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기계음’ 담긴 녹취록…선인가 필요악인가

2024. 11. 9.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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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전지적 시네마 시점
조지 부시 입영 비리 사건을 담은 ‘트루스’. [사진 각 영화사]
미국 대통령 선거의 치열한 접전 양상 속에서 개봉됐음에도 흥행 면에서 참패한 ‘어프렌티스’에는 마키아벨리스트인 로이 콘(제레미 스트롱)이 법정에서 재판이 불리하게 된 트럼프(세바스찬 스탠)를 끌고 골방으로 들어 가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에는 각종 녹취 테이프가 즐비하게 놓여 있다. 모두 불법으로 도청한 것들이고 정재계 거물들의 비리들이 녹음돼 있다. 로이 콘은 그중 하나를 꺼내 법무부 국장, 법안 심사위원회 위원장을 협박해 재판을 승리로 이끈다. 로이 콘은 트럼프에게 자신의 그런 행동이야 말로 미국을 위한 길이고 특히 자유민주주라는 대의를 위해서라고 강변한다.

영화 ‘트루스’(2016) 역시 제보와 녹취, 인터뷰 진술이 갖는 현대사의 중차대한 모티프를 다룬 영화다. CBS의 전설적인 앵커 댄 래더를 뉴스 캐스터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조지 부시 입영 비리 사건도 특정 제보에서 시작됐다. 조지 부시가 베트남전 징집을 피하기 위해 공군방위사령부의 한 한가한 부대에 배속됐고 그나마 군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서류가 입수된 것이다. CBS의 간판 프로 ‘60미니츠’의 뉴스 프로듀서 메리 메이프스(케이트 블랜쳇)는 확신을 갖고 이 사건을 공개한다. 때는 부시의 두번째 대통령 선거가 목전인 상황이다.

이젠 누구나 녹음·녹취, 오남용 문제
도널드 트럼프의 젊은시절을 그린‘어프렌티스’. [사진 각 영화사]
메리 메이프스는 자신의 보도가 객관적이고 사실에 입각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녹취와 인터뷰를 따내려 애쓴다. 그리고 관계자들로부터 결정적인 증언을 ‘따내는 데’ 성공한다. 문제는 당초의 제보 서류가 위조된 것이라는 의혹이 퍼진다는 것이다. 모든 진실 공방은 본말이 전도되고 지엽적인 사실 부분에 대한 논쟁으로 번져 결국 전체의 진실이 흐려지게 되는 경향성을 띤다. 이슈를 다른 이슈로 덮는 방식인데, 부시 입영 문제는 결국 CBS의 오보로 결론지어지게 되고 이후 미국 언론사에 팩트 체크의 강박성이라는 전대미문의 엄혹한 과제를 던져 주게 된다. 메리 메이프스는 이 서류가 진짜라는 점을 입증하기 보다 가짜가 아니라는 점을 밝혀야 하는 이상한 딜레마에 싸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스마트폰과 SNS가 괴물 같은 존재로 발달하기 전에 녹취는 기껏해야 도청 수준이었다. 정교하더라도 일정한 부피와 사이즈의 기계 장치가 동원돼야 하고 그것을 설치하기 위해 특정한 작전세력을 활용해야 하는 만큼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늘 탄로나기 일쑤였고 급기야 재판에서는 도청 자료를 법정 증거로 사용하지 못하게 했거나 엄격한 제한을 가하게 했다. 불법으로 타인과의 대화를 공개, 폭로하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수단이 정당하지 못한 만큼 진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고심의 결정인 셈이다. 무엇보다 도청 자체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수준이다. 용의자나 피의자의 범죄 행각을 추적하기 위해 도청이 필요하더라도 그에 준하는 법적 절차, 법원의 허가를 반드시 받아야만 하도록 돼있다.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은 그래서 엄청난 범죄 행위로 기록되고 있다. 닉슨이 1972년 있을 자신의 두번째 대통령 선거에 활용하기 위해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이 있는 워터게이트 빌딩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침입해 불법적인 도감청을 하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닉슨은 자신이 도청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국민들은 도청 자체보다는 닉슨의 거짓말에 등을 돌렸고, 결국 그는 하야하게 됐다. 결국 도청과 녹취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된 셈이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가 바로 ‘대통령의 사람들’(1976)이다.

예전의 도청 녹취는 로이 콘 같은 비뚤어진 권력자나 백악관, CIA, FBI같은 권력 기관이 쥐고 흔들었던 사안이다. 일반인이 나설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2020년대, 녹취란 피플 파워의 중심 안으로 들어 왔다. 이제 모두가 녹음과 녹취를 한다. 그걸 두려워 하지 않으며, 만일을 위해 스마트폰의 자동녹음 장치를 제거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역설적으로 녹취의 민주화, 녹취의 국민화, 녹취의 평등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문제는 그 남용과 오용에 있다.

