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스夜] '꼬꼬무' 골령골 학살 사건…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골령골'의 진실

김효정 2024. 11. 8.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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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 된 골령골의 참혹한 진실은?

7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죽음의 골짜기'라는 부제로 수십 년간 묻혀있던 참혹한 비밀의 그날을 추적했다.

1993년, 대전시 동남쪽에 위치한 한적한 산골짜기에서 한 남성이 무언가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가 발견한 것은 바로 사람의 뼈. 골짜기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뼈에 충격을 받은 이는 마른 어르신들을 찾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그를 잔뜩 경계했고 "사건에 대해 꼬치꼬치 물으면 경찰이 신고하라고 했다"라는 말과 함께 입을 닫았다.

이후 심 기자는 마을 어르신 한분 한 분을 만나 설득하고 그 골짜기가 사람의 뼈가 많이 나와 골령골이라고 불린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었다. 사람 뼈가 하도 많아서 가축이나 산짐승들까지 뼈를 물고 다닐 정도라고. 대체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골령골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은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25 전쟁 발발 이틀 후, 충남 서천에 살고 있던 남식 씨의 아버지를 경찰들이 데려간 것.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를 찾겠다고 나선 작은 아버지까지 행방 불명되었다.

특히 이런 일들은 전국 각지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전선에서 인민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그때, 후방에서 수많은 이들이 행방불명된 것.

내무부 치안국에서 전국 경찰국으로 하달된 무선전문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전국 요시찰인 전원을 구금할 것"

요시찰인은 사상이나 보안 문제로 감시 대상이 된 사람들인데 당시 요시찰인은 좌익 세력을 일컫고 있었다.

남식 씨의 아버지는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수재로 동아일보 서천지부장까지 맡고 있었다. 그러나 좌익 활동은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는 대체 왜 붙잡혀 간 것일까?

미군정에 통치를 받던 당시, 미군정에 반발하는 집회를 취재했던 남식 씨의 아버지. 그 후 그는 정부에서 만드는 국민보도연맹의 서천지부장을 맡으면 처벌받는 것은 사면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미군정에 반발하는 집회를 취재했다는 것만으로 좌익이라 여겨졌던 그에게 좌익 행동을 자수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던 것. 이에 남식 씨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당시 이 단체에 가입한 인원은 무려 30만 명이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터지자 경찰은 보도연맹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이들이 인민군의 편에 설 수도 있다며 예비검속을 했던 것.

그렇게 남식 씨의 아버지도 대전 형무소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제주 4.3 사건과 여순사건의 관련자들도 있었다.

이후 이들은 1950년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골령골에서 살해되었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려 1400명이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나무 기둥에 묶인 채 총살해 시신이 5, 60구 모이면 장작 더미에 던져 화장을 시켰다. 그런데 비극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7월 1일,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하기 전에 남은 재소자들의 처형을 지시한 것. 이에 2차 처형이 시작됐다.

재소자들을 싣고 골령골로 향한 헌병대는 기다란 구덩이 앞에 재소자들을 엎드리게 한 뒤 총살했다. 확인 사살까지 한 후 구덩이로 시신을 밀어 넣으면 다음 재소자들을 데려와 다시 총살하는 식으로 총 3일 동안 처형했다.

그리고 이 끔찍한 일은 1999년 공개된 미국의 비밀문서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었다. 3일간 1800명이 학살되었고 이 같은 학살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으며 이는 분명 최고위층에서 명령이 있었음을 확신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학살 현장이 담긴 사진들이 그날의 참혹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미국도 이미 아는 대량 학살, 그러나 그들도 침묵을 택했던 것이다.

또다시 새로운 재소자들로 채워진 대전형무소, 그러나 이들은 또다시 똑같이 골령골에서 처형되었고 그렇게 군국이 후퇴하기 전 3차 학살로 약 1700명이 희생되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뒤집혔지만 폐허가 된 대전으로 돌아온 이들이 마주한 것은 시신들로 가득한 대전 형무소의 모습이었다.

1950년 7월 21일, 골령골에서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인민군들은 가해자들을 찾아 나서고 경찰과 공무원 등 우익인사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그리고 이들은 대전 형무소를 인민교화소라 부르며 이들에게 양민을 탄압하고 학살한 죄를 인정하는 자술서를 쓰게 했다.

또한 이들은 후퇴 전 3일 동안 재소자들을 향한 무자비한 학살을 진행했다. 그렇게 1557명이 죽임을 당했다.

남한에 의해 북한에 의해 잔혹한 학살이 일어났고 그 피해는 민간인들이 고스란히 받았던 것. 그리고 피는 또다시 피를 불렀다.

부역자 처단이 진행됐는데 많은 이들이 부역자로 몰린 것이다. 피난을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역자가 되고 검증도 없이 누군가가 밀고만 하면 바로 부역자가 되었던 것.

