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공황’ 현대인… 당신이 아니라 사회가 문제다[북리뷰]
제임스 데이비스 지음│이승연 옮김│사월의책
무한경쟁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빈곤·차별 등 ‘사회적 상처’를
무기력 등 ‘개인 질환’ 몰아가
약물로만 해결하려는 정신의학
결국 병만 더 쌓아 키우는 꼴
억지 치료보단 연민·유대 필요
한국 사회에서 정신 질환은 전혀 낯선 질병이 아니다. 특히, 출판 분야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이래 우울증, 불안증, 조현병 등을 고백하고, 그 치유 과정을 공유하며 사회적 의미를 논하는 책들이 거의 매주 쏟아지고 있다.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의 각종 조언을 담은 이른바 ‘힘내라’ 에세이도 베스트셀러에서 빠지는 날이 없다. 의사를 찾아 정신 질환 약품을 처방받는 사람들 숫자도 폭증했다. 정신 질환자 숫자가 2017년 약 340만 명에서 2022년 465만 명으로 약 37% 늘어나는 등 모든 질병 중 가장 높은 증가세를 보이는 편이다.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영국에서도 매년 성인의 25%가 정신과 약물을 처방받는다. 매년 약 32조5000억 원이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의 정신 건강 관련 자금으로 쓰이고, 지난 20년 동안 수백억 파운드가 연구에 투자됐다. 그러나 사태는 오히려 나빠지고 있다. 암이나 심장 질환 등 다른 의료 분야와 달리 쏟아지는 처방전과 투입된 연구 자원도 헛되이 정신 질환은 갈수록 늘고 있다.
‘정신병을 팝니다’에서 영국 로햄프턴대 교수 제임스 데이비스는 정신의학의 이런 지체 또는 역행 현상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마음에 달라붙은 감정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정신의학의 무능력은 애초에 잘못된 원인 진단 탓이다. 현대 의학은 주로 정신적 상처의 원인이 뇌에 있다고 생각하고, 약물을 투입해 이를 진정시키려 한다. 정신 고통을 철저하게 개인 문제로 돌리고, 신경 물질의 불균형을 완화하는 거대 기업의 약품과 의사의 처방에 그 치료를 맡기는 것이다. 이 책의 원제가 ‘안정제 먹이기(Sedated)’인 이유다.
물론, 생화학적 접근이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다. 약을 먹으면 일단 기분이 좋아지고 불안이 잦아든다. 그러나 순간뿐이다. 마음을 고통에 빠뜨리고, 병에 이르게 하는 진짜 원인이 거의 사회에 있는 까닭이다. 어릴 때부터 강요되는 가혹한 경쟁, 한순간 삶을 파괴하는 무자비한 해고, 돌봄 없이 약자를 방치하는 국가가 우릴 무기력과 우울에 빠뜨리고 번아웃과 공황으로 몰아가며, 극단적 선택으로 이끈다.
따라서 뇌의 생화학 기전을 주요 원인으로 받아들여선 정신 질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매일 항우울제나 안정제를 복용하고 기분을 누그러뜨린 후, 학교나 일터에 나서도 고통이 덮쳐오는 일이 반복될 뿐이다. 더욱이 이런 약품들은 중독을 초래한다. 죽을 만큼 불안해서 어쩔 수 없이 약을 먹는데, 나중엔 약을 먹지 않으면 불안해 죽을 것 같아진다.
현대 정신의학이 정신적 고통을 낳는 사회를 바라보지 않고, 개인의 뇌에 집중하게 된 데는 1980년대 이후 전개된 신자유주의가 큰 영향을 끼쳤다. 인터뷰, 자료, 통계 등을 섭렵하면서 저자는 신자유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 인간상, 즉 지치지 않으며 항상 활동적이고, 생산적이며 긍정적인 인간상의 반대편에 있는 집중력 부족, 의욕 상실, 만성 피로 등이 정신 질환으로 정의되고 투약 대상으로 변모돼 의약 산업의 먹이가 되는 의료화, 상품화의 과정을 파헤친다.
가령, 1970년대만 해도 우울증은 심각한 일부를 제외하고 산책, 수다 등 가벼운 활동으로 자연스레 호전되는 증상으로 이해됐다. 그러나 프로작 유형의 항우울제 개발과 함께 ‘마음의 감기’처럼 누구나 걸리는 개인적 질병으로 바뀌면서 투약이 급증했다. 약품이 병을 만들어 꼭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약을 처방하는 사태를 낳은 것이다. 그 배후엔 제약회사와 정신의학계의 탐욕이 작용했다. 이런 식으로 질병에 포획된 기분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마음에 달라붙은 질환은 대부분 빈곤, 차별, 실업, 고립 같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한 반응이 원인이다. 사회적 상처를 개인이 약 먹고 해결할 문제로 바꾸는 시장화 해법은 스스로 마음의 질병을 관리함으로써 상처를 감추고 일하는 걸 당연시하는 사회를 전제로 한다. 약 먹고 억지로 기분 내야 하는 이들은 결국 병을 쌓아서 키우게 된다. 좋은 인간관계를 장려하고, 안정적 일자리를 보장하며 연대를 강화하지 않는 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정신 질환은 감소하지 않는다. 진화 과정에서 인류는 혼자서 다룰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연민과 유대를 느끼고 힘을 합쳐서 이를 해결하는 것을 배워 왔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언제나 약물보다 우애가 먼저였다. 376쪽, 2만3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0대 소녀가장 성폭행하다 급사…천벌 받은 직장 상사
- 홍준표·나경원 “진솔한 사과, 담화”…“경박한 촐랑거림 없어야, 국익 집중”
- [속보]윤 대통령 “앞으로 부부싸움 많이 해야 할 것”… 아내 공격에 대해선 ‘악마화하고 있다
- “아는 흑인도 없는데… ” 中여성, 피부 검은 아기 출산
- “짐 가방 프로펠러로 쏙” 이럴수가…잔해 허공에 뿌려져
- “여자가 날뛰는 것 꼴 보기 싫어” 말했다가 일가족 행방불명된 北 주민들
- “배고파?” “지시대로 해”…北병사 파병에 한국어 가르치는 우크라 군대
- ‘주식 대박’ 백종원, 육군에 특식·빽다방 커피…더본코리아 내달 軍급식메뉴 10종 공개
- “보리암 보러왔다 아예 눌러앉았소”… 소박한 외지인이 차린 책방 골목을 걷다 [박경일기자의
- 출근 한 달 20대 9급 공무원…인천서 투신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