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넘나들며 끊임없는 파격, 실험미술 거장 이강소

2024. 11. 9.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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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친구들
이강소(1943~)는 대구 출생이다. 대구 시내에 있는 경북대 사범대학부속국민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이긴 해도 엄연한 국립학교였다. 한 학년에 두 반만 있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환경이 좋은 학교였다. 이강소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이 학교는 유능한 외부교사를 초빙하여 학생들을 지도하게 했다. 한국이 가난할 때다. 학생들에게는 미술재료가 턱없이 부족했다. 어찌 된 셈인지 이강소에게는 종이며 크레용이 풍족했다. 학교를 빨리 입학하여 11살에 6학년이 되었다. 이때 부친으로부터 카메라를 선물 받았다. 짜이스 이콘 TLR이었다. 두 개의 렌즈가 달린 묵직한 카메라는 초등학생이 들기에 버거웠다. 그걸로 내가 아닌 카메라라는 타자의 눈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조부는 서울에서 일가를 이루어 대구로 내려왔는데 상당한 견식의 컬렉터였다. 부친 또한 상당한 실력의 서예가였다. 모필 문화의 기운을 호흡하면서 자란 이강소는 나중에 서체에 기반한 독특한 화풍을 완성한다.

대구시장·경북도지사 금일봉 받아내
회화,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의 실험미술을 해온 이강소 작가가 경기도 안성 작업실에서 상념에 잠겨 있다. [사진 갤러리현대]
이강소는 수재들만 간다는 경북중학교, 경북고등학교를 다녔다. 경북고의 미술반 활동은 왕성했다. 여름방학이면 동해안의 구룡포로 가서 며칠씩 묵으며 그림을 그렸다. 가까운 구미에는 1박을 하고 왔다. 토요일은 대구 방천에서 사생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청운회’라는 미술그룹을 결성했다. 청운회의 그룹전을 하려면 전시장이 있어야 했다. 대구역 서쪽에 붉은 벽돌로 지은 육군공회당이 있었다. 공회당의 4층은 육군 극장이었는데 1층은 비어 있었다. 관리 책임은 대구 성서에 있는 50사단이 맡고 있었다. 이강소는 50사단을 찾아갔다. 풋풋한 학생들이 막무가내로 장소를 빌려달라 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는지 군인들은 결국 장소 사용을 승낙했다. 전시장으로 쓸 1층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바깥에서 전기를 끌어다 조명을 설치했다. 청소까지 하고 나니 번듯한 전시장이 되었다. 학생들은 대구시장, 경북도지사 등을 찾아가 전시를 위한 금일봉까지 받아냈다. 순진하나 대담한 소년들이었다.

1년 후에 열린 제2회 청운미술전의 전시장은 새로 지은 노동회관이었다. 전시 오프닝 날짜가 1960년 2월 28일이었다. 전날부터 학원의 정치 도구화에 반대하는 대구 시내 8개 고교 학생들의 모임이 있었다. 다음날 대구에서 큰 시위가 있었다. 이른바 2·28 학생의거였다. 시위를 마친 경북고 친구들이 전시장으로 몰려들었다.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이강소는 고등학생 때부터 유화를 그렸다. 고교 3학년 때 홍익대에서 주최하는 전국학생실기대회에 참가하여 장려상을 받았다. 그림을 그리는데 뒤에서 키가 아주 큰 교수가 이강소의 그림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자그마한 장난감 팔레트의 구멍 사이로 엄지손가락을 넣은 채 심각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이 좀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그가 바로 김환기(1913~1974)였다.

이강소가 1975년 파리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무제-75031.’ 살아있는 닭이 석고가루 위에 흔적을 남기게 한 작품.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미군부대에서 라이프지 등 여러 책이 쏟아져 나와 대구 시내 헌책방에서 팔렸다. 라이프지는 미술, 음악, 영화, 무용 등 여러 장르의 예술을 실시간으로 소개했다. 소년 이강소는 이들 책을 사서 보았다. 미술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다. 원곡 김기승(1909~2000)으로부터 서예를 배웠다. 일주일에 한 번 임응식(1912~2001)으로부터 사진을 배웠다. 장욱진(1917~1990)으로부터는 드로잉을 배웠다. 장욱진의 집은 서울대 미대에서 가까운 혜화동 로터리의 우리은행 골목에 있었다. 집 앞의 두 평 남짓한 공주집으로 학생들을 이끌었다. 수업 시간에 말이 없어서 좋은 선생님인데 술까지 함께 마셔 주니 더욱 좋은 선생님이 되었다.

