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민족과 역사에 자신을 묶는 것이 참된 해탈

고명섭 기자 2024. 11. 8.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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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 100년 맞아
도올 김용옥 ‘만해 시와 사상’ 해설

유교와 불교와 서양을 하나로 꿰어
선의 언어로 ‘님과 님의 만남’ 그려
만해 한용운. 한겨레 자료사진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 1·2

김용옥 지음 l 통나무 l 각 권 1만 8000원

2025년은 만해 한용운(1879~1944)의 ‘님의 침묵’이 집필된 지 100년 되는 해다. 1925년 여름 만해는 강원도 백담사의 오세암에서 두달 남짓 만에 ‘님의 침묵’ 연작시 88편을 완성했다. 도올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가 쓴 ‘만해 한용운, 도올이 부른다’(전 2권)는 한국 근대문학의 일대 성취인 이 시집의 시들을 만해 사상의 지평에서 해설하는 책이다. 도올의 해설 속에서 만해의 시는 역사적 핍진함과 형이상학적 웅혼함의 날개를 펴고 날아오른다.

만해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만해를 잘 아는 사람도 없다. 만해를 알려면 만해의 사상과 작품이 총괄된 ‘한용운 전집’(1973)을 읽어야 한다. ‘한용운 전집’의 초석을 놓은 이는 ‘승무’의 시인이자 ‘지조론’의 저자인 조지훈(1920~1968)이었다. 만해론에서 조지훈은 만해를 “혁명가와 선승과 시인의 일체화”라고 말했다. 또 만해의 올곧은 삶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포악한 일제의 발굽 아래 비틀어진 세상에 국내에서 끝까지 민족정신의 지조를 지킨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 많지 않음 속에서도 진실로 매운 향내의 면에서 능히 선생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분은 없다.”

만해의 시 세계를 통관하려면 먼저 만해 정신의 성장 경로를 따라가 보아야 한다. 만해 사상의 바탕은 유학이라는 전통사상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만해는 어린 나이에 ‘자치통감’을 독파하고 ‘서경’에 통달하는 신동의 면모를 보였다. 19살 때인 1897년 만해는 무작정 집을 떠났다. ‘혼란스러운 세상에 인생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이때부터 만해는 백담사와 오세암을 오가며 불교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갔다. 1905년에는 승려로서 정식으로 계를 받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만해가 이 시기에 중국의 근대사상가 량치차오(양계초)가 쓴 ‘음빙실문집’(1902)과 청말 진보사상가 서계여가 쓴 세계인문지리서 ‘영환지략’(1849) 같은 책을 읽고 근대 서구 사상을 흡수했다는 사실이다. 또 1908년에는 반년 남짓 일본 조동종대학에 유학하기도 했다. 이런 공부는 만해의 시야를 세계 차원으로 넓혀주었다.

불교 사상가로서 만해의 첫 일성은 1910년에 집필한 ‘조선불교유신론’에서 터졌다. 정식 승려가 된 지 5년 만에 쓴 이 저서에서 만해는 낡은 불교를 파괴해야 새 불교를 세울 수 있다고 외쳤다. 이어 이 책을 쓰고 3년여 만에 ‘불교대전’(1914)을 완성했다. 이 저작은 해인사 ‘팔만대장경’(1511부 6802권)을 섭렵하고 거기서 핵심을 뽑아내 재편집한 책이었다. 다시 3년 뒤 만해는 오세암에서 동안거 수행을 하던 중 모든 의심이 한순간에 깨져 나가는 깨달음을 얻었다. 만해는 ‘오도송’을 지어 “드디어 한 소리로 삼천계를 할파하였으니/ 눈보라 속 흩날리는 복사꽃잎이 온 우주를 붉게 물들인다”고 포효했다. 눈보라 치는 세상과 복사꽃 피는 정토가 하나로 통했다.

불가에 머물던 만해에게 결정적 변화를 안긴 것은 1919년 3·1만세 의거였다. 이때 만해는 불교계 대표로 연설하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뜻을 밝히라는 ‘공약삼장’을 낭독했다. 3·1의 주동자 만해는 경성감옥에서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도 만해의 활동은 쉬지 않았다. 만해는 ‘조선독립의 서’라는 장문의 글을 발표해 “침략적 자유는 평화를 무너뜨리는 야만적 자유”가 될 뿐이라고 일제를 규탄했다. 만해는 ‘변호사를 대지 않고, 사식을 받지 않고 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실천하며 선승의 자세로 고난을 견뎠다. 이 고난 중에 “지옥 속에서 천당을 구하라”는 경전의 말씀을 온몸으로 아는 새로운 깨달음이 찾아왔다. 오세암에서 얻은 형이상학적 진리가 구체화해 쇠창살 안에서 민족과 역사의 진리로 얼굴을 드러냈다.

이 체험을 안고 출옥 후 3년이 지나 한달음에 써낸 것이 ‘님의 침묵’이다. 이 시집의 사상은 만해가 ‘군말’이라고 이름 붙인 ‘서시’에 집약돼 있다. 이 서시에서 만해는 “님만이 님이 아니라 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라고 선언한 뒤 ‘칸트에게는 철학이 님이고 마치니에게는 이태리가 님’이라고 말한다. 칸트는 인간 주체의 고귀함을 선포한 근대성의 철학적 완성자이며 마치니는 이탈리아 통일운동가로서 그 주체의 고귀성을 민족이라는 틀로 구현하는 데 몸 바친 사람이다. 만해의 역사적 깨달음이 칸트와 마치니로 드러난 것이다.

더 주목할 것은 “님은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라고 노래하며 “부처의 님은 중생”이라고 하는 대목이다. 중생만 부처를 님으로서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도 중생을 님으로서 그리워한다. 이 님의 상호성이라는 통찰이 시집 전체의 긴장을 높이며 역사적 지평과 형이상학적 차원을 꿴다. 도올은 그 님이 수운 최제우가 60여년 전 선포한 ‘천주’(하늘님)의 님과 다르지 않다고 강조한다. 이어 만해는 “나는 해 저문 들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그리워 이 시를 쓴다”고 노래한다. 여기서 어린 양은 ‘신약성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그 어린 양이다. 도올은 만해가 동서의 경전을 관통해 ‘석가다, 예수다’ 하는 분별을 넘어섰다고 말한다. “만해는 오직 님만을 생각한다.”

만해의 시집이 나왔을 때 인도 시인 타고르의 시와 유사하다느니 하는 평들이 있었다. 그러나 만해의 시와 타고르의 시는 사상의 차원이 전혀 다르다. 이 시집 안에 만해 자신이 ‘타고르의 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가 있다. ‘시로 쓴 평론’이라 할 만한데, 거기서 만해는 “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해도, 백골의 입술에 입 맞출 수 없다”고 한다. 타고르의 ‘주님’은 이 세상을 초월한 절대자여서 그 절대자에게는 사회도 역사도 혁명도 없다. 만해의 님은 역사 속에서 고난받는 민족, 핍박받는 민중으로 나타나 나와 함께하는 님이다.

그 함께함을 만해는 ‘선사의 설법’이라는 시에서 역설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먼저 선사가 말한다. “너는 사랑의 쇠사슬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즐거우리라.” 만해가 답한다. “그 선사의 말은 어리석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인 것이 아프기는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 더 아픈 줄을 모르는 말입니다.” 만해는 다시 말한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입니다.” 민족과 역사에 자신을 묶는 것이야말로 참된 해탈의 길임을 만해의 시는 웅변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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