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맏형 CJ, 세계시장 진출 꿈 이룰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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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추석 연휴 기간, 영화관 박스오피스 선두를 차지한 것은 <베테랑2>였다. 개봉 6일 만에 400만 관객을 모았고, 4주차에는 700만 관객을 넘어서며 순조로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영화관을 찾은 사람들이라면 조금 의아한 점을 발견해야 했다. 우리나라 영화관 최대 대목은 8월 여름방학, 추석 명절, 설 명절, 연말연시 시즌이다. 연인, 가족 등과 함께 가장 많이 영화관을 찾는 때라 대부분 높은 흥행을 기대하는 영화들은 이때에 맞춰 개봉한다. 그런데 이번 추석 연휴 기간 영화관에 걸린 흥행 기대작은 <베테랑2>밖에 없었다. 연휴 기간 <베테랑2>의 좌석 점유율은 73.5%나 됐다. 경쟁 영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영화계 사정이 워낙 어려워 나타난 현상이었다. 코로나19 이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보급 확대, 영화관 관람 문화 위축 영향으로 영화계는 계속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영화계의 큰손 씨제이이엔엠(CJ ENM)의 사정은 더 그렇다. CJ ENM은 영화계의 가장 큰 배급투자사로 굵직굵직한 영화들을 투자하고 배급해왔다. 하지만 <외계+인> 1부와 2부, <더 문>,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등 코로나19 이후 개봉된 영화들의 연이은 실패로 영화 투자 철수를 검토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다. 우리나라의 5대 영화 투자배급사는 CJ ENM, 쇼박스, 롯데엔터테인먼트, 뉴(NEW),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투자를 해온 CJ ENM이 철수를 고민할 정도로 영화산업이 위기라는 이야기다.
아마도 영화계에선 CJ ENM이 진짜 영화계에서 손을 뗄까 두려웠을 것 같다. 대기업 역할에 대한 논의는 분분했지만 CJ ENM은 영화계의 맏형이었고,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 캠페인도 펼치는 등 든든한 버팀목 역할도 해왔다. 그런 기업이 영화계에서 떠나는 것은 큰 손실이다. CJ ENM 주변에서는 2024년 하반기 <베테랑2>와 <하얼빈>(12월 개봉 예정) 흥행을 보고 최종 결정을 한다는 설이 흘러나왔다. 결국 많은 영화업계 동업자들은 조용히 길을 비켜주며 CJ ENM이 영화계를 지켜주기를 기원한 것 같다.
CJ의 영화산업 성장 발자취
CJ가 한국 영화산업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95년으로 올해로 꼭 30년째다. 1988년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직접배급으로 한국 영화시장이 개방된 이후 약 30여 년간 한국 영화산업의 성장 속에 CJ도 함께 있었다. 물론 꽃길만 걸은 것은 아니었다. 영화계 신구 세력과 자본의 교체 속에 몇 번이나 위기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제휴와 합병, 인수 등을 거치며 몸집을 키웠고, 한국 영화산업이 결실을 거두면서 수혜도 가장 크게 얻었다.
영화계 첫 진입은 드라마틱했다. 1993년 할리우드 영화 <쥬라기 공원>이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자 감독이었던 스티븐 스필버그는 1994년 영화사 ‘드림웍스SKG’를 세우고 투자자를 물색했다. 이 소식에 가장 먼저 문을 두드린 것은 삼성그룹이었다. 6천여 편의 영화를 소장할 정도로 영화광이었던 이건희 회장은 10억달러 가까운 출자액을 제시하며 드림웍스SKG의 투자자가 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두 기업의 이질적 문화 탓에 협상은 결렬됐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이 나섰다. 1993년 삼성그룹에서 분리 발표를 한 제일제당그룹은 차기 사업으로 영화사업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삼성의 협상 결렬이 전해지자 이재현 상무, 이미경 이사는 바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이들의 접근 방식은 달랐다. 30대의 젊은 남매는 청바지에 티셔츠, 운동화 차림으로 스필버그의 개인 스튜디오를 찾아 함께 피자를 먹으며 미래를 이야기했다. 앞으로 투자뿐 아니라 영상사업 진출의 체계적인 도움을 받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아시아의 할리우드로 도약하고 싶다는 이들의 꿈에 스필버그는 솔깃했고, 1995년 제일제당을 투자자로 선택했다. 이것이 CJ엔터테인먼트의 모태였다.
당시 한국 영화계는 큰 변화를 거치고 있었다. 1988년 이후 비디오 시장이 성장하자 할리우드 영화사들을 비롯해 삼성, 대우, SKC 등과 같은 대기업들도 영화산업에 진출했다. 1993년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사채시장에 의존하던 충무로 영화자본들이 뜻하지 않게 사라지면서 대기업들이 영화산업을 주도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1997년 12월 IMF 금융위기로 시작된 구조조정으로 일제히 영상산업에서 철수했다.
이때 대기업 가운데 CJ와 오리온, 롯데만이 영화시장에 남았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준비하던 이들은 영화 배급, 상영을 통해 시장 확대를 꾀하던 터라 시장을 좀더 지키기로 결정했다. 실제로 1998년 4월 우리나라 최초의 멀티플렉스 극장 CGV강변이 세워졌고, 코엑스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일산점 등이 등장하며 영화관 풍경은 바뀌었다. 3대 대기업은 이를 기반으로 영화 투자, 배급, 상영 등 수직통합에 나섰다.