1974년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의 끝물에 발표돼 이 문제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던져 준 영화가 바로 ‘대부’ 시리즈로 유명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컨버세이션’이다. 해리 콜(진 해크만)은 감시와 도청 전문가이다. 그는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타인의 대화를 훔쳐 듣는 것에서 마음의 평온을 얻는 기이한 성격이다. 어느 날 그는 두 남녀의 대화를 도청하다 자기 의뢰인의 부인이 살해당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는 살인을 막으려고 애쓰지만 동시에 그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는 점점 도청에 매달리고 편집증과 강박증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진실이 꼭 진실만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녹취와 도청은 진실의 파편일 경우가 많다. 몇 개의 조각으로 진실의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자만에 빠지면 안되는데도 늘 그런 실수가 나오게 돼있다는 점을 영화는 보여 준다. 대중들이 녹취에 열광하는 것은 사회병리학적인 측면으로 볼 때 일종의 관음증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현상이다. 사람들은 훔쳐보고 엿듣는 것을 좋아한다. 문제는 그것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될 때 결과적으로 도덕이 붕괴하고 인간관계가 무너지며 개인의 자유가 훼손된다는 점이다. 결국 개개인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기도 한다.

녹취·도청, 진실의 파편인 경우 많아
엿듣는 것이 화제가 되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건강해질 수가 없다. 영화 ‘컨버세이션’은 바로 그 점을 우울한 냉소주의로 그린 작품이다. 결국 진실의 조각을 전체의 틀로 올바르게 구성해 내고 연역과 귀납의 논리를 세워 나가는 수순을 잘 밟아 나가야 한다. 결국 인문학과 역사가 그런 건강한 논리의 추출물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불륜의 방랑아’. [사진 각 영화사]
1990년에 나온 이상야릇한 제목의 영화 ‘불륜의 방랑아’(원제는 ‘투 제이크스’. 두명의 제이크란 뜻이다.)도 녹취로 시작된다. 한 유력한 부동산업자의 미인 아내가 호텔 방에서 다른 남자와 밀어를 속삭이고 정사를 벌이는 내용이 모든 사건의 단초가 된다. 주인공이자 혼외정사를 캐고 다니며 녹취하고 사진을 찍는 일로 살아 가는 사립탐정 제이크(잭 니콜슨)는 결국 자신의 녹취와 증거사진이 대형 사건을 가리기 위한 눈속임용이었음을 알게 된다. 거대한 부동산 개발 비리가 있고 그래서 누군가를 제거해야 하는 음모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녹취가 과연 누구의 손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도 면밀히 들여다 봐야 하는 이유다. 남의 대화를 엿듣는 것으로 모든 진실을 파헤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대화와 진술은 정당하게 공개되고 보여져야 한다. 그러기에 앞서 권력자와 권력기관이 부정과 비리로 얼룩져서는 안된다. 부정과 비리의 권력은 그것을 감추기에 급급할 것이고 그걸 파내기 위해 언론과 사회단체가 어쩔 수 없이 녹취를 사용하게 되는 경우도 무시할 수 없다. 이건 빈곤의 악순환이다. 병든 사회의 전형이다.

영화는 대체로 녹취를 부정적으로 다룬다. 진실을 캐내기 보다는, 아니 진실을 캐내려 하다가 점점 더 상대의 치부를 들춰내는 악취미, 새디스틱한 욕망에 빠져 들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익명의 기계음은 결국 악마의 속삭임일 수 있다. 손석구 주연의 ‘댓글부대’는 특정세력이 개인간 정보를 독점하고 악용하게 될 때 사회의 도덕은 점점 더 그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 결국 그 모든 걸 극복하는 것은 정당성과 공정성을 확보하는 길이다.

‘블로우 아웃’. [사진 각 영화사]
브라이언 드 팔마의 ‘블로우 아웃’ (1981)에서 주인공 잭(존 트라볼타)은 음향효과 감독이다. 그는 평소 소리를 채집하고 다니는데 어느 날 물에 빠진 자동차 안에서 위험에 처한 여자를 발견한다. 그 차 안에는 유명 정치인이 이미 죽어 있는 상태다. 잭은 자신이 채집한 소리를 분석하며 사건을 유추해 낸다. 그는 결국 살해 위협에 처해 있는 여자를 구하게 된다. 녹취는 결국 사람을 살리는 데 써야 한다. 사람을 살리려는 기운이 강하면 사회가 건강해진다. 세상이 평화로워진다. 블로우 아웃은 뭔가가(사건의 진실 같은 것이) 분출된다는 뜻이다. 진실이 넘쳐나는 세상은 정녕 요원한 것인가. 녹취는 선인가, 필요악인가. 많은 영화들이 묻고 있는 질문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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