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페인송으로 ‘프리덤’ 선택, 해리스 음악 전략도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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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호의 예술과 정치
자메이카계 흑인과 인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카멀라 해리스는 대선 내내 다층적 정체성으로 발목 잡혔다. 트럼프는 지난 여름 해리스가 부상하자 “그녀는 최근에야 흑인이 되었다”고 공격했고, 팝가수 재닛 잭슨은 “해리스는 흑인이 아니다. 내가 듣기로는 인도 사람”이라고 영국 가디언지에 인터뷰했다. 하와이 출신 버락 오바마는 ‘진짜 흑인’ 미셸을 곁에 두고 약 15퍼센트에 달하는 미 흑인 유권자에 다가섰지만, 해리스는 흑인 유권자 비율이 30퍼센트를 웃도는 조지아에서 패하는 등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인 흑인 공략에 실패했다. 정치인의 문화적 취향을 대중에 노출하고 득표로 연결하는 선거 준비의 기본적 세팅이 부실했고 큐레이팅도 설익었다.
민주당 전당대회 기간, 유명 스트리밍사이트 스포티파이를 활용한 캠페인은 해리스의 흑인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알릴 기회였다. 그런데 홍보 모델은 인도계 영국인 싱어송라이터 찰리 XCX가 맡았다. 약물 입법 강화에서 기호용 마리화나 허용으로 급선회한 해리스는 각성제 사용을 권하는 노래와 조급하게 손 잡으며 결국 흑인 정체성 공세를 되받아칠 기회를 날렸다. 최대경합주 펜실베이니아에선 그곳 출신 테일러 스위프트의 강력 지지에도 패했다. 백악관 노예 해방기념일 행사에서 흑인 가스펠 가수에 이끌려 어색하게 춤추는 장면이 해리스가 지닌 흑인 정체성이었다.
이제 2025년 1월 트럼프 2기 대통령 취임식에 어떤 음악가와 가수가 오를지가 음악계의 관심사다. 2017년 1기 취임식에는 준비위원회가 초청한 저명 음악 인사들이 대거 불참해, 공개 오디션에 입상한 가수 에반 제키초가 미국 국가를 불렀다. 축하연에서 부인 멜라니아와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에 맞춰 춤을 추며 임기를 시작한 트럼프는 2020년 대선 패배 후 빌리지 피플의 ‘YMCA’를 틀고 전용기에 오르며 ‘다시 돌아오겠다’는 문자를 소셜미디어에 올렸었다.
세 차례 대선 동안 트럼프는 2016년 미국 대중음악 잡지 ‘롤링스톤’에 밝힌 플레이리스트와 거의 동일한 음악 취향을 유지했다. 흑인 가스펠 싱어 니나 시몬, 북아일랜드계 블루스 뮤지션 밴 모리슨을 꼽은 건 상대적으로 취약한 득표층을 향한 손짓이었다. 내치와 외교에서 불가피하게 클래식 음악과 음악가를 섭외하던 과거 미국 행정부와 달리 트럼프는 의전에서 클래식 뿐 아니라 음악 선곡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2019년 6월 공식 방한 때도 그랬다. 오산기지 격납고에서 열린 미군 위문 행사에 트럼프가 등장하자 록그룹 AC/DC의 ‘썬더스트럭(Thunderstruck)’이 흘러 나왔다. 우리 정부는 20분으로 조율된 청와대 국빈만찬 음악 무대에 KBS교향악단을 투입하고 미 대통령 의전 입장곡 ‘헤일 투 더 치프(Hail To The Chief)’, 주페의 ‘경기병’ 서곡을 연주하며 기존 트럼프 행사 음악과 보조를 맞췄다.
트럼프가 재입성할 백악관은 미국 클래식계에선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연 예술장”으로 불린다. 미국 2대 대통령 존 애덤스 시절 완공된 백악관은 평소엔 대통령 집무 공간이지만 밤이면 미국 클래식 역사를 빛낸 거목들이 거쳐간 명소다. 미 헌정 역사를 살피면, 초대 워싱턴 대통령 시절부터 최고 권력자 주변에 클래식이 함께 했다. 워싱턴의 손녀 넬리가 바흐의 ‘클라브생을 위한 소나타’를 즐겨 연주한 기록이 있다. 존 아담스는 부인 아비게일과 파리 방문에서 글룩의 오페라를, 영국 방문에서 헨델의 오페라를 관람했다.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클래식 악기를 가장 잘다뤘다고 평가받는 토머스 제퍼슨은 손수 코렐리와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고, 헨델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를 직접 편곡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1963년 암살당한 케네디의 예술 취향을 기억하는 장소도 공연장인 케네디센터다. 1971년 9월 레너드 번스타인 작곡 ‘미사’로 개관했지만, 개관작을 의뢰한 미망인 재클린은 개관 공연에 불참했다. 개관 3년 전 선박왕 오나시스에 재혼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대신 케네디의 모친 로즈가 행사 안주인이 됐다. 케네디는 생전에 워싱턴 내셔널 오페라를 가까이 했고, 케네디센터는 지금도 오페라와 발레를 포용하면서 워싱턴 클래식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한다.
냉전 시기 소련과 첨예하게 갈등한 미국 대통령들에게 클래식은 위로를 제공했다. 트루먼은 15세에 콘서트 피아니스트와 정치인 사이에서 진로를 정했고, 쇼팽 왈츠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평생 즐겼다. 린든 존슨은 1958년 적성국 소련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 우승한 텍사스 출신 반 클라이번을 각별히 아꼈다. 존슨의 백악관은 반 클라이번의 우승을 공산주의를 제압한 자유 진영의 승리로 치환해 홍보했다. 반 클라이번은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 전인 트루만 정부 시절부터 말년에 오바마 정부까지 각 대통령들과 친교를 나누며 백악관에서 본인 연주회를 가졌다. 대통령들은 당적 구분 없이 그를 불렀고 정객들과 즉흥 연주를 함께 했다. 반 클라이번이 미국 클래식의 상징이 된 이유다.
미 대통령 역사에 음악과 클래식을 성공적으로 사용한 대표 사례는 오바마다. 2015년 찰스턴 흑인 교회 총기 사건 희생자 장례식에서 오바마는 교계 지도자 앞에 서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선창했다. 오바마 육성에 맞춰 목회자는 추임새를 넣고 추모객은 노래를 따라 불렀다. 비극도 화합으로 이끄는 음악의 힘을 오바마가 보여줬고, 워싱턴포스트는 이를 오바마 재임 8년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았다. 2008년 1기 취임식에서 백인(이차크 펄만), 아시아계(요요마), 히스패닉(가브리엘라 몬테로), 흑인(앤서니 맥길) 4중주를 편성해 미국의 인종 융화를 대외에 과시한 것도 오바마다. 미셸은 “어렵게 익힌 클래식 사운드가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고 상상력을 촉진한다”고 남편의 음악 정치를 뒷받침했다. 과연 트럼프 2기 백악관 음악 정치는 어떻게 전개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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