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식민지배·독재도 이겨냈다… 새 봄 꿈꾸는 ‘나일강의 선물’[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이슬람 문명 꽃피우며 번성
민중·정의 내세운 집권자들
부정부패로 민주화 시위 촉발
타리크 알리가 쓴‘술탄 살라딘’
“탐욕을 피하고 허식을 버려라
못한다면 불안을 드러내는 것”
“내 주머니 속에서 펄떡이는 권총이 말해줄 거야. 권총이 배신과 부패를 이기고 승리할 거야. 처음으로 도둑이 개들을 쫓을 거야.”
‘도적과 개들’에서 이집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나지브 마흐푸즈는 말한다. 작품은 카이로의 전설적 도적 마흐무드 술라이만의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 궁핍한 생활에 지친 그는 부잣집만 골라서 빈집털이에 나선다. 그는 도둑질을 타락한 세상에 복수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언론은 그를 의적으로 포장하고, 지배층 부패에 지친 이집트 시민은 열광한다. 탁월한 변장술로 도주하던 그는 결국 경찰견들한테 쫓기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작가는 이를 소설화함으로써 7월 혁명 정부의 배신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 등 청년 장교들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후, 이집트 공화국을 건설해 수천 년 왕정을 끝장냈다. 이들은 부패를 없애고 적폐를 청산하며 외세를 배격해서 민중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권력을 쥐자 이들은 이집트 국민에게 봉사하기보다, 한 연구자의 말처럼 “정의를 내세우되 전혀 정의롭지 않고, 민중을 괴롭히는 저승사자가 되어 결국 그 삶을 파멸로 이끄는” 개가 되었다. 마흐푸즈는 한 도둑의 죽음을 통해 현대 이집트 사회에 만연한 고통과 억압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는 나일강 삼각주에 자리 잡은, 인구 약 1000만 명의 도시다. ‘나일강의 선물’(헤로도토스)로 불리는 이곳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지중해와 인도양을 잇는 무역로가 교차하는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예부터 풍요를 누렸다. 이 땅에서 세계 최초로 중앙집권 국가가 들어섰고, 문명과 종교가 탄생했으며, 문자와 파피루스가 발명됐다. 카이로는 나일강을 따라 발전한 고대 이집트 왕국의 중심지였다.
‘갈대 붓을 쥔 사람들’은 카이로에서 수많은 신화와 기록을 남겼다. 세계 최초의 소설 ‘시누헤 이야기’는 시리아 땅에 갔다가 돌아온 한 귀족의 모험을 담고 있다. “도주자는 사정 탓에 도주하나, 내 진심은 고국에 있네. 내 집은 좋고 내 거처는 넓으나 내 기억은 왕궁에 머물러 있네.” 고향에 대한 강렬한 향수는 이집트의 매력을 보여준다. 같은 시기의 ‘조난자 이야기’ 역시 배를 타고 항해에 나선 한 선원의 영웅적 행위를 그려낸다. 이 이야기들은 지중해 전역으로 뻗어 나간 이집트인들의 활약을 암시한다.
641년 예언자의 전령이 도착했을 때, 카이로 지역은 이슬람의 빛을 받아들였다. 정복자 아무르 이븐 알아스는 이 땅에 전진기지 알푸스타트를 건설하고, 아프리카 최초의 모스크(아무르 사원)를 지은 후 이슬람 전파에 나섰다. 이로부터 하루 다섯 번 기도 소리가 울리는 이슬람 시대가 열렸다.
카이로란 이름은 아랍어 알카히라에서 유래했다. ‘정복자’라는 뜻으로, 10세기 중반 알무이즈 칼리프가 푸스타트 근처에 궁정 도시를 세우고 지은 이름이다. 푸스타트와 알카히라는 약 500년간 우마미야, 아바스, 파티미드 등 이집트 왕조의 수도로 번창했다. 카이로는 곡물, 향료 등이 모이는 나일강의 중심 항구였고, 지중해 전역에서 상인들과 장인들이 찾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잘 지어진 궁정 지역과 그 주변에 무질서하게 발달한 주거지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카이로의 특징이 되었다.
1168년 십자군이 쳐들어왔을 때, 카이로는 불타올라서 철저히 파괴됐다. 십자군을 몰아내고 이 땅을 되찾은 이가 ‘해방자’ 살라딘이었다. 1176년 그는 파괴된 도시 북쪽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 후, 아랍인들 힘을 모아 십자군을 무찌르고 예루살렘을 회복했다. 이후, 카이로는 이집트와 레반트 지역을 아우르는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술탄 살라딘’에서 타리크 알리는 아랍을 통일한 살라딘의 통치 철학을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우린 모두 인간일 뿐이야. 우리가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백성이 허락했기 때문이야. 탐욕을 피하고 허식을 버려라. 통치자가 그러지 못하는 건 자신의 불안정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1250년 맘루크 제국이 들어선 후, 지중해 향료 무역을 장악하면서 카이로는 나날이 발전했다. 100년도 안 돼 카이로 인구는 50만 명까지 늘었다. 곳곳에 모스크와 영묘가 들어서서 ‘천 개의 첨탑이 있는 도시’로 불렸고, 알아즈하르대학과 대도서관이 지어져 이슬람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학자, 시인, 상인, 여행객이 몰려들고, 온 세상이 이곳을 세상의 중심으로 칭송했다.
