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해 부치는 피자’색도 인종마다 다를까 [말록 홈즈]
[말록 홈즈 41화]
예나 지금이나, 술을 참 좋아합니다. 대학생 시절엔 술자리가 매일을 마치는 일과였습니다. 토할 때까지 마시는 날도 많았습니다. 2000년 여름, 이러다가 큰 병 나겠다는 위기감이 엄습했습니다. 술을 끊고 동네 헬스클럽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돈 내고 하는 운동이라 정성을 다했습니다. 학교엔 안 가도 헬스장엔 등교하니, 한 달 만에 근육이 꽤 붙고 혈색도 좋아졌습니다.
“Hey man. Do you have a lighter?” (아저씨, 라이터 있어요?)
“오브 코우즈!” (그럼요!)
한 달이 지날 무렵 같은 헬스클럽에 다니던 그레이슨(Grayson)과 처음 만났습니다. 180cm가 넘는 큰 키에 미끈하게 잘생긴 미국 청년 그레이슨은, 초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제 첫 흑인 친구였는데, 엄밀히 말하면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유전자의 영향으로 탄력 있는 갈색 피부에 입체적인 이목구비를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의 매일 함께 운동하고, 귀갓길에 담배를 물었습니다.
“헤이, 렛츠 고 투 드링크!” (한잔하자!)
푹푹 찌던 8월 어느 저녁, 헬스클럽 에어컨이 고장나 운동하다가 몸이 퍼질 지경이었습니다. 두 달 가까이 외면했던 생맥주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Sounds sweet! I hate sweat!” (좋은 생각. 나는 땀이 싫어!)
그레이슨이 친구를 한 명 부르겠답니다. 그렇게 아일랜드에서 온 백인청년 가웨인(Gawain)을 만났습니다. 이 친구는 특이하게도 영어로 미술을 가르쳤습니다. 한국에 온 지 몇 해 지나서, 우리말을 제법 잘했습니다. 20대 중반 삼색 젊은이들이 싸구려 호프집으로 향했습니다. 검은 태양이 내리쬐는 밤, 눈송이같이 차가운 맥주가 폭포수처럼 식도에서 몸을 던집니다. 안주로 시킨 치킨엔 눈길도 가지 않을 만큼 시원하고 짜릿합니다.
“Koreans love only white people too much. They even like me because I look like Brad Pitt!” (한국인들은 백인만 너무 좋아해. 심지어 나까지 좋아해. 브래드 피트 닮았다고!)
술이 적당히 오르자 그레이슨이 푸념을 시작합니다. 그레이슨은 흑인이 말이 참 많다는 속설을 떠올리게 해준 소중한 친구입니다.
“No, You do not look like Brad Pitt. You are the clone of Tom Cruise!” (브래드 피트 안 닮았어! 넌 탐 크루즈 복제인간이야!)
가웨인이 맞받아칩니다. 이 친구도 평범한 녀석은 아닌 듯 보입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깡 좋고 술 세다는 말만 믿고, 소주를 시킨 게 화근이었을까요? 몰아 마신 술에 다들 떡이 돼 가고 있습니다.
“가웨인, 그레이슨이 뭐라는 거야?”
“지가 브래드 피트 닮았대. 그래서 톰 크루즈나 하라고 했어.”
“푸히힛, 컥컥!”
웃다가 갑자기 사래가 들려 기침을 했더니, 술이 얹힙니다. 급하게 양쪽 아래턱과 혀 밑에 침이 흥건하게 괴기 시작합니다. 구토의 사인입니다. 잽싸게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우욱, 웩!”
“괜찮아, 말록? 급하게 마시니 그렇지. 오바이트해도 더 마실 거지?”
등을 두드려 주는 가웨인. 말도 정신세계도 거의 한국인 같습니다.
“아우, 시큼한 냄새 나! 나도 토할래! 쿠웨엑~!”
아이구 머리야! 아일랜드산 가웨인이 구운 피자는, 내가 부친 김치전보다 색깔이 밝았습니다.
“대두, 한국사람들 토하면 왜 다 레드야? 내 건 브라운인데. 이유가 뭘까?”
“와, 추리력! 이 아일랜드산 셜록홈즈 같은 지니어스 휴먼비잉!”
“말록도 천재 같아 보여, 머리 커서. 그나저나 그레이슨은 토하면 무슨 색깔일까?”
호기심에 버무려진 눈동자 네 개가 씨익 웃으며 마주칩니다. 우리는 그레이슨에게 ‘천재 미남 브래드 크루즈’라고 찬사를 보내며 맥주를 먹입니다. 그레이슨이 토하러 튀어나가기까지 10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후다닥 따라갔습니다.
“가웨인, 레드야. 인종이랑 피자색깔이랑 관계 없나봐?”
“그런가? Hey, 브래드 크루즈. What did you eat for dinner?” (저녁 뭐 먹었냐?)
“I ate 김치볶음밥, 투 그릇, 우욱.”
그레이슨의 2차 분출을 지켜보며 깨닫습니다. 중요한 건 그릇의 모양이 아니라, 담긴 내용이라는 걸요.
I said if you‘re thinkin’ of being my brother (난 말했지, 네가 내 형제가 되고 싶다면)
It don‘t matter if you’re black or white (상관없어, 네가 검든 희든)
[필자 소개]
말록 홈즈. 어원 연구가/작가/커뮤니케이터/크리에이터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23년째 활동 중. 기자들이 손꼽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커뮤니케이터. 회사와 제품 소개에 멀티랭귀지 어원풀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어원풀이와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융합해, 기업 유튜브 영상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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