셨는데 말이다.
그날 술 파는 책방에서 첫 잔으로 마신 것은 네그로니였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나는 네그로니를 좋아하고, 단 한 잔만 칵테일을 마셔야 한다고 하면 네그로니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상하게도 그런 날이 있다. 술을 꽤 마셨는데 취기가 오르지 않고 그래서 계속 술을 원하게 되는 그런 날. 나는 이성이 있는 사람이므로 많이 마시게 된다면 섞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역시 의지가 흐려지고 평소 나의 주관(酒觀)이 통하지 않는 날이 있다. 그날 그래서… 일차에서 연태고량주 큰 병을 마시고 온 이차에서 네그로니를 시키면서도 주저함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C 언니가 나를 따라 네그로니를 시켜주었다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진에 베르무트와 캄파리를 섞어서 꽤 센데 괜찮겠냐고 물었지만, 언니는 내가 마시는 걸 마시겠다고 했다. 술을 좋아하는지 술이 센지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을 정도로 언니의 취향에 대해 모르지만, 언니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게 좋았다. 우리의 두 번째 잔은 가리발디였다. ‘우리’라고 쓴 것은 언니가 이번에도 나와 같은 걸 시키겠다고 해서. 언니는 두 번째 잔에도 만족했다. 그러면서 가리발디는 어떻게 만드느냐고 물었는데 나는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자몽 주스랑 뭔가 섞어요”라고 했는데 그게 뭔지 또 자몽 주스가 맞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고는 다른 칵테일 한 잔을 마신 후 또다시 가리발디 한 잔을 마셨다. 언니는 넉 잔을 나와 같은 걸 마셨다. 집에 돌아오니 새벽 다섯 시였다!
몇 시간 후 부스스 일어나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알 수 없는 물건이 딸려 왔거나 그런 건 아니고, ‘가리발디가 자몽 주스를 탄 게 맞나?’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던 것이다. 가리발디는 어떻게 만드느냐고 언니가 질문했을 때부터 그 의심을 했던 것 같고 가리발디 생각을 꿈에서도 한 듯도 하고. 깨어나서 처음으로 한 말은 “오렌지!”였다. 가리발디는 자몽이 아닌 오렌지주스로 만드는 칵테일이라는 생각이 났고, 역시 캄파리를 섞는다. 그런데 그날 밤에 마셨던 가리발디에서는 자몽 주스 맛이 났는데… 확신할 수는 없다. 술 파는 책방은 상당히 어두웠고, 나는 상당히 술을 마셔서 미뢰가 착란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오렌지 주스와 자몽 주스 맛을 혼동할 정도로 취했다고?
자몽 주스와 캄파리를 섞는 칵테일은 따로 있다. 거품을 뜻하는 ‘스푸모니’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마셨던 밤에 대해서도 쓴 적이 있는데, 술 파는 책방에서 마셨던 가리발디에서는 스푸모니 맛이 났던 것이다. 아… 어떻게 된 일인지 신비롭구나. 그리고 캄파리를 좋아하지만 캄파리와 오렌지주스를 탄 가리발디는 좋아한 적이 없었는데 그날 밤의 나는 왜 가리발디를 두 잔이나 마신 걸까. 우리가 마신 칵테일에 든 것은 자몽 주스였을까 아니면 자몽 주스라고 착각한 다른 무엇이었을까. 어떤 신비는 파헤치지 않는 편이 나으니 그날 마신 가리발디도 그냥 두겠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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