제작사서 영화관·배급사로 권력 이동
대기업들이 처음부터 시장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IMF 직후 힘의 우위는 대기업들과 함께 새 영화들을 만들어온 영화 제작사, 기획사 들에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영화산업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산업계를 좌지우지한 대기업들이 못마땅했다. 특히 IMF 위기처럼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쉽게 자본을 철수할 수 있다는 것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들은 대기업이 떠난 참에 새로운 투자 시스템을 도입해 안정적인 한국 영화 제작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새로 시장에 진입한 벤처투자자들이 영화산업 경험이 부족했던 터라 이들이 주도권을 쥐고 새판을 짤 기회이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충무로에선 투자자들과 다양한 합종연횡이 펼쳐졌다. 강우석프러덕션에서 발전한 시네마서비스는 투자·배급사로 확장해 규모를 키워나갔다. 명필름, 강제규필름, 우노필름, 시네마서비스 등 흥행력 높은 영화들을 만들어낸 실력 있는 제작사들은 벤처투자사들과 짝을 지어 영화전문투자펀드를 결성하기도 했다. 한국 영화의 수준 향상과 코스닥 열풍이라는 거대한 바람 덕에 충무로와 벤처투자자들의 결합은 가속화했다. 1999년 영화 <쉬리>가 전국 관객 582만 명을 동원하는 등 흥행 성공이 늘어난 것도 주효했다. 투자 대상을 찾고 있던 벤처투자자들에게 흥행력이 상승하던 한국 영화는 좋은 ‘재료’였다. 벤처투자자들은 똘똘한 충무로 제작사를 골라 코스닥으로 인도했다.
이 시기 등장한 로커스홀딩스는 코스닥 열풍 속에 탄생한 새로운 벤처 신화였다. 로커스홀딩스는 영화 제작사 싸이더스, 제작 및 배급사 시네마서비스, 온라인 게임 포털업체 넷마블, 음반 유통업체인 예전미디어, 극장 체인 ‘프리머스’를 인수 합병했다. 벤처회사가 중심이 되어 게임과 음악, 영화 제작, 배급, 상영을 수직통합한 회사가 된 것이다. 그런 가운데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늘어가면서 힘의 관계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로커스홀딩스는 2003년 시네마서비스, 싸이더스 등 인수한 회사들을 모두 플레너스로 합병시켰다. 시네마서비스는 과거 서울극장 계열 배급라인을 이어받은 ‘충무로의 적자’로, 2001년 한국 영화 배급의 약 45%를 차지한 최대 배급사였다. 2위 배급사는 CJ엔터테인먼트였다. 시네마서비스와 CJ엔터테인먼트는 사업 스타일도 달랐다. 영화계 피를 이어받은 시네마서비스는 관련 제작사들을 한 지붕 안에 놓고 사업을 조정했고, 진출이 늦었던 CJ는 제휴 형태로 제작사들에 자율권을 많이 줬다. 제작사들은 선호에 따라 시네마서비스와 CJ 배급망에 참여했지만 영화 제작 형태가 다변화되면서 힘의 우위는 점차 CJ로 넘어갔다.
CJ의 못다 이룬 꿈, 세계 진출
그러던 2004년, 싸이더스와 시네마서비스가 투자·제작한 영화 수익률이 크게 떨어졌다. 당시 무분별한 투자로 한국 영화 투자 수익률이 크게 떨어지던 때였다. 결국 플레너스는 경쟁 배급사였던 CJ엔터테인먼트 품으로 넘어갔고, 상호를 CJ인터넷으로 변경했다. 로커스홀딩스는 2005년 극장 프리머스도 CJ엔터테인먼트에 매각했다. 이로써 CJ엔터테인먼트는 우리나라 영화 배급의 50%, 전체 극장의 4분의 1을 소유하면서 투자, 제작, 배급, 상영의 수직계열화를 이룬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됐다.
멀티플렉스와 투자 배급을 함께 하는 대기업 중심 구도는 더 공고화됐지만 이들 간의 경쟁도 치열했다. 시장에서 가장 먼저 손을 든 것은 오리온이었다. 오리온그룹은 2007년 영화 투자와 배급을 하는 쇼박스만 남기고 메가박스 지분은 팔면서 극장사업에서 철수했다. 메가박스는 2010년 중앙일보 계열사인 제이콘텐트리의 씨너스에 합병돼 메가박스라는 브랜드로 통합됐다. 오리온그룹은 2009년 케이블방송 그룹 온미디어도 CJ그룹에 매각했다. 온미디어는 온게임넷, 오씨엔(OCN), 수퍼액션, 투니버스, 캐치온, 스토리온 등을 보유한 최대 방송채널사용사업자였다. 당시 티브이엔(tvN), 엠넷, 채널CGV 등을 보유하고 있던 CJ는 온미디어 채널을 인수하면서 국내 최대 케이블방송 사업자가 됐다.
2011년 CJ그룹은 플레너스와 온미디어, CJ엔터테인먼트, CJ미디어 등을 모두 CJ ENM으로 통합했다. 충무로 대표 제작사와 배급사, 경쟁사 케이블방송 채널까지 모두 인수하면서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완성시킨 것이다. 이후 CJ는 영화와 방송, 케이(K)팝 등 한국 콘텐츠 산업을 이끄는 대표 그룹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CJ에게도 못다 이룬 꿈이 있다. 30년 전 아시아의 할리우드를 꿈꾸며 시작한 영화가 아직 세계를 향해 본격적으로 내달리지 못한 것이다. 이 꿈을 마저 이루기 위해 조금 더 시장에서 버텨, 더 힘을 내달라는 것이 아마도 영화산업을 바라보는 이들의 공통된 바람이 아닐까 싶다.
김윤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yzkim@koraexi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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