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트럼프를 사랑한 이민자들
미국 대선의 승세(勝勢)가 도널드 트럼프 미 전 대통령 쪽으로 확실하게 기울기 시작했던 지난 5일 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스마트폰이 ‘지잉’ 울리더니, 이내 “이 나라가 전부 불타버렸으면 좋겠어”라는 문자가 화면에 떴다. 평소 트럼프의 재선 성공은 ‘지성의 몰락’이라며 결사코 반대했던 백인 친구의 연락이었다. 좌절한 그는 “어쩌다 이 나라가 이렇게까지 멍청해졌나”라고 탄식했다.
실리콘밸리 지식인 백인 남성인 그가 “여성 인권, 인종 차별, 헬스케어 같은 문제는 이제 어떡하라고!”라며 울부짖는 동안, 나는 조용히 올 들어 여러 곳에서 만나왔던 트럼프 지지자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트럼프의 승리에 십시일반으로 표심을 행사했을 그들 중에는 전형적인 백인 레드넥(뒷목이 빨갛게 되도록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이나 힐빌리(가난한 저학력 백인)가 아닌 다양한 피부색의 이민자들이 다수 섞여 있었다.
지난 9월 네바다주에서 만난 맬리사와 존 곤잘레스 부부는 자수성가한 부동산 사업가이다. 멕시코 이민자인 그들은 “불법 이민자는 추방하는 게 맞다”라며 “그들 때문에 합법적으로 이 나라에 자리 잡은 우리에 대한 인식이 너무 나빠졌다”고 말했다. 라틴계 남성 유권자의 높은 지지는 트럼프 당선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꼽혔다.
지난 7월 샌프란시스코의 우범지대 텐더로인에서 만난 이라크 출신 이민자 알리 마나(48)씨는 이곳에서 생필품 가게를 17년째 운영하며 어렵게 국적을 얻었다. 그의 가게 앞에는 노숙자와 약쟁이들이 득실했다. 그는 “남미에서 온 불법 이민자들이 마약 유통의 주범”이라며 “트럼프가 당선돼 내 일상을 좀먹는 이들을 당장 추방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캘리포니아는 이번 대선에서 20년 만에 가장 높은 공화당 득표율(39.8%)을 기록했다.
마이크로소프트에 다니는 중국 이민자 장위안(가명·31)씨는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엔지니어다. 이미 국적을 취득한 그는 솔직했다. 그는 “불법 이민을 잘 이해 못하겠다. 미국은 여전히 충분히 똑똑하면 대우를 해주는 나라”라며 “정치적 올바름(PC)보다 내 주식이 오르는 게 중요해 트럼프를 지지한다. 집도 사고 결혼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며 민주당의 패배에 울분을 토하고 있는 백인 친구에게 “이민자들은 생각보다 트럼프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트럼프는 이민자의 적이야!”라고 되받아쳤지만 나는 생각했다. 투표권이 아직 없는 이민자들에게 적인 거겠지. 같은 이민자라고 원하는 바조차 같을까.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1960년대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구호는 페미니즘이 아니더라도 성립한다. 이건 나라가 멍청해진 게 아니다. 오히려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은 어떤 이상에 눈이 가려 이처럼 다양한 이민자들의 개인사적 현실을 놓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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