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말과 글] [379] 고통을 누르는 다른 고통
김연수의 단편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에는 실연의 상처가 너무 커서 치과 의사에게 통증이 있다고 거짓말한 후, 멀쩡한 생니를 뽑는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는 생니를 뽑아내는데도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운다. 그는 온 몸을 바쳐 사랑했던 여자가 떠난 뒤 남은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만성적 이명으로 고통 받던 선배가 흥미로운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명 때문에 늘 굶주린 모기와 함께 동거하는 음울한 기분이었는데 그만 대상포진에 걸렸다는 것이다. 몇 주를 지독히 아프고 난 후 생각하니, 몇 년간 자신을 괴롭히던 이명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곧장 이비인후과에 달려가 다시 검사를 한 선배는 의사에게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대상포진의 부작용으로 이명이 나은 걸까?” 그가 한 말이 여전히 기억난다.
문득 고통이란 더 큰 고통으로만 잊히는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질적인 견비통은 찌르는 치통 때문에, 오랜 이명은 후벼 파는 편두통 때문에 묻히는 식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심한 복통을 느끼면서 두통을 느낀 적은 없었다. 고통이란 복수가 아닌 철저히 단수이며 가장 강한 것만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중 어느 것이 더 아플까. 명확한 건 1기에서 4기까지 분류하는 암에 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별이나 배신의 상처는 쉽게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니를 뽑은 남자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다. 치과 의사는 마취 없이 이를 뽑았는데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는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한다. 사실 남자의 이는 멀쩡하지 않았다. 실연의 고통이 너무 커서가 아니라, 뿌리부터 썩은 치아라 뽑아도 전혀 아프지 않았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정신적인 고통에는 오로지 육체적 고통이라는 한 해독제만 있다”고 말했다. 마음이 복잡하고 우울할 때, 집 밖을 달리거나 집 안을 청소하는 게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달리기는 숨이 찰수록, 집 안은 더러울수록 효과는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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