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술과 과학]⑧ 와인·위스키만 있던 향기표 아로마휠, 안동소주도 생겼다
술의 고부가가치화, 세계화에 도움 줄 듯
술의 맛과 향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느낀다. 같은 화학 성분이 들어간 술이라도 마시는 사람에 따라서 누구는 과일 향이 난다고 말할 수도 있고, 누구는 곡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마다 느끼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술의 맛과 향을 객관적으로 분류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식품 연구에서 객관적으로 맛과 향을 정리하는 검사를 관능검사(sensory evaluation)라고 한다. 일찌감치 술과 관련한 과학적인 연구가 진행된 해외에서는 이런 관능 검사도 체계적으로 정리됐다. 1950년대에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UC데이비스)에서 주류 관련 관능 검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 와인이나 위스키 같은 주류에서도 관능 검사 방법이 확립됐다. 최근에는 커피나 차(茶) 같은 음료에도 관능 검사가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우리 술의 향을 과학적·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이승주 세종대 호텔관광외식경영학부 교수는 8일 오후 경상북도 안동에서 열린 ‘안동 국제 증류주 포럼’에서 증류식 소주의 향미용어체계 개발 결과를 발표했다. 안동소주는 1200년대 후반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술로 우리 증류식 소주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브랜드이기도 하다.
향미용어체계는 술의 향을 표현하는 단어를 바퀴 모양 도표에 정리했다고 해서 아로마 휠(aroma wheel)이란 이름이 붙었다. 해외에서는 이미 50년 전부터 관능 검사 방법이 정립되고, 이를 바탕으로 와인이나 위스키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향기를 과학적 용어로 정리하는 아로마 휠이 자리 잡았다. 이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술인 안동소주도 아로마 휠을 갖춰 세계로 진출할 길이 열렸다. 우리 술의 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기준을 만들면 가치를 더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향이 중요한 한국 소주에 첫 적용
이승주 교수는 우리 술의 향을 과학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없었던 탓에 그동안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술의 맛과 향에 대한 과학적인 분류 체계를 만드는 작업이 곧 술의 가치를 높이는 길”이라며 “술은 단순히 취하기 위해 마시지 않고 맛과 향을 즐기려는 목적도 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느낀 감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정리할 수 있는 용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승주 교수가 김태완 한국식품연구원 책임연구원과 함께 우리 증류식 소주의 향미용어체계(아로마 휠)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교수는 “아로마 휠을 만든 와인이나 위스키는 향이 중요한 술”이라며 “우리 전통주 중에서는 증류식 소주가 특히 향이 중요하기 때문에 먼저 아로마 휠을 만들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증류식 소주의 향미용어체계 개발 사업은 한국연구재단의 전통 증류주 현대화 프로젝트의 일부로 진행됐다. 이 교수와 김 책임연구원이 함께 연구를 진행했고, 2023년 프로젝트는 마무리됐다.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술의 향을 어떻게 객관적, 과학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묘사분석’이라고 부르는 관능 검사 방법이 쓰인다. 훈련된 인력이 의견을 내는 패널이 돼 제품의 특성을 찾아내고 묘사해 그 강도를 측정하는 검사법이다. 대개 5~20명의 패널이 참여해 술의 특성을 정확히 묘사하는 과학적 용어를 찾는다. 색과 외관, 향, 맛, 텍스처(질감) 등을 상세히 묘사한 뒤에 그 강도를 측정하는 식이다.
이런 묘사분석은 패널을 통해 제품의 관능적인 특성을 설명하는 용어를 찾는 단계가 가장 중요하다. 이른바 향미용어체계를 찾는 과정이다. 맥주나 와인, 위스키의 경우 관능검사가 보편화돼 있기 때문에 이미 만들어진 용어가 많다. 하지만 증류식 소주는 체계적인 관능 검사나 향미용어체계 개발 자체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이 교수는 “과거 농촌진흥청에서 전통주 전체를 가지고 아로마 휠을 만든 적이 있었지만, 전체로 범위를 넓히다 보니 카테고리(분류)가 애매했다”며 “증류식 소주에만 집중해서 아로마 휠을 만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증류식 소주 향 68개 단어로 표현
이 교수와 김 책임연구원은 프로젝트가 시작된 2018년 당시 국내에 시판 중이던 증류식 소주 36종을 모두 모았다. 이후 20종으로 추린 뒤 전통주 소믈리에(감별사)나 업계 전문가를 중심으로 한 전문가 그룹을 만들어서 술에서 나오는 향을 추리는 작업을 진행했다. 전문가 13명이 모여 증류식 소주 20종에서 느껴지는 향을 정리했다.
증류식 소주의 향은 크게 곡물, 채소, 허브, 과일, 꽃, 미생물, 나무, 향신료, 견과류, 단향, 유제품향, 화학향으로 나눴다. 여기서 다시 더 자세하게 향의 느낌을 표현하는 단어를 찾았다. 예컨대 곡물향에서는 생쌀, 쌀겨, 보리, 밀 같은 세부 항목을 두고, 과일에서는 레몬, 베리류, 사과, 바나나, 건포도 등으로 자세하게 나누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찾아낸 증류식 소주의 향을 표현하는 단어가 모두 68개였다. 이 교수는 이 결과를 둥근 아로마 휠의 형태로 정리했다. 우리 증류식 소주의 향을 정리한 최초의 향미용어체계가 탄생한 것이다.
이 교수는 “묘사 분석을 통해 향기와 맛을 살폈고, 가스 크로마토그래피 검사를 통해 향기 성분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병행했다”며 “특정 향기가 나는 술에 어떤 향기 물질이 있는지 과학적으로 분류하면 술을 만들거나 분석할 때 이런 물질을 품질 지표로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스 크로마토그래피는 액체 혼합물을 끓는 점 이상으로 가열한 다음 기체 상태의 혼합물을 분리해 각각의 양을 측정하는 검사법이다.
◇안동소주의 세계화에 도움 기대
경상북도와 안동시는 안동의 지역 특산품인 안동소주의 세계화를 본격 추진할 계획인데, 이를 위해서는 위스키나 와인처럼 안동소주에도 고유한 향미용어체계가 있어야 한다. 증류식 소주를 처음 맛보는 해외 소비자나 업계 관계자들에게 술의 맛과 향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단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향미용어체계를 만들면 소비자가 술을 고를 때 자신의 취향에 맞는 술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며 “이런 연구가 그저 연구로만 끝나지 않으려면 실제 술을 만드는 업계나 산업, 술을 즐기는 소비자가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증류식 소주 향미용어체계는 술의 증류 방식과 숙성 방식에 따라서 향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도 정리했다. 상압에서 섭씨 80~95도의 높은 온도에서 증류하는 상압식 증류법과 압력을 낮추고 40~50도의 낮은 온도에서 증류하는 감압식 증류법은 술의 향과 맛, 질감이 다르다. 여기에 옹기, 스테인리스 스틸, 오크통 등 숙성 용기에 따라서도 향이 달라진다.
이 교수는 “제조 방법이나 재료에 따라서 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줘 우리 술의 다양성을 높였다”며 “안동 지역의 술이 전 세계에서 한국을 대표할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하겠다”고 강조했다.
참고 자료
molecules(2022), DOI : https://doi.org/10.3390/molecules27082429
foods(2020), DOI : https://doi.org/10.3390/foods909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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