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장품 사업 진출하는 장수기업 국내 토종 장수기업이 ‘뷰티’를 만나 ‘힙’(멋지다의 신조어)하게 변신하고 있다. K뷰티 시장을 놓고 올해 100주년을 맞은 장수기업 하이트진로그룹과 삼양그룹이 맞붙는다. 반세기 이상 한우물을 파온 전통의 제약업계도 참전한다. 유한양행·동국제약·동화약품 등은 잇달아 뷰티·미용기기 기업을 인수하며 뷰티업계에 출사표를 던졌다. 식품·제약업계는 정체기·과포화기에 직면한 시장에서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뷰티로 전선을 확장하는 모양새다.
올해 창사 100주년을 맞은 대표적인 장수기업 하이트진로그룹이 변화를 꾀하고 있다. 하이트진로그룹은 지난달 국내 화장품 제조개발생산(ODM)업체 비앤비코리아 지분 전량을 인수했다고 밝혔다. 이번 변신을 주도한 곳은 하이트진로그룹 계열사 서영이앤티다. 하이트진로그룹 오너 3세이자 박문덕 회장의 장남인 박태영 하이트진로 사장이 최대주주(지분율 58.44%)로, 하이트진로그룹의 승계 고리 핵심으로 꼽힌다. 서영이앤티 관계자는 “그룹의 사업 다각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행보”라고 강조했다.
오너 3·4세 경영 세대교체도 영향
토종 주류 기업의 변신은 코로나19 이후 달라진 음주 문화의 영향이 크다. 불황에도 국민 시름을 덜어주던 국민 술 소주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희석식 소주 출고량은 84만4250㎘으로, 2019년 91만5596㎘에서 뒷걸음질 쳤다. 하이트진로의 주력 제품인 소주 매출도 2022년 9585억원에서 지난해엔 9535억원으로 0.8% 감소했다. 주류만 믿고 있을 순 없는 상황이 온 셈이다. 허재균 서영이앤티 대표는 “화장품 제조회사 비앤비코리아를 통해 종합 식품을 뛰어넘어 라이프 스타일 선도 기업으로 새롭게 도약할 것”이라고 밝혔다.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삼양그룹도 K뷰티에 빠졌다. 삼양그룹은 1924년 창립 후 설탕·밀가루 등 식품사업으로 출발, 화학·바이오까지 꾸준히 사업 영역을 넓혀온 장수기업이다. 화장품 사업으로의 외도는 2012년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초기에는 1세대 로드숍 브랜드에 밀리고 코로나19 여파로 중국 소비자가 급감하면서 안착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2022년 올리브영 입점과 꾸준한 화장품 개발·출시로 입소문을 타면서다.
대표 제품인 메디앤서 콜라겐 마스크는 올해 10월 기준 누적 판매량 2900만 장을 달성했다. 삼양그룹의 식품·화장품 계열사인 삼양사 관계자는 “기능성 ‘더마 화장품’을 지향하는 메디앤서의 콜라겐 마스크팩이 인기를 끌면서 라인업을 확대하고 있다”며 “별다른 광고도 하지 않았는데, 분자 크기를 줄인 초저분자 콜라겐을 사용한 효능이 알려지면서 가격보다 품질을 우선시하는 고객층의 호응이 두터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제약업계 장수기업이자 연고제 라이벌인 동국제약과 동화약품도 뷰티 시장에서 다시 한 번 맞붙을 준비를 하고 있다. 마데카솔(동국제약)과 후시딘(동화약품)으로 국내 상처치료제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두 제약사는 올해 나란히 미용의료기기회사를 인수했다. 동국제약은 5월 미용의료기기 업체인 위드닉스를, 동화약품은 9월 미용의료기기업체 하이로닉을 인수했다.
제약업계에선 동화약품(1897년 창립)이 대선배 격이지만, 뷰티 분야에서 앞서나간 것은 동국제약(1968년 창립)이다. 동국제약이 마데카솔 성분을 이용해 더마 코스메틱(피부개선 화장품)인 ‘마데카크림’으로 새 바람을 일으킨 것이 2015년. 지난해 말까지 홈쇼핑에서 역대 최다 수준인 180여 회 매진 기록을 세우며 승승장구해왔다. 동국제약의 뷰티·헬스케어 사업 부문 지난해 매출은 1350억원. 전체 매출의 18.4% 수준이다. 올 상반기에는 20%도 넘어섰다. 동국제약 관계자는 “지속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다양한 피부 고민을 가진 소비자를 위해 고기능 제품군, 뷰티 디바이스까지 제품 라인업을 확장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후발기업 차별화된 경쟁력이 과제”
동국제약의 종합 뷰티기업으로의 도약은 제약업계에 자극제가 됐다. 동화약품은 2021년 후시덤 성분을 함유한 올인원 크림 ‘후시드크림’으로 도전장을 냈고, 올해는 코스닥 상장업체인 미용의료기기 하이로닉 인수에 500억원 이상을 과감하게 투자하며 영토 확장에 나섰다. 동화약품 관계자는 “지난 7월 올리브영을 통해 선보인 후시다인 더마 포어 라인은 출시 3개월 만에 더마 코스메틱 부문 1위로 선정될 만큼 반응이 뜨겁다”며 “동화약품은 다양한 고객의 피부 고민을 해결하는 차별화된 기능성 화장품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올해 창립 98주년을 맞은 유한양행도 프리미엄 뷰티로 승부수를 띄운다. 지난해 10월 비건 선케어브랜드 딘시를 론칭하며 뷰티 사업 진출을 선언한데 이어, 지난 7월에는 전자기기 부품 제조사인 성우전자와 협력해 의료·미용기기 사업으로 발을 뻗었다. 조욱제 유한양행 대표는 “이번 협력을 통해 뷰티사업 및 의료·미용기기 분야에서 양사의 기술력과 노하우를 결합해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하고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식품·제약업계가 K뷰티를 신성장동력으로 삼은 이유는 자명하다. 글로벌 확장세가 두드러져서다. 관세청 무역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화장품 수출액은 48억2000만 달러(약 6조600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18.1% 증가했다. 이는 코로나19 이전 최대 수출 규모(2021년 상반기 46억3000만 달러)를 뛰어넘는 역대 최고치다. 전문가들은 식품·제약업계가 본업에서 터득한 기술력을 화장품에 접목해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뷰티 인플루언서인 피현정 더파이컴퍼니 대표는 “요즘 소비자들은 성분과 기능을 일일이 따질 정도로 전문가 수준의 높은 품질을 기대한다”며 “기존 의약품으로 쌓은 신뢰도 등에 더해 연구개발(R&D)에 꾸준히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특정 장수브랜드로 오랜기간 사업을 영위해온 만큼, 사업 다각화와 글로벌 진출이 필수가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는 기업의 세대교체와도 맞물려있다. 동국제약의 오너 3세인 권병훈 씨는 최근 인수한 리봄화장품 이사회에 합류했고, 동화약품도 오너 4세인 윤인호 부사장이 2022년 최고운영책임자(COO)에 오른 이후 공격적인 외형 확대를 이어가고 있다. 다만 새 영역 찾기에 이어, 후발주자인 이들 기업이 뷰티 시장에서 어떤 차별화된 경쟁력을 보여줄 것인가는 또 다른 과제가 됐다는 지적이다. 최근 인디브랜드 중심으로 K뷰티의 인기가 급상승 중이지만, 브랜드 기준으로는 세계적 영향력이 크지 않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학과 교수는 “장수기업이지만 이종(異種)산업에 진출한다는 측면에서, 기존 브랜드의 영향력이 득이 될지 세심한 마케팅 전략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