전국 각지에서 똑같은 일들이 일어났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비극이 또다시 반복되었다.

남과 북 모두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 그러나 한국 군경에 의한 학살은 오랜 시간 묻혀있었다.

인민군 학살만 알린 정부는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을 위해 조사 위원회가 꾸려지고 위령비도 세웠다. 하지만 우리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이들은 숨 죽인 채 살아왔고 오랜 시간 동안 비극은 묻혀있었던 것.

그런데 한 기사를 통해 1992년 골령골의 비극이 세상에 알려졌다. 4천300여 명이 학살된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그리고 이야기 시작에 골령골에 서있던 심 기자가 이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아 현장으로 갔던 것이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이 일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심 기자는 골령골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진상 조사단을 꾸려 이 일을 세상에 알리고 유족들을 찾아서 유족회 결성했다.

그리고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자 2007년 대전 골령골을 첫 유해발굴지로 선정했다.

하지만 땅 주인이 유해발굴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에 심 기자는 다른 매장지를 찾겠다며 유해 발굴을 반드시 진행해 달라고 애원했다.

우여곡절 끝에 또 다른 매장지를 찾아낸 심 기자. 그렇게 유해발굴이 시작되었고 두 곳의 매장지에서 각각 29구와 5구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2평 남짓한 공간에서 29구의 유해가 나온 한 매장지에서는 A4 한 장짜리 공간에서 한 사람의 머리 팔다리뼈가 포개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죽어서도 몸을 펴지 못한 채 묻혀있었던 것.

유족들은 유해 발굴 소식에 민간인 학살의 증거가 나왔다는 것만으로 기뻐했다. 정부에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 것.

이 사건으로 부모를 모두 잃은 유족 미경 씨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부모가 없는 삶은 척추가 없는 삶이라 회상했다. 그리고 남식 씨의 어머니는 혼자 여섯 형제를 키우느라 고초를 겪었다.

그런데 이들을 더 힘들게 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연좌제.

아버지를 잃은 유족들에게 찍힌 이 낙인으로 유족들은 단 하루도 편히 살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시선들을 감당하는 것이 죽음보다 더 했던 것이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골령골 학살 사건이 명백한 범죄 행위이자 정치적 살인이라는 내용의 진실규명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또한 골령골 사건의 최종적 책임은 국가에 있다며 정부에 피해자와 유족들에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그들을 위로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진화위가 해산되자 무섭게도 모든 것은 이 보고서가 없던 예전으로 돌아갔다. 유해발굴 역시 중단되었다.

이에 유족들은 2기 진화위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고 민간차원의 유해 발굴도 시작했고 그 결과 20구의 유해를 추가로 찾았다.

이후 2016년 정부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 추모 평화공원 설립을 추진했다. 이에 심 기자는 골령골을 평화공원 건립지로 선정되도록 유치 TF팀까지 꾸렸다.

그 결과 대전 골령골이 추모공원 건립지로 선정되었다. 단일사건으로 최대 규모의 학살 현장이었던 만큼 추모공원 건립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했던 것.

평화공원 건립이 결정되며 골령골은 뼈 골에 영혼 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영혼이 깃든 골짜기라는 의미가 담긴 것. 그리고 정부 차원의 유해 발굴도 재개되었다.

이에 셀 수 없이 많은 유해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이전에 발굴된 것까지 총 1441구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1킬로미터나 되는 긴 매장지는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었다.

그런데 평화공원이 건립되면 그곳에 안장될 계획이었던 유해는 현재까지도 누울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2020년까지 건립하기로 했던 평화공원이 아직도 세워지지 않고 있었던 것. 정부는 2024년까지 평화공원 준공을 연기했지만 올해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까지도 한 삽도 뜨지 못했다.

현재 유해들은 세종시 추모의 집에 임시 안치되어 있는 상태. 이에 유족들은 생전에 평화공원이 건립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유족 미경 씨는 그것만 이뤄진다면 이 세상을 살면서 다른 소원은 없다고 눈물을 흘려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57년이 걸려 골령골에 묻힌 사람들을 찾아냈고 60년이 걸려 정부의 잘못임이 밝혀진 골령골 학살 사건. 그러나 74년이 지난 지금도 유해는 아직 누울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념 문제가 아닌 전쟁 범죄인 이 사건은 비단 골령골만의 일이 아니었다. 전국 각지의 골짜기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만약 이를 또다시 우리가 외면하면 그 진실 위에 다시 한번 흙을 덮는 것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닐까?

평화공원이 세워지는 날 골령골은 더 이상 죽음의 골짜기가 아닌 평화와 화해의 골짜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그런 날이 하루빨리 다가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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