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궁과 잔반[한성우 교수의 맛의 말, 말의 맛]

2024. 11. 8.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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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광해'의 가장 익살스러운 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졸지에 왕이 된 하선이 '매화'를 싸고 궁녀들의 시중을 받는 장면일 것이다.

하선의 행동은 '대궁'을 위한 것이다.

먹고 남은 것이 아니라 먹다 남긴 것이니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가 담긴 것이 대궁이기도 하다.

대궁을 요즘 말로 하면 '잔반(殘飯)'일 텐데 말맛이 사뭇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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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광해’의 가장 익살스러운 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졸지에 왕이 된 하선이 ‘매화’를 싸고 궁녀들의 시중을 받는 장면일 것이다. 진짜 왕과 달리 시원스럽게 자배기로 쌌으니 경하를 받을 만한 일이기도 하다. 못 먹어보던 기름진 음식을 양껏 먹었으니 푸짐하게 쌀 수밖에. 그런데 그토록 맛나게 먹던 하선은 수라간 사람들이 자신의 먹성 때문에 굶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먹다 말고 수저를 놓게 된다.

하선의 행동은 ‘대궁’을 위한 것이다. 대궁은 먹다가 그릇에 남긴 밥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은’이 아니라 ‘남긴’이다. 입맛이 당기고 양도 차지 않아 더 먹을 수 있지만 식욕을 누르고 밥과 반찬을 남긴 것이다. 궁중의 수라간은 왕실 사람들이 먹을 밥만 짓는다. 일하는 이들의 밥을 따로 짓지 않으니 이들은 먹고 남은 밥을 먹을 수밖에 없다. 이를 아는 윗사람들은 눈치껏 밥과 반찬을 남긴다. 먹고 남은 것이 아니라 먹다 남긴 것이니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가 담긴 것이 대궁이기도 하다.

대궁을 요즘 말로 하면 ‘잔반(殘飯)’일 텐데 말맛이 사뭇 다르다. 이 말은 가정에서는 많이 안 쓰고 군대나 식당 등 많은 사람이 밥을 먹는 곳에서 쓰인다. 더 결정적인 차이는 ‘남긴 밥’이 아니라 ‘남은 밥’이라는 것이다. 입맛이 없든, 양이 많았든 다 먹지 못한 밥이 곧 잔반이다. 의도하고 남긴 밥이 아니니 깨끗하지 않아 남이 먹을 수도 없는 밥이다.

배불리 먹기 어려운 시절의 대궁은 다른 이에 대한 따뜻함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그러나 먹을 것이 넘쳐나는 요즘의 잔반은 감염병 때문에 가축의 밥으로도 쓰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음식물 쓰레기와 다를 바 없기도 하다. 대궁은 남기는 것이 남을 위한 배려이다. 그러나 잔반은 남기지 않는 것이 설거지하는 이나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이들, 그리고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환경에 대한 배려인 시대에 살고 있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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