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호의 우리말 바로 알기] ‘외척’과 ‘친적’

최태호 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 명예교수 2024. 11. 8. 09:44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조선 시대에 서달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서달 일행은 그들을 찾지 못하자 마을 사람들을 매질하였다.

그러자 서달의 하인들은 항의하는 표운평이라는 사람을 매질하고 서달에게 끌고 갔다.

장황하게 서달의 사건을 서두에 말하게 된 연유는 이 땅에 다시는 왕의 외척이나 친척이 금수저(?)라는 연유로 사람들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서달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난 인물이다. 부모는 권력의 최상층에 있었고, 장인도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집안이었다. 양가의 부와 명예가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기 때문에 서달에게는 부러울 것이 없었고, 무서운 것이 없었다. 하루는 서달이 온양 온천에 가서 하루를 즐기고 한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신창현(지금의 아산시)을 지날 때 지역의 아전(직급이 낮은 공무원) 두 명이 이들을 지나쳐 갔다. 서달은 예를 갖추지 않고 지나가는 그들을 괘씸하게 여겨 두 명을 잡아오라고 하였고, 아전들은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껴 급하게 달아나 버렸다. 서달 일행은 그들을 찾지 못하자 마을 사람들을 매질하였다. 어떤 관리는 그러지 말라고 항의하며 말리기도 하였다. 그러자 서달의 하인들은 항의하는 표운평이라는 사람을 매질하고 서달에게 끌고 갔다. 서달은 표운평에게 곤장 50대를 때릴 것을 명령하였다. 그 결과로 표운평은 다음날 죽고 말았다. 억울하게 남편을 잃은 표운평의 아내는 다음날 이들을 관아에 고발하였으나, 당시의 세도가였던 그의 집안과 장인의 힘으로 사건은 무마되었다. 서달의 아버지 서신은 서희의 12세손으로 충청, 경기, 경상, 전라도의 관찰사를 지냈고, 각종 참판을 역임하였으며, 서달의 장인은 누구나 알 수 있는 황희 정승으로 당시의 좌의정이었다. 서달의 외척인 강윤은 표운평의 집안에 가서 합의를 종용하였고, 표운평의 형은 뇌물을 받고 제수(弟嫂)를 회유하여 결국 합의하게 되었다. 훗날 세종이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모두 알게 되었고, 보고서에서 이상한 점을 느낀 세종의 명으로 의금부에 대대적인 재조사를 명한다. 결국 사건의 전모는 밝혀지고, 좌의정 황희 파면, 맹사성 파면, 서신(서달의 아버지) 직첩회수, 서달 곤장 100대와 3000리 귀양 및 3년 노역치 벌금을 물게 된다.(다음 카페, 달빛, <조선시대 최대의 권력형 비리 사건>에서 발췌 요약)

장황하게 서달의 사건을 서두에 말하게 된 연유는 이 땅에 다시는 왕의 외척이나 친척이 금수저(?)라는 연유로 사람들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외동아들인 서달을 지나치게 아꼈던 서달의 부친으로 인해 장인인 황희 정승과 맹사성(황희의 친구로 신창현 출신, 신창 현감에게 서신을 보내 합의를 제안함)까지 화를 입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다. 사람들은 별것이 아니라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어느 한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되고, 그의 아내는 각종 회유와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외척의 사전적 정의는 ‘어머니쪽의 친척’, 혹은 ‘같은 성을 가진 사람 이외의 친척’
친척의 사전적 정의는 ‘자기의 혈족이나 혼인 관계를 통해 혈연적으로 관계가 있는 일정한 범위의 사람들’
인척의 사전적 정의는 ‘혼인 관계를 통하여 맺어진 친척’

이다. 그래서 보통 친•인척 관리를 잘해야 훗날 좋은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러므로 정부에서는 위정자의 친•인척을 관리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그런 것은 항상 있었으나 제 구실을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왕을 만들었으면 도와준 사람들은 초야에 숨어 살아야 한다. 배경이 되어 권력을 휘두른다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왕의 주변인들은 역할을 마쳤으면 없는 듯이 살아가는 것이 그를 도와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기우제를 지낼 때 용포를 벗어 놓고 거기에 곤장을 친 적도 있다. 왕의 인척이나 외척이 사고를 치면 왕비를 사가(私家)로 내보내기도 하였다. 주변이 어지러우면 정치가 잘 될 수가 없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주변인들은 조용히 살아야 한다. 오늘날도 이러한 기준은 변하지 않았다.
왕이 결단할 수 없을 때는 부월상소(斧銊上疏 : 도끼를 들고 상소문을 올리면서 상소문에 잘못이 있다면 자신의 목을 베라는 뜻)하는 신하가 있어야 한다.

[최태호 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 명예교수 ]

Copyright © 프레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