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라만상이 거미줄로 이어져있다
장공(長空) 김재준 목사님을 만나 뵈러 가는 길이다. 그분을 뵙고 이 시대에 필요한 지혜와 힘을 얻어야 한다. 장공의 막내아들 김관용 장로가 차를 운전하는데 길이 말도 못하게 험하다. 험산준령을 넘고 사막을 지나고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헤매는가 하면 갑자기 도시 대로에서 밀린 차들에 막혀 꼼짝도 못한다. 그래도 용케 차를 몰고 몰아 드디어 장공이 은거하신다는 바닷가 작은 마을에 도착한다. 홀연 곁에 있던 김 장로가 보이지 않는다. 차도 없고 사람도 없고 완전 혼자다. 그제야 이게 현실이 아니라 꿈인 걸 알겠다. 아울러 1987년에 돌아가신 장공을 2024년에 만나는 것은 몸으로가 아니라 영으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알겠다. 아직 이렇게 몸을 지니고 있으니 그분을 영으로는 만날 수 있지만 몸으로는 만날 수 없다는 것도 알겠다. 그러니 여태 차 속에서 고생한 것이 모두 헛고생이었던 거다. 이쯤에서 꿈을 벗고 나오는데 누가 속삭여 말한다. …헛고생 아니었네. 자네가 김 장로와 함께 그 고생을 하지 않았다면 장공을 몸으로는 만날 수 없고 영으로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쳤겠는가?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 뵙는 것도 마찬가지라, 세상에는 영(靈)이 죽고 몸만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거니와 하느님께서 그들의 몸은 살려주시지만 그들의 영이 제정신을 차리고 가던 길에서 돌아설 때까지 그냥 두신다네. 집 떠난 둘째가 제 발로 돌아오기까지 문간에서 기다리던 아버지를 생각해보게. 그의 고생이 헛고생이 아니었듯이 자네가 김 장로와 함께 한 것도 헛고생이 아니었어. 하느님이 지으신 세상에 허(虛)가 붙을 수 있는 말은 허공(虛空) 말고 아무것도 없다네. 기억하시게, 세상에 괜히 헛고생하는 인생이란 원천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림 그리는 친구에게 누구도 그림을 그리더라고 말한다. 그가 말을 툭 던진다. 그딴 것도 그림이냐? 한 마디에 발끈 화가 난다. 말소리가 거칠어진다. 네가 그리면 근사한 그림이고 다른 누가 그리면 그딴 그림이냐? 그가 벽에 등을 기대며 말한다. 내가 언제 그딴 그림이라고 했냐? 기가 막힌다. 방금 말하지 않았냐? 그딴 것도 그림이냐고. 아니, 나 그런 말 한 적 없다. 생사람 잡지 마라. 속에서 화가 용암처럼 부글거리지만 저토록 막무가내한 시치미 앞에서 더 무슨 할 말이 없다. 오냐, 내가 잘못 들은 거로 하자. 그가 입술을 비틀며 마지막 말을 비수처럼 가슴에 꽂는다. 잘못 들었으면 잘못 들은 거지 잘못 들은 거로 하자는 또 무슨 개수작이냐? …화들짝, 꿈에서 나온다. 열린 창문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며, 아직 멀었다고, 싱거운 말 한 마디에 화가 용암처럼 부글거리다니 그래서야 어디 식은 재[寒灰]라 할 수 있겠냐고, 이러는 것 같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렇다, 인정한다. 갈 길이 멀어도 한참 멀었다. …누구 글인지 모르겠다. “마음을 허공처럼, 고목에 돌멩이처럼, 식은 재에 꺼진 불처럼 비우고서 그저 조금 응해줄 따름이로다.”(心同虛空去 심동허공거 如枯木石頭去 여고목석두거 如寒灰死火去 여한재사화거 方有少分相應也 방유소분상응야).
-화가가 태블릿에 담아놓은 그림을 본다. 동화책에 실릴 삽화의 스케치란다. 거미가 거미줄에 앉아 깊은 명상에 잠겨있다. 이건 스케치가 아니라 완벽한 걸작이다. 디테일이 생략된 선(線)에 입히다 만 것 같은 채색이 영원한 미완의 완성을 그냥 그대로 보여준다. 오, 마스터피스! 감탄이 절로 나온다. 묻는다, 이거 프린트해서 줄 수 있어요?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공간과 시간이 흔들리고… 지붕 밑 다락 작은 테이블에서 작업하는 화가를 고개 들어 바라본다. 얼굴에 방독면 같은 탈을 쓰고 있다. 묻는다, 탈은 왜 쓰고 있어요? 위에서 답이 내려온다, 그림쟁이가 제 얼굴을 보이면 끝장인 거지. 그림을 어떻게 시작했어요? 어느 날 술에 취하여 하늘에 물었지. 이 혼탁한 세상을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그때 거미가 나를 찾아왔지. 그 뒤로 이 물건이 나와 함께 세상을 어슬렁거리며 세상을 짜고 있지. 알고 보면 삼라만상이 거미줄로 이어진 거미줄이지. 화가가 프린트된 그림을 건네주는데, 받아봤자 헛것이야 꿈이니까, 생각과 함께 꿈이 깨어진다. 아쉽다. 꿈인 줄 몰랐더라면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보이지 않는 얼굴의 화가 손끝에서 거미줄로 살아나는 거미줄 만상(萬象)이라! 거미 몸에서 돋아나 바람에 흔들리며 반짝이던 가늘고 검은 솜털이 눈에 선하다. 어쩌면! 그게 바로…?
관옥 이현주 목사
*이 시리즈는 순천사랑어린공동체 촌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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