카이로를 무너뜨린 건 전염병이었다. 1348년 흑사병이 덮쳐서 단기간에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여행기’에서 이븐 바투타는 하루 수천 명씩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1517년까지 50회 이상 흑사병이 찾아왔고, 도시는 쇠퇴했다. 설상가상으로 1499년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가 아프리카 희망봉 항로를 발견했다. 향료 무역 독점권마저 상실하자 카이로는 빠르게 몰락했다. 1798년 나폴레옹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카이로 인구는 약 30만 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나폴레옹 침략은 근대화의 촉매가 되었다. 1805년 오스만제국 사령관 무하마드 알리 파샤는 카이로를 수복한 후, 총독 자리에 올랐다. ‘근대 이집트의 창시자’로 불리는 그는 행정 구조 개편, 관개 시스템 개선, 면화 농업 도입 등 개혁 정책을 행했다. 카이로 근대화도 시작됐다. 파리를 본받아 가스등을 도입하고, 오페라 극장을 건설했다. ‘아이다’가 이 극장 개관을 기념해서 공연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막대한 부채를 동원한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국가는 파산 위기에 처했다. 1882년 영국 군대가 쳐들어와 카이로를 점령한 후, 이집트 전역을 식민지로 삼았다.
알나흐다(Al Nahdah, 문예부흥)에 뛰어든 이집트 문인들은 영국 식민 지배에 강하게 저항했다. 아흐마드 샤우키, 하피즈 이브라힘 등은 아랍 문학 유산과 서구 문학 형식을 결합해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창작했다. 1906년 사냥하던 영국 장교들이 현지 주민과 마찰을 일으켜 충돌한 사건이 일어났다. 식민 당국은 마을 농부 4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브라힘은 항의했다. “우리를 통치하는 이들이여/ (중략)/ 당신들 군대를 진정시키고 조용히 잠재우시오./ (중략)/ 마을 사람에게 죽은 이의 복수를 하지 마시오./ 그를 사냥한 건 바로 태양이었잖소./ (중략)/ 진정 당신들이 용서를 원치 않는다면 살인을 명령하시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은 마음인가, 시체인가.”
영국 지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19년 사드 자글룰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자들이 결집해 시위를 벌였다. 카이로가 그 중심이었다. 거센 반발에 못 이긴 영국은 결국 1922년 독립을 승인했다. 그러나 영국은 군대 8만 명을 남겨 수에즈 운하를 통제하고 허수아비 왕을 세워 내정에 개입했다. 자전 소설 ‘거울들’에서 마흐푸즈는 말했다. “왕궁을 근절하고, 영국과 대항하는 것 말고 우리에게 다른 출구는 없다네.”
7월 혁명에 성공한 나세르는 영국 지배로부터 실질적 독립을 실현할 기회를 노렸다.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을 틈타 그는 영국군을 몰아내고 수에즈 운하를 돌려받는 데 성공했다. 카이로는 다시 성장기를 맞았다. 산업화에 힘입어 도시가 팽창하고, 인구가 늘었다. 그러나 지도층 타락과 부정부패가 다시 발목을 잡았다. 군부 세력은 농민이 주인 되고 빈민이 구원받는 시대를 약속했으나, 발전은 오지 않았다. 무능을 감추려는 정부는 나세르, 사다트, 무바라크로 이어지면서 수십 년에 걸쳐 가혹한 탄압을 일삼았다. 한때 석방 없는 정치범이 수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 와중에 카이로는 인구 과밀과 교통 체증, 기록적 빈부 격차와 심각한 오염, 폭발적 빈민가 증가 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우리 동네 아이들’에서 마흐푸즈는 간절히 소망했다. “밤이 지나면 낮이 되듯 불의는 반드시 사라져. 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압제가 멸하고 기적과도 같은 날이 훤히 밝아 오는 것을 분명 보게 될 거야.”
2011년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아랍의 봄’이었다. 타흐리르 광장을 중심으로 200만 명 넘는 시민이 모였고, 시위는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2013년 이슬람 원리주의를 앞세운 무슬림 형제단 정부가 다시 무너지는 등 혼란은 몇 해 동안 계속되었다. 민주화 이후, 현재 카이로는 새롭게 도시 건설에 나서는 등 다시 도약을 꿈꾸고 있다.
출판평론가
■ 용어설명 - 나일강 문명
나일강은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발원해 지중해까지 이어지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강이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 물길과 범람 과정에 맞춰 그 중심지가 지속해서 변해 왔다. 카이로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날 카이로에는 피라미드 건설로 유명한 고왕국의 수도 멤피스, 태양신 라의 발상지인 헬리오폴리스, 스핑크스와 피라미드의 마을 기자 등 고대 유적 도시가 그 안에 포함돼 있다.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0대 소녀가장 성폭행하다 급사…천벌 받은 직장 상사
- 홍준표·나경원 “진솔한 사과, 담화”…“경박한 촐랑거림 없어야, 국익 집중”
- [속보]윤 대통령 “앞으로 부부싸움 많이 해야 할 것”… 아내 공격에 대해선 ‘악마화하고 있다
- “아는 흑인도 없는데… ” 中여성, 피부 검은 아기 출산
- “짐 가방 프로펠러로 쏙” 이럴수가…잔해 허공에 뿌려져
- “여자가 날뛰는 것 꼴 보기 싫어” 말했다가 일가족 행방불명된 北 주민들
- ‘주식 대박’ 백종원, 육군에 특식·빽다방 커피…더본코리아 내달 軍급식메뉴 10종 공개
- “보리암 보러왔다 아예 눌러앉았소”… 소박한 외지인이 차린 책방 골목을 걷다 [박경일기자의
- 출근 한 달 20대 9급 공무원…인천서 투신 사망
- 檢, ‘김정숙 샤넬 재킷’, “순방 때 입은 것과 샤넬 본사가 낸 것 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