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키워드] 사과

김홍준 2024. 11. 9.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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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국에까지 소환해야 한다니. 배우 황정민과 유해진에게 먼저 사과드린다. 영화 ‘베테랑’에서 황정민이 열변을 토한다. “당신들 그 미안하다는 말 한번 하면 끝나는 거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질질 끌어?” 유해진이 질질 끄는 이유가 있다. 사과는 잘못의 인정이고 부정적 평가가 따른다. 그래서 모르쇠, 좋게 말해 묵비권으로 이어지는 건 자신과 타인의 경험을 통해 습득한 심리의 발현이다.

그런데도 윤석열 대통령은 일정을 앞당겨 지난 7일 대국민 담화에서 연신 사과했다. 취임 후 처음으로 허리를 굽혔고, “사과” “죄송” “잘못” “불찰” 등의 단어를 12차례 썼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뭔가 허전했다. 그것도 상당히.

사과는 허리 굽혀 단어를 나열한다고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다. 사과는 언어의 미학이다. 언어학자인 바티스텔라 서던 오리건대 교수에 의하면, 사과에는 감정을 담아야 하고 잘못을 소상히 알려야 하며 상대 마음을 헤아려 구체적 대안을 내놔야 한다. 단어와 맥락의 융합, 감성과 이성의 조율, 귀납과 연역의 병렬, 과거와 미래시제의 호응을 하나의 패키지처럼, 물 흐르듯.

윤 대통령의 사과는 감정 전달까지만 이뤄진 것 같다. 자신의 상황을 드러내느라 뒤이어 나와야 할 것들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 헛헛하다. 사과하기 이전에, 사과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게 가장 좋겠지만. 언어와 현실 사이의 벽이 높겠지만.

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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