한묵(1914~2016)이 파리로 떠난 것은 1961년이다. 그는 그때까지 누하동에 살았다. 한묵의 누하동 2층 작업실 당호는 ‘면회 5분’이었다. 파리에 너무나 가고 싶었던 한묵은 파리행의 결기를 ‘면회 5분’으로 압축하여 종이에다 써서 출입문에 붙여놓았던 것. 한묵이 떠난 작업실을 이강소 등이 인수한 것은 1963년이다. 경북고, 서울대 미대 후배인 권순철, 시사만화가 오룡 등이 합류했다. 청춘들이 모여 밤새 토론을 하다가 지치면 술을 마셨다. 그 집은 1970년대 중반에 중국식당 영화루로 변모했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서촌의 핫 플레이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강소는 첫 개인전 ‘소멸’을 명동 YWCA빌딩 지하의 명동화랑에서 열었다. 전시장에는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고, 탁자 위에는 막걸리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관람객들이 와서 의자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는 이벤트였다. 작품이 걸려야 할 곳은 응당 미술관, 화랑의 벽면이라는 관념을 깨부순 전시였다. 작품은 보이지 않고 관객들이 막걸리를 마시는 행위가 작품이 되었다.

이강소는 예술가이자 동시에 행동가다. 이강소는 주변을 설득하여 새로운 미술운동을 도모하는 데에 선도적이었다. 서울대 미대 동기생들과 결성한 신체제전, 당대의 실험적인 작가·평론가들이 결집한 AG전에서 활동하면서 이강소는 좀 더 확장성과 포용력이 있는 미술운동을 구상했다.

이강소가 주도한 대구현대미술제는 1974년 계명대학교 미술관에서 출발했다. 1977년의 제3회 대구현대미술제는 대구시민회관과 낙동강 강정백사장에서 열렸다. 화랑과 미술관을 떠나 낙동강변에서 펼쳐진 대구현대미술제에 모인 작가들은 신체·시간·중력 등을 주제로 한 새로운 조형적 실험을 시도했다. 1979년 제5회 대구현대미술제는 이우환의 추천으로 일본에서 무려 15명의 작가가 참가하여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해에는 아내 이정윤이 대표를 맡은 리화랑이 대구 시내에서 개관했다. 황현욱이 기획을 맡아 ‘한국현대미술가 6인의 방법’이란 전시를 했는데 김창렬·김환기·박서보·윤형근·이우환·하종현이 출품했다. 40년이 지난 오늘, 이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서울과 일본의 현대미술 작가들이 대구를 자주 방문하거나 전시를 열게 되면서 대구현대미술계의 위상과 자긍심이 높아졌다. 행동가 이강소가 거둔 보람이었다.

신체제전·AG전 등 미술의 확장 이끌어
이강소의 1973년 퍼포먼스 ‘소멸-선술집’.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975년 제9회 파리비엔날레에 심문섭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이강소의 두 개의 출품작 중의 하나는 ‘무제-75031’였다. 전시장 홀 가운데 돗자리를 깔고 목재 닭 모이통에 살아있는 닭을 긴 줄로 묶었다. 모이통 주위에 횟가루를 뿌려놓아 닭이 움직인 흔적이 남게 했다. 며칠 후 닭은 농장으로 도로 보냈다. 그동안의 경과를 찍은 10장의 사진을 걸고, 닭이 움직인 실제의 흔적을 남기고 닭이 묶인 채 움직인 행동반경을 분필로 그렸다. 이 작품이 크게 주목을 받았다. 프랑스 국영 TV 방송에 출연했다. 불어에 능통한 평론가 이일이 해설을 해주었다.

1991년은 바빴다. 뉴욕의 PS1 프로그램에 한국작가 최초로 참가했다. 안소니 카로가 1982년부터 미국 베닝턴에서 시작한 트라이앵글 워크샵은 후학들로 하여금 주제와 형식의 혁신을 일깨우게 하는 모임이었다. 1991년, 이강소와 화가 김춘수는 세계 10여 개국의 작가들과 함께 이 워크샵에 참가하였다. 워크샵이 끝나던 날 카로는 파티를 성대하게 열어주었다. 연못가에서는 불꽃놀이 폭죽이 터졌다. 댄스파티가 열렸다. 이강소는 카로의 부인과 댄스파트너가 되었다. 카로의 작업실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이강소는 처음으로 큰 작업실에 대한 꿈을 키웠다. 1995년, 이강소는 경기도 안성에 대규모 작업실을 마련했다.

서울의 나비스 화랑 대표 김성희의 노력으로 1992년 4월 테이트 리버풀에서 ‘자연과의 작업-한국현대미술의 전통적 사고’전이 열렸다. 김창열·정창섭·이강소·이우환·윤형근·박서보와 함께 이강소가 참가했다. 세계 미술계가 알아주는 이강소도 어느덧 노경에 이르렀다. 어릴 때 부친에게서 받은 카메라가 던진 화두는 여전하다. 이 세상은 내가 보는 건가 아니면 카메라가 보는 건가. 아니면 나의 꿈이 보는 건가.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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